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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의 블루칩 작가 탐방기 ]선과 빛 사이의 그 마술 같은 세계…작가 `황선태`
입력 : 2011.12.29 14:5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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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드는 공간-교회3,142x102x8,2010
영화 '매트릭스'나 '인셉션'이 대히트하는 이유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 때가 있다. 다소 철학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매우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질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때 열심히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보고 듣고 믿는 이 세상이 만약 진짜가 아니라면, 회사를 가고 돈을 벌고 밥을 먹고 사랑을 할 의욕이 들겠는가.
지난 9월 말 한국국제아트페어에서 우연히 황선태 작가의 작품을 만났다. 그의 작품은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었다. 많은 관객들이 그의 작품 앞에만 서서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수백 점의 작품이 걸려 있는 행사장은 극도로 소란했지만 황선태의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고요했다. 남들의 시선과 소음, 피곤한 파티장에서 벗어나 구석진 방문을 열고 내밀한 방안으로 들어가 잠시의 적요를 음미하는 모습이었다.
숨 좀 쉬자. 싶을 때 시끄럽고 복잡한 공간에서부터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으로의 순간 이동. 그것은 타는 듯한 답답한 갈증 상태에서 들이키는 맑고 시원한 물 한잔의 느낌이랄까. 많은 관람객들이 이상하게도 황 작가의 작품 앞으로 몇 번이나 이끌려왔다고 고백한 이유다.
모호하고 아련하게 거기 있는 풍경바람 부는 부두,100x75cm,2009
그는 느릿느릿 벽으로 걸어가더니 작품에 달린 스위치를 켰다. 아, 그 순간. 순식간에 추상적이던 개념이 생생하게 공기 냄새가 나고 소리가 나는 실재로 변했다. 드라마가 갑자기 솟아오르고 건조함이 촉촉함으로 바뀌었다. 딸깍 하고 스위치가 켜지는 그 잠깐의 순간에.
스위치를 켜는 순간 그림 배경에는 은은한 빛이 배어든다. 감흥 없던 선들로 이루어진 평면 그림을 순식간에 생명력이 충만한 공간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눈앞에서 마법사의 마술을 보는 것 같은 체험이었다. 자세히 보니 배경의 빛은 작품마다 모두 색이 각기 달랐다. 어떤 작품은 이른 아침의 빛 같았고 어떤 작품은 정오의 강렬한 태양빛처럼 느껴진다. 정교한 빛의 질감은 진짜처럼 빛나고, 무색무취였던 유리 표면의 무채색은 방 안의 냄새와 공기를 머금고 있는 그림자가 됐다. 딱딱하고 수학적인 선들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오후의 햇살이 가득한 공간으로 완성됐다.
사실 물체의 윤곽선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편의상 구별하기 위한 가상의 선일 뿐이다. 인간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빛은 실제로 존재한다. 따뜻하고 우리가 색채를 분별할 수 있게 하는 에너지를 가진 진짜다. 작가는 바로 그 두 가지 요소를 하나의 작품 안에 함께 녹여 보여준다. 그는 우리가 진짜라고 알고 있던 세계를 다시 의심하게 만들고 어깨를 흔들어 다시 각성하게 만든다. 알 수 없는 전율이 작품으로부터 내게 흘러들어왔다. 스위치를 켠 순간부터 한참 동안 작품을 어쩐지 계속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작업실2,142x102x8cm,2011
눈부신 듯 눈을 흐리게 떠보자.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 수많은 집들의 지붕을 내려다보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그는 세상을 그렇게 한 걸음 떨어져서 사물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외로운 마음이 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은 이렇게 쓸쓸하고도 아름답구나.
지금 이 순간, 존재한다는 것얼어붙은이야기,39x26x20cm,2008
덕분에 관람객들은 작가 황선태를 특정 작품이나 이미지로 일관되게 기억하지는 못할 수 있다. 누구는 그의 작품을 ‘유리책’으로 기억하고, 누구는 ‘공간이 있는 사진’이나 ‘빛이 있는 공간’으로 각자 다르게 기억하곤 한다. 작가의 이름을 인지시키는 마케팅에는 효과적이지 못한 셈. 하지만 그 결과물들은 어김없이 보는 이들의 흥미와 영감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혹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의 작품은 뇌리에서 잊지 못했다. 결국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각기 다른 표현 방법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을 가지며, 그의 작품이 걸리는 전시는 히트한다. 그의 재능을 알아보는 갤러리들이 그에게 끊임없는 러브콜을 던지는 이유이다.
칸트는 ‘예술’이 현실에 대해 재인식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황 작가의 작품은 정말 현실을 다시 인식하게끔 만든다. 존재감이란 것은 나를 살아있게 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꿈처럼 허무해질 테니.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조심스럽고도 강력하게 묻는다. 지금 당신이 보는 것은 진짜이며, 당신은 실존하고 있는지.
물론 대답은 우리의 몫이다. 하지만 정답을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내가 사는 세상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질문에 대한 답하려고 생각하는 순간의 우리는 어떤가. 평소에 그냥 흘려 보내버리고 마는 소소한 일상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껴보려는 순간, 우리는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다.
■ 작가 황선태는 누구?
[박보미 / 아트 칼럼니스트·봄봄 대표 bomi1020@empal.com]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5호(2011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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