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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의 브라보 클래식] ⑮ 절망서 간절함으로 기회 를 낚은 헨델…한 해 지친 삶 ‘메시아’로 위로를
입력 : 2012.12.07 15:5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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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울시향 찾아가는 음악회, (아래)헨델
경제적 파탄과 정신적 실의에 빠진 헨델은 회환의 눈물을 흘리며 이 곡을 썼다고 한다. 작곡가로 명성을 얻었으나 성격이 급하고 화를 잘 내 적이 많았던 그는 이 곡을 쓰면서 지나온 세월을 처절하게 반성했다.
이렇듯 경건한 마음으로 혼신을 다해 쓴 이 작품은 종교를 초월해 깊은 울림을 준다. 1750년 초연 당시 ‘할렐루야’ 대목을 합창할 때 너무 감동을 받은 국왕과 관객들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예를 갖췄다고 한다. 그 이후 일어서서 듣는 전통이 불문율처럼 생겼다.
작곡가 하이든(1732~1809)은 이 대목을 들으면서 ‘저편에 신의 영광이 나타났도다’라고 외치며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쓸 결심을 했다고 한다. 헨델은 ‘메시아’ 성공으로 완전히 재기했다. 자신이 직접 지휘해 56회나 무대에 올렸다. ‘메시아’가 신의 은총으로 태어난 작품이라고 믿었던 헨델은 초연 때부터 모든 수익금을 환자와 죄인을 위한 자선기금으로 기부했다. 그가 죽기 전에 들었던 음악도 ‘메시아’였다.
영국에서 오페라로 성공한 독일 작곡가 헨델은 1685년 2월 23일 독일 삭소니주 할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할레 대학에서 법률을 배웠지만 음악 열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도 생각을 바꾸고 할레의 음악 교사 짜하우에게 아들을 보낸다. 덕분에 헨델은 17세에 할레 교회당 오르간 주자가 됐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가극을 좋아해서 그 작곡 기법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마침내 20세에 오페라 <알미라>를 상연했다. 이후 4년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이탈리아 가극의 진수를 배웠다. 1710년부터는 독일 하노버 왕조의 선제후 게오르규의 전속 악장으로 일했다. 답답한 고국을 벗어나 큰 꿈을 이루고 싶었던 헨델은 선제후에게 휴가를 얻어 영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자작 오페라를 상영하고 영국 앤 여왕의 생일 축하 송가를 작곡해 총애를 받게 된다.
영민하고 포부가 컸던 헨델은 처세의 대가였다. 같은 해 태어난 바흐(1685~1750)는 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는 음악적 재능을 출세에 이용할 줄 알았다. 독일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영국 왕실의 궁정 악장으로 발탁돼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그 영리함을 짐작할 수 있다. 74년 생애 중 47년을 영국에서, 27년을 독일에서 살았다.
특히 1711년 영국 런던 헤이마켓 왕립극장에서 초연한 오페라 <리날도>가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오페라는 오늘날 영화 <파리넬리> 명장면으로 재탄생했다. 돌아선 국왕의 마음을 다시 얻은 음악 영국에서 얻은 부귀영화에 도취된 헨델은 선제후 게오르규의 귀국 명령에 불복하고 영국에 계속 체류했다. 아예 영국인으로 귀화해버려 미움을 샀다. 그런데 얼마 후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긴다. 앤 여왕이 갑자기 서거하고 게오르규가 영국 국왕 조지 1세에 즉위하는 기막힌 사태가 벌어진 것. 당연히 헨델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를 의리 없는 인간으로 생각했던 새 국왕은 연금 혜택을 없애버린다. 물론 상류 사회에서도 방출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헨델이 아니었다. 그는 국왕의 마음을 돌릴 ‘음모’를 꾸몄다. 1717년 6월 템스 강에서 거행될 왕의 즉위 축하 뱃놀이 잔치에 몰래 배 한 척을 띄운다. 이 배에 관현악단을 태워 자신이 만든 음악을 연주한 것. 이 곡이 바로 유명한 관현악 모음곡 <수상음악(Water Music)>이다. 뱃놀이를 하던 국왕은 강가에서 은은하게 들리는 이 음악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작곡가를 수소문하게 된다. 헨델인 것을 알게 된 왕은 노여움을 풀고 다시 궁전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다. 그 후에도 왕이 이 곡을 즐겨 들었다고 하니 둘 사이의 오해는 완전히 사라진 듯하다. 이 일화의 사실 여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수상음악’이 명곡인 것은 틀림없다. 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해 작곡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밝고 산뜻하다. 장대한 서곡으로 시작해 짧고 명랑한 춤곡들이 이어진다.
아득한 밤 감미로운 세레나데로 제격인 이 작품은 야외 음악으로는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1749년)’과 더불어 헨델의 걸작으로 꼽힌다. 악기의 편성이나 곡의 배열이 탁월하고 내용이 자유롭다.
이처럼 남다른 처세술을 보였던 헨델은 돈을 버는데도 천부적 소질이 있었다. 대규모 연주회를 기획하고 직접 오페라단을 창단해 흥행에 성공했다.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자신의 음악을 알리는 동시에 돈까지 벌어들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그러나 재테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도박과 투기에 빠지기도 한다. 또한 ‘돈을 위해 음악을 팔아먹은 사기꾼’이라는 비난도 따라다녔다.
어쨌거나 평생 부자로서 호화롭게 살았던 헨델의 음악도 화려하다. 온갖 기교를 부리고 장식음을 넣어 선율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이듬해 4월 완성한 작품이 ‘왕궁의 불꽃놀이’. 이 곡의 리허설을 보기 위해 1만여 명이 몰리는 바람에 런던 브리지가 3시간 동안 막혔다고 한다. 정식 공연은 며칠 후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그린파크에서 열렸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 불꽃놀이가 이어졌다.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트럼펫과 호른 등 관악기 54개와 팀파니 3개 등 100여 명의 연주자를 총동원한 대규모 편성이었다. 국왕이 화려하고 웅장한 연주를 요구했기 때문. 당연히 소리는 지축을 울릴 정도로 우렁찼고 벅찼다.야외 행사 음악을 예술적 경지에 끌어올린 이 곡은 승전을 축하할 뿐만 아니라 64세 헨델의 ‘제2인생’을 상징한다.
그러나 또 다시 불행이 찾아왔다. 1751년 오라토리오 <예프타(Jephtha)>를 작곡하던 중 시력을 잃었다. 노안에다 눈병이 나서 한 영국 의사에게 수술을 받은 후 더 악화됐다. 공교롭게도 바흐를 실명하게 만든 그 의사였다. 하지만 이미 재기의 경험이 있는 헨델은 앞이 캄캄해진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지휘를 계속했다. 조수의 도움을 받아 옛 작품들을 다시 다듬기도 했다. 그렇게 8년 동안 자신의 작품들을 정리한 후 1759년 4월 14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사후 최고 영예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매장된 그는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해 거액의 유산을 남겼다. 비록 왕가와 귀족에 영합하는 세속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인간미가 넘쳤다. 올해 서거 253주년을 맞는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유다.
[전지현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7호(2012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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