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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 한수산 에세이…자작나무 그늘에 앉아
입력 : 2012.08.06 09: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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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초등학교 교감이었던 아버지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지 정암사 아랫마을인 고한으로 쫓겨나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것은 두 가지였다. 군 입대와 희망 없음. 그것이 그 전부였다. 고3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아 나는 매일 집을 나와 정암사 경내를 한 바퀴 돌고 앞쪽 태백산의 한 기슭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내 개인사 안에 어슴푸레 남아 있는 몇 가지의 매듭 가운데 자살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던 청소년기의 마지막이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날이 밝지 않은 새벽에 산을 오르기도 했고 계곡이 어두워 오는 저녁 무렵에 집을 나서서 산으로 향하기도 하던 어느 날 산 정상에서 기진해 쓰러진 것은 오후였다. 가슴 높이로 차오른 눈 위에 누웠을 때 추위나 고통은커녕 몽롱하면서도 그토록 달콤할 수가 없이 잠이 쏟아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보았다. 내 옆에서 하늘로 치솟으며 바람에 떨고 있는 자작나무들을. 주위는 어둑어둑하게 저물고 있었다. 그때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엄청난 공포가 다가왔다. 치솟은 자작나무 사이로 저물어 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나는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생에 대한 처절한 갈망을 느꼈다. 명료한 의식 속에서 떠오른 그 한마디. ‘아 살고 싶어요.’
어떻게 산을 내려왔는지 모른다. 겨우겨우 몸을 지탱하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무너지듯 앓아누웠다. 며칠 후 병후의 몸으로 마당을 내다보며 앉아 있을 때였다. 지붕의 눈이 녹으며 길게 매달렸던 고드름 하나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때 내 가슴 속에서도 결심 하나가 떨어져 내렸던 것일까. 며칠 후 나는 대학 입학원서를 쓰기 위해 춘천으로 떠났다.
백두산에서 영세를 받으며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은 1989년이었다. 그때 가족과 함께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나는 갑작스런 중국여행 제의를 받았다. 한중 국교도 이루어져 있지 않았을 때였다.
그것도! 아니 그것조차도 하느님의 뜻이었던가 훗날 홀연히 생각하게 된 여행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나는 도쿄를 떠나면서도 이 여행을 함께 할 동행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베이징 공항에 내려서야 비로소 성 나자로 마을의 이경재 신부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레티치아 수녀가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여행 도중 나는 백두산에 올라 천지가 비취빛으로 빛나던 9월 13일 가톨릭 신자로 세례를 받았다.
그날 덜컹거리며 뒤뚱거리며 백두산을 내려오는 버스는 무리지어 바람에 흔들리는 자작나무 숲을 지나게 되었다. ‘때리면 울리는 종이 되어 있겠습니다. 언제든 저를 때리십시오. 칼이 되어 기다리겠습니다. 언제든 저를 들어 쓰십시오.’ 그것이 그 자작나무 숲을 지나며 내가 드린 첫 기도였다. 하느님의 아들로 내 모든 것을 바치리라는 순명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그 후 103회에 걸친 한국천주교 순교자에 관한 르포와 다섯 권의 가톨릭 관련 책을 펴내면서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시베리아 열차에 오른 것은 1997년 가을이었다.
옛 소비에트 연방이 실시했던 비인간적이기 그지없는 폭거인 고려인의 강제 이주는 1937년 10월에 이루어졌다. ‘스탈린 치하의 구소련은 고려인 20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 과정에서 2만5000여명이 숨졌다’고 정리되는 민족적 비극이다. 이 강제이주 60년을 맞아 한 시민단체가 그때를 되돌아보는 행사를 기획했고 그 하나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까지 ‘회상의 열차’라는 이름의 특별열차를 운행하는 것이었다. 한 언론사로부터 이 열차에 동승해서 여행기를 써달라는 제의를 받고 나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타슈켄트에 닿기까지 10박11일을 열차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던 그 여행에서 나를 황홀하게 한 것은 대지의 장엄함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지겹도록 지루하다고 말하는 풍경들이었다. 거기서 자작나무 숲을 만났다. 노랗게 단풍이 든 자작나무 숲은 거대한 황금의 병풍처럼 차창을 메우며 몇 시간씩 이어졌다. 그 황금빛 대지를 바라보며 나는 창문의 쇠창살을 잡고 미동도 없이 서서 생각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를 만든 것은 이 대지였구나.’ 그 열흘간의 각성은 나에게 다른 결심으로 다가왔다. 내 문학의 중심축을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리며 사라져간 사람들 속으로 돌려놓으며 일제강점기와 원폭 피해자를 전면에 내세운 다섯 권의 장편소설 <까마귀>를 끝낼 수 있었던 건 그때 그 자작나무 숲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이 가라앉은 앙금이었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다음 해 봄 그 무엇을 하기에도 터무니없이 열악한 골짜기의 산비탈을 사서 자작나무를 심었다. 무위에 가깝게 다만 자작나무 숲 하나를 가지고 싶다는, 그러므로 다만 자작나무를 심는다는 생각에서 한 일이었다.
중장비를 불러 산의 경사와 굴곡을 다듬고 주변의 돌담과 개울도 손을 보고 나서 손가락만한 굵기에 키는 무릎에 오는 어린 묘목들을 심었다. 나무 심기를 마치던 날 저녁이었다. 도랑 건너편 밭둑에 앉아 나무들을 건너보았다. 꿈만 같았다. 저 나무들이 나보다도 더 오래 이 세상에 살아남아 울창하게 아름다우리라는 생각을 했을 때 너울너울 내 한 생애가 날아가고 그 날아가는 생애의 꺼풀을 내가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땅도 그 나무도 지키지 못한 몇 년이 가고… 거기서 옮겨 심은 겨우 열 몇 그루의 나무가 이제는 2~30m의 높이로 자라 올랐다. 몸통도 튼실해져서 몸을 기대고 서도 좋은 굵기로 자랐다.
그 자작나무 그늘 아래 앉아 이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연재가 지난날 우리의 기층문화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돌아보면서 오늘의 현실풍속을 둘러보는 동시에 내일의 라이프 사이클을 생각해 보는 자리였으면 한다. 내가 살아낸 세월 속에서 사회변화와 의식의 변화는 어떻게 함수관계를 그리며 진행되었던가. 그 날금과 씨금으로 내가 산 날들을 돌아보려 한다. 자작나무 그늘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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