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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oneer]인생은 잘 하는 것 하나면 됩니다…전통혼례 재현 쇳대박물관장 최홍규
입력 : 2012.07.06 14: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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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관장은 “올 연말부터 내년 초까지 예정된 ‘아시아 혼례문화’ 전시의 일환으로 아들의 결혼식을 올렸다”고 밝혔다. 그래서 “결혼식은 이날 올렸지만 전날 저녁에 쪽 짓고 상투를 틀고 성인식까지 치렀다”고 덧붙였다.
결혼식 전 과정은 다큐로 남겼다. 9명의 사진사가 동원됐고 책으로도 낼 것이라고 했다.
최 관장은 “결혼식이 하나의 퍼포먼스였다”며 그렇기에 돈과 시간을 들였고 기록으로 남겨 보존하고 활용할 것이라고 했다.
제대로 된 전통혼례를 재현하다 보니 결혼식은 3시간 정도 걸렸다. 보통 예식장에선 길어야 한 시간이면 끝나는데…. 그런데도 하객 모두가 자리를 뜨지 않고 혼례를 즐겼다. 다시 보기 어려운 풍습을 깊게 새기고 싶었던 것이다.
“요즘 예식장에선 와인 한 잔 마시고 오기에도 바쁘다. 옛날 잔치는 며칠씩 했는데…. 정말 축복받는 자리로 만들고 싶었다. 또 의미 있는 결혼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공부도 많이 했다.”
힘든 퍼포먼스를 아들과 며느리가 흔쾌히 응했을까?
“모두가 착한 아들, 착한 며느리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에게도 영광이다.”
그렇지만 며느리를 위해 드레스 촬영은 해줬다고 했다. 드레스 입는 게 모든 신부들의 로망이 되었으니까.
최 관장은 이번 식을 준비하느라 두 달 전부터 각계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댔다고 밝혔다.
“인간문화재 일곱 분이 도와줬다. 복식부터 장신구며 갓과 족두리까지 모두 인간문화재들이 이날을 위해 새로 만들었다.”
십장생 활옷 외에도 조선 순조의 딸인 복온공주가 결혼식 때 입은 활옷도 재현했다. 이를 위해 여러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음식은 진관사에서 보내주셨다. 내 고향이 북한산성 너머라 지축리 신돌초등학교에 다녔고 어려서부터 진관사와 인연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 결혼하는데 진관사에서 음식을 보내줬으니 감회가 새롭다. 나중에 답례를 해야지. 이외에도 여러 분이 몸부조를 해주셨다. 리빙 스타일리스트, 푸드 스타일리스트, 곽희지 선생, 서영희 선생(한복 스타일리스트) 박정옥 명창 김윤경 선생 최남희 선생 등 모두 즐겁게 해주셨다.”
최 관장은 이번에 재현한 전통복식을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혼례에 제공할 뜻도 밝혔다.
“이번 결혼식의 콘셉은 ‘목단’이었다. 목단은 고귀와 부귀영화를 뜻한다. 원래는 소박하고 검소하고 격의 없는 결혼식을 생각했는데 고증을 거치다 보니 당초 의도와 달리 화려해졌다. 그렇지만 이번에 기본 복식이 준비되었으니 앞으로 결혼하는 사람들에겐 실비로 제공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쇳대박물관의 새로운 구상을 밝혔다.
“지금 양평 강상면에 복합문화공간을 짓고 있다. 거기엔 공방과 박물관 미술관 전통한옥 이벤트홀 등이 들어선다.” 이번 결혼식에 사용한 복식을 양평복합문화공간에서 활용할 것이라고 했다.
최 관장은 특히 양평복합문화공간을 에코 뮤지엄으로 운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인근 농민들에게 유기농 농산물을 재배하게 해 최가철물점이나 쇳대박물관 브랜드로 판매해 지역사회에 기여하고자 한다. 문화특구에 갤러리가 100여 개 들어서고 그러면 외국인도 많이 찾을 것이니 전망이 밝다. 군수도 적극 도와주고 있고 정병국 의원도 적극적이다.”
최 관장은 이 일대의 발전에도 희망을 걸고 있다.
“(대학로의)쇳대박물관이 10년이 됐다. 처음엔 변두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이 지역 랜드마크가 됐다. 그곳도 변두리지만 앞으로 지역의 중심이 될 것이다.”
철물점 점원으로 출발
그곳은 그가 성공하는 발판이 됐다.
“장사를 아주 잘했다. 최홍규는 몰라도 ‘순평금속 최 과장’하면 다 알 정도였다. 1988년에 자동차 한 대와 3000만원을 받고 스카우트 됐으니. 만들고 디자인하고…. 예술의 전당의 휴지통이나 공중전화도 내가 만들었다. 특허도 냈고 경쟁력도 있었다.”
그렇게 인정받기까지 진짜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 월급 5000원에 청소와 심부름하는 일이 맡겨졌지만 그는 손님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며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며 가게를 지켰다. 그러면서 틈틈이 디자인을 익혔다. 박물관을 찾아가 유물을 살폈고 때로는 고물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통금이 있었는데 일을 하느라 막차 타고 퇴근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막차마저 놓쳐 여관에서 자기도 했다. 그곳에서 15년간 배우고 독립했다. 여기저기 오라는 데는 많았지만 처음부터 제대로 끌어준 사장님이 너무 고마워서 옮기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장님이 작고하시고 옮겼다.”
그러나 그가 당시 프로야구 선수 부럽지 않은 몸값을 받고 옮긴 곳은 일할 환경이 아니었다. 너무나 고된 작업이 이어져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결국 스카우트비를 돌려주고 1989년에 독립했다. “마침 스카우트돼서 갔던 곳이 강남이었다. 그래서 을지로가 아닌 강남에 최가철물점을 열었다. 마침 논현동에 기린건축자재 백화점 등이 생길 때라 근처에서 시작했다.”
자신의 성을 내건 가게에서 그는 처음부터 못이나 농기구 등을 팔던 을지로 철물점과는 다르게 출발했다. 가게에 마루를 깔고 그간 수집한 골동품으로 가게를 장식했다. 처음 주요 제품은 문손잡이와 벤치, 간판 등 디자인을 살린 것들이었다. 못 하나라도 손님이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해주었다. 원통형이나 레버형 밖에 없던 문손잡이도 동물의 형상이나 상징물 등으로 표현해 특허까지 냈다. 거북이 모양 손잡이 머리를 남자의 그것처럼 만들어 여성 고객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소문이 나면서 인테리어 업체들이 최가철물점으로 몰렸고 2호점까지 냈는데도 손님들이 줄을 섰다. 최 관장 스스로 “한때 갈퀴로 돈을 긁는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장사가 잘됐다”고 말할 정도였다.
성공의 키워드를 물었다.
“글쎄 근검절약, 대강철저라고나 할까. 나는 사람은 세 부류가 있다고 한다. 백과사전형 사람, 찢어진 백과사전형 사람, 구겨진 백과사전형 사람. 그 가운데 나는 찢어진 백과사전형이다. 인생은 잘 하는 것 하나면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바둑이나 골프는 하지 않는다.”
쇠 다루는 일 하나만 잘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검소한 생활을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대강철저는 그의 일처리 방식이다. “나는 컬렉션을 통해 디자인을 배웠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거라서 그 정도면 되었다. 그렇지만 일단 하는 일엔 철저히 미쳐서 했다. 지금도 일을 할 때는 며칠씩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한다. 물론 하기 싫으면 아예 하지 않는다. 출근 하더라도 며칠씩 놀기도 한다. 그 기질이 오늘날 최가철물점과 쇳대박물관이 있게 했다.”
그는 장사꾼이란 말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 앞의 돈만 밝히는 장사치는 되지 말자고 했다.
“아들이 결혼하는 날 ‘아버지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 아들이 인정하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
돈도 쓸 수 있을 만큼 벌어 보람 있게 쓰니 다행이라고 했다.
“내 인생 점수가 60점은 되지 않겠나.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고 있는 게 큰 복이다. 살다 보면 필요악도 있을 수 있지만….”
철물로 돈을 번 그는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골동품 가게를 기웃거리던 데서 나아가 아예 수집가가 됐다. 처음 농기구와 삼국시대 토기에 기울던 그의 관심은 고가구를 거쳐 마침내 쇳대에 꽂혔다. 쇳대는 열쇠의 표준화된 방언이다.
“아이템을 쇳대로 정한 것은 용꼬리보다 뱀대가리가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른 것들은 관심 갖는 사람들이 많았고 내 경쟁력은 남들이 관심 두지 않는 쇳대에 있었다. 작지만 기능을 갖고 있고 또 경쟁력도 있는 쇳대를 택했다.”
그는 지금 내로라하는 쇳대 전문가가 됐다.
“쇳대가 남성이라면 자물쇠는 여성이다. 잉어 장식은 사찰용 빗장에 쓰이는데 조선 말기의 붕어자물쇠는 의미가 다르다. 동양은 자물쇠 문화고 서양은 열쇠 문화이고.”
이름은 쇳대를 내세웠지만 사실 눈에 띄는 물건은 거기에 따라오는 자물쇠다. 그가 모은 자물쇠는 4000점이 넘는다. 게다가 쇳대만 있는 것도 아니다.
“전 세계 농기구만 해도 수천점이 된다. 대장간 몇 개 차릴 만큼 대장간 용품도 모았다.”
그동안 모은 유물을 제대로 활용하려고 최 관장은 건축가 승효상을 찾아갔다. 승효상은 그에게 국내 사립박물관으로선 처음으로 박물관다운 건물을 설계해줬다. 외벽은 최가철물점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녹슨 듯한 코르텐 강판으로 마무리했다. 최 관장은 이 건물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다.
“유물은 창고에 있으면 고물이고 전시하면 보물이다. 그래서 10여 년 전 박물관을 지을 때 목적을 갖고 지었다. 사립박물관 가운데 최초로 유물에 맞춰 지은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이 이후 박물관 건물의 전환점이 됐다.”
박물관 안에는 법정스님이 써준 ‘쇳대’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박물관 이름도 이제는 유물이 된 것이다.
지금은 변신 중 지금 최가철물점과 쇳대박물관은 변신의 와중에 있다. 최 관장은 지난 2월 강남 최가철물점 가게를 접었다. 양평으로 갈 계획이나 아직 이전 준비가 덜돼 임시로 박물관과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다. 공방은 성수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처음 강남에 자리를 잡은 게 타이밍이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강남이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다품종 소량판매로 차별화했고 디자인을 강조한 제품으로 성공했지만 이제는 인터넷이 활성화돼 다품종 소량판매나 디자인도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소비자가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으로 다가갈 것이라고 했다. 논현동을 포기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란 게 그의 설명이다.
양평으로 이전하는 것과 관련해 최 관장은 “나이 50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같은 철물점을 하더라도 인생에 의미가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양평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과도기라서 최가철물점이나 쇳대박물관은 현재 최소 인원으로 유지하고 있다. 또 양평복합문화공간의 이름은 쇳대로 갈지 최가철물점으로 갈지 아니면 제3의 이름으로 할지 아직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일은 꾸준히 하고 있다. 최근엔 이포대교 옆 파고라와 가로등 벤치 등을 설치했고 광교 신도시 아파트의 조형물도 만들었다.
그에게 새 아이템의 영감을 어디에서 얻는지를 물었다.
“아이템의 영감은 공부해서 얻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감성을 타고 나야 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내 관심사다. 여자 장식품이나 핸드백, 구두 비주얼까지. 내가 하는 것은 파인아트는 아니다. 기능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 주변 생활용품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2호(2012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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