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으로 가는 길’ 전시회 연 재불 화가 방혜자…“빛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죠”

    입력 : 2012.06.01 17: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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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나왔다. 그것도 원삼이나 활옷의 호사스러운 색과 거리가 먼 것은 물론이고 옥빛이나 쪽빛도 아닌, 아침 안개에 덮인 호수처럼 잔잔한 색상이었다. 화려한 파리풍 드레스 차림을 연상했던 기자는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경기도 광주 영은미술관에서 7월 1일까지 열리는 ‘빛으로 가는 길’이란 전시회의 첫날 재불 화가 방혜자의 옷차림은 전통 있는 종갓집 종부를 연상케 했다. 개량 한복 차림새였건만 전통 한복 이상으로 품위가 있어 보였다. 프랑스와 독일 등 외국 작가들이 함께 참여한 행사의 안주인으로 손색이 없는 매무새였다.

    1961년 프랑스로 건너갔다고 하니 벌써 쉰 하고도 한 해를 더 그곳에서 머문 그였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그가 떠난 시절 그대로였다. 무엇이 그녀를 1960년대 초 단아한 대갓댁 종부처럼 머물게 했을까.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것
     N°17  NAISSANCE DE LUMIERE 빛의 탄생 55 x 91,7 cm 2012
    N°17 NAISSANCE DE LUMIERE 빛의 탄생 55 x 91,7 cm 2012
    사진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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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혜자 화가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한국적 아름다움의 연장’이라고 했다. “한국적인 게 세계적인 것이며, 가장 자기다운 게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게 그의 첫마디였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데 그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한’이 아닌 ‘밝음’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의 미에 대해 ‘한’이 깃든 아름다움으로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으나 그녀는 전혀 다른 생각을 보였다. “내 작품은 우리 민족의 밝고 명랑하고 기쁜 면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한국인의 특성이다.”

    옷에 대한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옷은 아름답다. 우리 한복은 우리 정서에 맞는 옷이다. 그래서 유럽에서도 아주 즐겨 입고 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자랑한다.”

    그런 생각은 그녀가 작품에서 추구하는 ‘빛’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빛이 동양의 것이냐 서양의 것이냐 그런 관계로 보지 않고 우리 인류의 생명의 원천이 빛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빛에서 왔다가 빛으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그에게 빛은 곧 생명 그 자체다.

    “나는 생명의 근원을 찾아 수행하는 마음으로 작업한다. 빛 한 점, 한 점을 찍는 게 생명을 찍는 것이다. 우리 하나하나가 빛으로 환원돼 밝음과 사랑을 추구한다면 세계평화는 자연스레 이뤄진다는 게 내 생각이다. 빛은 평화의 원천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 원천이기 때문이다.”

    50년 전 프랑스로 건너갈 때와 똑같이 지금도 그녀에게 그림은 수행이다. 다만 순간순간 늘 기쁨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했다.

    “마음의 미소를 배우면, 다시 말해 내면의 미소를 배우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림 창작은 삶이며 나의 모든 것이다.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은 속에 닿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

    그런 정신이 서양 사람들의 마음까지 울려 그녀가 세계적 화가로 우뚝 서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지나치게 철학적 경향을 띠고 있는 요즘 작가들의 경향에 대해 물었다. 그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항상 있었던 것이고, 반항적인 것 또한 중요하다.”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지 않느냐는 주장에 대해서도 방혜자 화가는 “미술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설명했다.

    이런 생각은 추상화에 대한 그의 논지에서도 잘 나타난다.

    “흔히 추상화는 어렵다고들 한다. 그것은 그림을 보는 이가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볼 줄 모르고 지식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마음은 모두 안다는 것을 떠나 완전히 자신을 잊게 되는 경지에서 창작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예술을 도(道)라고 생각한다.”

    방혜자 화가는 자연에서 나온 재료로 작품을 만들기로도 유명하다. “젊은이들이 재료에 소홀하다고는 하나 현실에 충실한 것 또한 중요하다. 나로서는 편한 재료이기에 자연에서 나온 재료로 작품을 만들고 있으나 새로운 미디어로 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녀가 흙이나 석채 등 천연염료를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편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원초적 생명을 추구하는 그녀이기에 자연 염료를 쓰고 있다지만 사실은 엄청난 실험을 거쳐 과학에 가까운 지식을 바탕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사물을 뚫고 들어가면 그 속에 금강석 같이 빛을 발하는 입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걸 그렸더니 스위스의 한 천체연구소에서 연락이 왔다. 과학자도 아닌데 자신들이 오랜 시간 연구를 통해 얻은 것과 거의 흡사한 모양의 빛의 입자를 그렸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그림에 나타난 빛을 어떤 이는 ‘독경 소리로 가득 찬 새벽의 법당처럼, 장미창의 오색 빛으로 물든 오후의 성당처럼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 준다.’(윤나지 이대 교수)고 했고, 또 어떤 이는 ‘해 뜨기 전의 아침을 느낀다.’(소설가 박경리)라고도 했다. 프랑스 사람들이 그녀의 그림을 ‘색채의 시학’으로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소녀 방혜자 방혜자 화가에게선 지금도 소녀와 같은 순수함이 넘친다.

    어려서 많은 고생을 해서일까. 그는 디스토마에 걸려 7년을 고생했고 진단을 제대로 못한 의사 때문에 개복수술까지 받았다. 그래서인지 눈물로 반을 보냈을 여고시절, 그는 시인을 꿈꿨다. 그런데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자하문 세검정으로 나가 풍경화를 그렸는데, 선생님께서 ‘너는 내가 15년간 연구한 것을 금방 터득했구나’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는 거라고 했다. 그 마음을 화두 삼아 그림 세계로 들어섰다.”

    서울대 미대로 진학한 그는 장욱진 밑에서 공부를 했다. 장욱진도 그를 칭찬으로 가르쳤다.

    그 시절 고암 이응노와도 친분을 맺었다.

    “대학 1학년 때 몸이 안 좋아 수덕사에 한동안 머물렀다. 그때 이응노 선생님이 충남지역 초등학교 선생님들에게 미술 강습을 하고 계셨다. 그때 좋은 말씀 많이 들었다. 2년 뒤 유럽으로 떠나시면서 ‘소를 끌고 가는 사람’을 그려주셨다. 소처럼 꾸준히 말없이 그림을 그리며 살라고.” 그런 인연 때문인지 그는 지금도 ‘어디에서나 항상 배울 게 많다’는 생각으로 “누구를 만나도 내 마음의 좋은 것을 항상 품고 간다”고 했다.

    한때 문학소녀여서인지 그녀는 그림 그리는 틈틈이 시를 쓴다. 또 시는 물론이고 철학이나 종교서적, 위인전에 이르기까지 책도 열심히 읽는다고 했다. 다만 신문이나 TV는 보지 않는다고. 그녀가 아직도 순수함을 간직한 이유일까.

    빛으로 가는 길(Vers la Lumiere)展
    홍순명 作
    홍순명 作
    광주 영은미술관이 2012 한국-유럽 국제작가교류전을 7월 1일까지 열고 있다. 한국과 유럽(프랑스, 독일, 벨기에)의 작가 8명이 ‘빛’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였다. 방혜자 화가는 이번 전시에 2012년 신작 ‘빛의 문으로’ 등 여러 작품들을 내놨다. 색과 빛, 기(氣)의 흐름이 우리 안에 향기처럼 스며들어 인간 사이의 벽을 부수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다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프랑스의 설치작가 이브 샤르네 빛 광선을 사용해 환상적 공간을 연출했고, 벨기에의 쟝 보고씨앙은 불로 태워서 표현한 캔버스 위에 무수히 많은 점들로 가득한 우주를 표현한 작품을 내놨다. 독일 작가 크리스티안 들라루는 한국에 3개월 정도 머물며 고궁의 단청 등 한국 고유의 색을 찾아내 표현한 작품을 내놨다. 한국에선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유학한 홍순명 작가와 미국에서 수학한 김순희 작가, 비행기 작품으로 유명한 김길웅 작가 등이 참여했다.(031)761-0137

    [정진건 기자 사진 정은정 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1호(2012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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