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 ②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

    입력 : 2012.03.23 11: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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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과학만능주의’ 신화 속에 살고 있다. 역사적으로 실증적이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진리’라고 믿고 있다. 인간이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이란 잠정적이며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의 한계를 표시한다는 점에서는 중요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진리’라고 믿었던 그 ‘진리’도 ‘거짓’이 되고 만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출간하기 전까지,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믿었고, 그것이 그때까지 인간들의 과학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정지해 있는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주장했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만원경을 만들어 과학적으로 지구의 자전을 실증하자, 그전까지 믿어왔던 ‘천동설’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진리란 가설일 뿐이다. 우리는 아직도 하늘에 별이 몇 개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성능이 더 좋은 망원경을 개발하면서 우주 안에 있는 셀 수 없는 별들의 지극히 일부를 관찰할 따름이다. 우리는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관찰할 따름이다. 오늘날 지구상에 서식하고 있는 모든 동식물은 생식 작용을 통하여 태어난다. 그러나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지구에 생물이 태어났는지는 그 어떤 과학자도 정확히 설명해 줄 수 없다. 찰스 다윈(1809~1882)이 주장한 ‘진화론’의 적자생존과 그리고 종의 분화를 통하여 새로운 종이 탄생하고 다채로운 생태계를 이루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이기적이다. 다윈은 인간의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본성을 밝혀냈다. 리처드 도킨스가 주장하는 인간의 ‘이기적 유전자’는 생명의 기원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과학적 설명인 것처럼 보인다. 과학이 진리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믿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우리의 유전자가 불가피하게 이기적이며 우리는 경쟁자에 대항하여 무슨 수를 써서든 우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주장해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타주의’는 환상이며,인간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스러운 일루전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비유전적 문화요소(meme)’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문화적 아이디어, 상징, 혹은 실천들의 단위일 뿐이다. 이것은 ‘자연 선택’의 운 좋은 실수로,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유용한 생존 메커니즘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협동하는 법을 배운 무리들은 자원에 대한 절박한 경쟁에서 빠른 우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들은 소위 ‘이타주의’라고 하는 것이 껍데기에 불과하고 이 또한 궁극적으로는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이타주의자’는 스스로 그리고 가장 가까운 동족들에게 보답을 기대한다”라고 하버드 생물학자 E O 윌슨은 냉소적으로 주장한다.

    인간이 본능적으로는 무자비하게 ‘이기적’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이것은 대략 50억년전 원시 시대부터 고투했던 파충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파충류에겐 생존이 가장 중요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방식은 ‘먹고’ ‘싸우고’ ‘도망치고’ 그리고 ‘번식’이었다. 파충류들은 먹을 것을 차지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경쟁하고, 어떤 위협도 불사하고,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싸움과 도망을 반복하고, 번식을 위해 무슨 행동도 감행한다. 우리 파충류 선조들에게 이어받은 DNA가 바로 ‘이기적 유전자’이다. 우리는 지위, 권력, 명예, 섹스, 생존에 관심이 있으며, 대다수 인간들은 이것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러나 수천년에 걸쳐, 인간은 또한 ‘새로운 뇌’를 발전시켰다. 즉 신피질을 진화시켜왔다. 이것은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 숙고하고 이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격정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지는 추론 능력의 발상지이다. 1878년에 프랑스 해부학자인 폴 브로카(Paul Broca)는 모든 포유류가 파충류의 뇌에는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뇌를 진화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뇌 부분을 ‘르 그랑 로브 림빅’ (le grand lobe limbique)이라고 불렀다. 온혈 포유류의 도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생존을 보장하는 뇌의 진화로 이어졌다. 온혈 포유류의 뇌는 더 커졌다. 뇌가 커지면서, 어미의 산도(産道)를 통과할 수 있도록 새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성숙한 상태에서 태어나야만 했다. 새끼들은 무기력했고, 어미와 그 집단을 새끼의 생존을 위해 보살펴야 했다. 이것은 특히 호모 사피엔스에게 적용되었다. 그들이 점점 커다란 뇌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온혈 포유류는 태어나자마자 걷고 자신 스스로 어미에게 수유를 한다. 인간은 상황이 달랐다. 그 어미가 털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아기는 어미에게 매달릴 수 없었다. 어미는 자신의 욕망과 배고픔을 억제하고 아이가 자랄 때까지 수년 동안 아이를 돌봐야했다. 부모의 ‘전적으로 이타적인’ 돌봄은 아이의 생존에 필수적이었으며, 아이는 어미의 행동을 통해 ‘이타적인 노력과 헌신’이 인간생존의 기초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배운다. 셈족 언어에서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마음과 행동’, 즉 ‘컴패션’을 ‘라흐민’(rahmin)이라고 한다. ‘라흐민’은 어원적으로 ‘어머니의 자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레헴’(rehem)에서 유래했다. 어머니와 아이의 원초적인 관계,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의 원형은 바로 ‘라흐민’이다. 이 단어는 아랍어에서도 ‘라흐만’(rahman)으로 등장한다. 특히 이슬람 경전인 꾸란은 모든 장이 “라흐만의 알라의 이름으로“으로 시작한다. 이슬람에선 ‘알라’신의 속성을 바로 ‘컴패션’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의 이기적 유전자를 억제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무조건적으로 이타적 인간성인 모성애를 배양시켰다. 아이에 대한 헌신적으로 사심없는 행위는 하루 종일 요구된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집중하여 자신이 없어진다. 아이에 대한 염려가 그녀의 삶의 중심이 된다. 그녀가 싫건 좋건 아이가 밤에 울면 일어나 젖을 먹여야하고 아이가 아프면 자신의 피곤함과 분노를 절제하고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배운다.

    사실 어머니의 사랑은 아이가 성년이 되어서도 계속되며 그 사랑은 자신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치게 된다. 인간의 ‘이타적 유전자’는 자기 자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소방관들은 그들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불타는 집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들어간다. 하루 종일 시청에서 쓰레기 수집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주말에는 양로원에 가서 노인들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 이태석 신부는 1987년 의대를 졸업하고 신학대에 들어가 신부가 됐다. 그는 스스로 내전 중이던 남수단의 톤즈로 들어가 간이 병실을 갖춘 병원을 지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당대 최고의 신학자, 오르간 연주자, 철학자였지만, 아프리카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31세에 모교 의학부의 청강생이 되어 의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가봉)에서 일생을 마쳤다.

    위대한 종교와 사상을 전한 성인들은 바로 인간이 가진 ‘이기적 유전자’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 잠재되어있는 ‘이타적 유전자’를 설득력있게 선포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기적 유전자’에 의존해 산다면,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 배철현 교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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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오리엔트언어들에 매료되어 하버드대 고대근동학과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언어문명 주임교수이다. 또한 베이징대 고대근동학과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격주로 베이징에 가서 가르치고 있다. 주요관심사는 고대오리엔트문명인 후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간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일이다. 주요저서로는 <타르굼옹켈로스 창세기><타르굼아람어문법><창세기, 샤갈이 그림으로 그리다> <Comparative Studies of King Darius’s Bisitun Inscription>등이 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8호(2012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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