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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기자의 브라보 클래식] ③ 가혹한 운명과 싸워 이긴 환희의 송가…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입력 : 2011.12.29 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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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과 화해하고 새해 설계하자
그래서 죽을 결심을 했다. 시골로 잠깐 요양을 갔을 때 두 동생에게 유서까지 썼지만 자살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가슴 속에 남아있는 창작 욕구를 다 채우기 전에는 죽을 수 없었다.
듣지 못하는 대신 진동과 울림을 감지해 작곡했다. 더 강해지기로 마음먹은 후 운명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쓴 작품이 교향곡 5번 '운명'이다. 베토벤의 분신과 다름없는 곡으로 결연한 의지와 용기, 희망을 강한 선율에 새겼다.
의사소통이 어려울 만큼 귀가 멀어진 후에 만든 작품이 바로 교향곡 9번 '합창'(1824년)이다. 유독 자신에게 혹독했던 운명을 인정하고 음악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제1악장과 2악장에서는 강렬한 분투가 일어나고, 제3악장에는 격정이 가라앉은 후 안정감을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인생의 참된 모습을 찾은 기쁨이 넘쳐난다. 교향곡에 성악을 결합한 '환희의 송가'는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음향의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육체적 고통과 가난을 극복하고 빚어낸 선율이기에 더욱 존엄하다.
인간의 힘으로 쓸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 위대한 곡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정작 작곡가는 이 선율을 듣지 못했다.1824년 5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베토벤이 지휘봉을 잡고 초연했지만 당시 그는 곡이 끝난 줄도 몰랐고, 쏟아지는 박수도 듣지 못했다.
베토벤을 모델로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쓴 로맹 롤랑은 “만약 하느님이 인류에게 범한 죄가 있다면 그것은 베토벤의 귀를 빼앗아 간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 해방을 꿈꾼 음악의 혁명가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합창단은 12월 30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한다. 사진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은 18세기 말 격변하는 유럽의 시대정신과 깊숙이 맞물려 있다. 프랑스 혁명이 유럽 전역을 뒤덮었을 때 그는 피 끓는 22세였다. 왕과 귀족의 지배를 끝내고 시민계급이 주도하는 시대를 환영했던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위해 교향곡 3번 '영웅'(1806년)을 썼다.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를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 교향곡은 역사상 유례없이 뜨거운 피가 흐르는 혁명적인 곡이었다. 군중을 이끌고 혁명을 주도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이 웅장한 선율 속에 새열렬한 신봉주의자의 믿음을 저버렸다. 몹시 화가 난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라는 이름을 쓴 겉장을 뜯어내며 가까스로 분노를 삭였다. 그리고는 제목을 ‘영웅 교향곡, 위대한 인물에 대한 추억을 기리며’라고 썼다.
사연이 어찌됐건 '영웅'은 교향곡의 혁명으로 평가될 정도로 기존의 작품과는 다른 뚜렷한 개성을 갖고 있다. 점잖고 우아한 하이든과 모차르트 스타일에서 벗어나 운명처럼 강하고 역동적인 음악이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Allegro con brio, 생기 있는 빠르기로)는 대담하고 우렁차며 강렬하다. 마치 말발굽 소리처럼 격정적이고 박진감이 넘친다.
2악장 아다지오 아사히(Adagio assai,대단히 느리게)는 고뇌하는 영웅의 모습을 그렸다. 마치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옳을까”라고 끊임없이 되묻는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베토벤은 이를 장송행진곡이라고 했다. 훗날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나는 이미 나폴레옹의 최후를 예상하고 이 곡을 써뒀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선율에서 후회와 회환이 느껴지며 심혼을 흔드는 북소리가 인상적이다.
3악장 알레그로 비바체(Allegro vivace,빠르고 생기 있게)에서는 다시 템포가 강해진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가 개선문을 통해 도심으로 행진하고 시민들이 그들을 향해 알록달록한 꽃을 뿌리는 장관이 연상된다.
4악장 알레그로 몰토(Allegro molto,매우 빠른 속도로)는 다시 자유과 기쁨에 들뜬다. 목표를 눈앞에 둔 아슬아슬한 심정과 결국 이뤄내고 만 환희가 정점을 이룬다.
혁명을 사랑했던 베토벤은 예술가의 위상을 높인 최초의 음악가이기도 하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등 이전 음악가들은 일종의 하인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베토벤은 어느 귀족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당당하게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그는 시대정신을 이끌어가는 예술가야말로 귀족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유럽 정복을 위해 나폴레옹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베토벤은 빈의 리히노프스키 공작 저택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곳을 찾은 프랑스 장교가 베토벤을 알아보고 공작에게 연주를 부탁했다. 무력으로 침입한 프랑스군에 대한 적대감이 넘치는데다 예술가로서 자존심이 상했던 베토벤은 그 요청을 일거에 거절한다. 그리고 며칠 후 공작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 같은 귀족은 수백 명이 넘지만 예술가 베토벤은 단 한 사람뿐이요”라고.
음악 천재 모차르트를 우상으로 섬겨푸르트벵글러 베토벤 [합창] 음반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합창] 음반
이 때부터 더욱 모차르트를 선망하게 된 베토벤은 16세에 드디어 모차르트를 찾아간다. 하지만 당시 30세의 모차르트는 소년을 보고 시큰둥했다. 모차르트는 “이번에는 아주 사납게 생긴 꼬마가 왔네. 어디 한 번 피아노를 쳐 봐”라고 데면데면 말했다. 자신이 음악 영재인지 아닌지 묻는 어린 연주자들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연주를 일일이 들어주는 것은 진짜 천재 음악가인 모차르트에게는 하나의 ‘고문’이었다.
어쨌든 그에게 한 수 배우러 오스트리아 빈까지 찾아온 베토벤은 두려운 마음으로 연주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모차르트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러자 베토벤은 용기를 내 “선생님, 주제 선율을 하나 주시면 즉흥 연주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자신만만한 베토벤의 태도에 놀란 모차르트는 연주 실력에 더 놀랐다. 능수능란하게 선율을 다루며 주변 공간을 삼킬 듯 흡입력이 강한 베토벤의 연주에 반한 모차르트는 “너에게는 뭔가 있어. 장차 세상을 놀라게 할 거야”고 극찬했다. 그 칭찬에 흥분한 베토벤은 빈의 자취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을 정도로 감격했다.
비록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인연은 걸작 탄생의 동기가 됐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영감을 얻은 베토벤이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 '연인이거나 아내이거나'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66, '사랑을 느끼는 남자들은' 주제에 의한 변주곡 'WoO.46'을 작곡했다. 장난스럽고 유쾌한 모차르트 선율이 묵직한 베토벤의 힘을 얻어 더욱 완벽한 선율로 상승했다. 두 천재가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정반합의 조화로운 선율을 빚어낸 것이다.
'연인이거나 아내이거나'는 '마술피리' 제2막에서 파파게노가 노래하는 유명한 아리아. 외로운 새잡이 파파게노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안달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베토벤의 변주곡에서는 피아노가 먼저 주제를 제시하면 천변만화하는 변주들이 흘러나온다.
'사랑을 느끼는 남자들은'은 제1막에서 파미나와 파파게노가 노래하는 이중창. 베토벤의 변주곡에선 첼로와 피아노가 긴밀한 대화를 나누며 이중창의 매력을 고스란히 되살렸다.
'합창'을 들으며 한 해를 정리하는 음악회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은 이념 대립과 마음의 벽을 허물자는 의미에서도 종종 연주된다. 지난 8월 임진각에서 세계적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남북한 화합을 기원하는 뜻으로 이 곡을 연주해 눈길을 끌었다. 사진 크레디아 제공
음악회를 제대로 즐기려면 예습이 필요하다.
'합창' 명반을 들으면서 곡을 공부하면 공연장에서 더 작품이 와닿는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반(그라모폰 발매)이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합창' 앨범이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1886~1954)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지휘한 음반(EMI발매)도 명반으로 꼽힌다.
[전지현 /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code@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5호(2011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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