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ne]재미있는 와인 이야기 둘…두 번이나 장식한 샴페인은?
입력 : 2012.08.06 09:24:46
-
“더드, 내가 큰 신세를 졌어. 시간되면 한 번 건너와. 내가 볼랭저 한 병 딸게(Dude. I owe you big time! Come over one day and I’m opening a bottle of Bollinger).”
7월 2일엔 기사가 아니라 칼럼 제목이 제호 바로 밑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했다. 그 문구는 이렇다.
‘(투자은행의 지니를) 볼랭저 병에 넣어라(Bowler Hats to Bollinger).’ 지니는 누구나 다 아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그 요정인데 투자은행의 대가들을 지니에 비유했다.
이번 기사와 칼럼은 모두 최근 영국에서 일어난 금리조작 사건인 리보(RIBOR) 파문에서 바클레이즈와 관련된 것들이다. 세계적 기준금리로 통용되는 리보금리를 조작한 이 사건 때문에 바클레이즈의 CEO가 물러난 바 있는데 앞의 기사는 바클레이즈의 전 직원이 금리파생상품 트레이더에게 리보 금리를 낮춰달라고 하면서 보낸 이메일의 한 대목이다.
여기에서 나타났듯이 큰 거래를 한 건하고 난 뒤 한잔 하자는 것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관행인 것 같다. 볼랭저는 돔 페리뇽과 함께 이런 자리에 자주 등장하는 샴페인으로 꼽힌다.
이번엔 좋지 않은 일로 이름을 날리게 됐지만 사실 볼랭저는 빅토리아 여왕 시절인 지난 1884년 영국 왕실이 최초로 지정한 공식 샴페인으로 인증서(Royal Warrant)까지 받았다. 이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1981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식 연회 때도 사용됐다. 에드워드 7세도 볼랭저 샴페인을 아주 좋아해서 사냥을 나갈 때도 챙겨 다녔는데 볼랭저는 그가 특히 좋아한 논빈티지 샴페인에 1911년부터 ‘스페셜 꾸베 브뤼’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007 샴페인’으로도 널리 알려진 볼랭저는 1973년 <죽느냐 사느냐>를 시작으로 <문레이커(1979년)> <옥토퍼시(1983년)> 등 모두 12편의 007 시리즈 영화에 등장했다. 샴페인 업계에서 볼랭저는 특히 검은 피노누아로 만든 흰 샴페인이란 뜻의 ‘블랑 드 누아’ 메이커로 이름이 높다. 볼랭저의 최고급 블랑 드 누아인 ‘볼랭저 비에유 빈뉴 프란카이스(Bollinger Vieilles Vignes Francaises)’는 연간 5000병 내외만 만들고 있는데 한국엔 매년 60병만 배정되고 있다고 한다.
익지도 않은 와인이 맛있다고?
최근 소펙사 주관 부르고뉴 와인 세미나에 나온 장 피에르 르나르(Jean Pierre Renard) 강사는 이에 대해 “이 와인은 10~15년 후에 마셔야 한다”고 밝혔다. 르나르 강사는 그러면서 “세계에서 와인을 산 뒤 가장 빨리 마시는 것으로 정평이 난 미국 사람들은 평균 두 시간이면 병을 딴다”고 농담을 건넨 뒤 “나는 보통 5년 정도는 기다렸다가 마신다”고 했다.
그의 말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와인을 좀 마셨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호기로 와인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접대를 하는 자리에선 으레 조금은 비싸다 싶은 것들을 고른다. 그러고는 그냥 따서 마신 뒤 맛있다고들 한다. 실제로는 (때가 안 돼서) 맛이 없는데도 남들 앞이니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맛있다’거나 ‘대단하다’고 한다. 상대가 사는 와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비싼 와인의 경우 대부분은 오랜 기간 숙성을 거쳐야 제 맛이 난다. 그랑 크뤼 등급에선 10년 이상 숙성이 필요한 것도 많다. 이런 와인을 어쩔 수 없이 일찍 열어야 한다면 적어도 마시기 한두 시간 전에 디캔팅을 해야 한다.
그에게 “그렇다면 와인이 숙성된 뒤 팔아야지 왜 숙성도 되기 전에 파느냐”고 물었다.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신 같으면 조금 더 주겠다며 5년 있다가 월급을 주면 좋아하냐.” 그러면서 그는 “부르고뉴 와인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기다리면 열배 이상의 보상이 돌아온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부르고뉴 와인이라고 모두 오래 기다려서 마시는 것은 아니다. 부르고뉴에선 현재 6만여 종의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 그 중엔 바로 마셔도 좋은 것도 있고 오래 숙성해서 마셔야 되는 것도 있다. 그 많은 와인을 어떻게 구분할까. 매일 한 가지씩 마신다고 해도 20년 가까이 마셔야 겨우 한 번을 돌 수 있는데…. 게다가 매년 나오는 빈티지가 또 다르니 끝이 없는 일 아닌가.
그 역시 부르고뉴 와인의 특징을 한마디로 설명하라면 “모른다고 하는 게 답이다”라고 했다. 6만 가지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
김치가 잘 익어야 맛이 나듯 와인도 제대로 숙성돼야 제 맛이 난다. 그런데 보졸레 누보 같은 가벼운 와인들은 햇와인의 느낌을 맛보는 것이다. 이런 와인은 시간이 지나면 식초가 돼 버린다. 무조건 보물처럼 넣어선 곤란하다는 얘기다.
[정진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3호(2012년 08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