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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의 블루칩 작가 탐방기] 천천히 꿈을 그리는 북가좌동 보헤미안 작가 `조덕환`
입력 : 2011.11.04 16: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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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tz nahin 2 91X117cm, oil on canvas, 2008
시간이 느리게 가는 ‘르 쁘띠 샤’
1000원에 팔고 있다는 커피를 내미는데, 솔직히 맛이 썩 좋다고 말할 순 없었다. 오 마이 갓. 일단 입에 머금은 커피를 꿀꺽 삼키고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카페에 손님은 하루에 한두 명은 온다고 한다. 하지만 그나마도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니 아무도 오지 않는 날도 있는 듯. 고객은 주로 동네 아주머니들이라고 했다. “아직 오픈한지 1주일밖에 안됐어요”라고 덧붙인다.
“그림은 계속 팔리는 편이예요. 제 그림이 그렇게 비싼 편이 아니라서요. 만약 꾸준히 좋아해주는 분들이 없었다면 여태까지 그림만 그리는 일도 좀 지쳤을 거예요. 다행이죠.”
그는 그림을 오래 그리면서 돈도 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작업실 겸 카페를 생각해냈다. 이 공간에서 그림도 가르치고, 커피도 팔고, 작업도 하면 좋겠다 싶었다고 한다. 월세도 아주 저렴하니 마음에 들었다. 매분 매초를 쫓기듯 사는 강남을 떠나 스스로 운영하는 하루를 만들어가기에는 한가로운 동네가 적절했다. 사실 자신만의 작업실 겸 카페를 꿈꿔보지 않은 작가가 있을까? 그는 자본금이 최소 몇 억은 있어야 카페를 차린다는 상식을 과감하게 무시했다. 또 부족한 부분은 적당히 너그러운 웃음으로 넘긴다 치면 못할 것도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한량 작가의 시간이 전염된 것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오후가 느리고 여유롭게 흐르는 것 같다. 맞다. 어릴 때는 시간이 참 천천히 흘렀다. 바람이 불고, 햇볕이 내리쬐는 순간을 볼 수 있었는데.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기 직전까지의 시간은 개미가 천천히 기어가는 것만큼이나 길었다. 노을은 천천히 하늘을 물들였고 땅바닥의 돌멩이들은 모두 그 영겁의 세월만큼 수많은 이야기의 무늬를 간직하고 있었더랬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 영원한 시간들은 어디로 갔을까? 조 작가의 그림은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아직 세상의 굳은 벽에 상처받지 않았던 말랑말랑하고 촉촉했던 시절.
무엇이든 가능한 요술모자, 그의 유토피아소년과 돌고래 117X91cm, oil on canvas, 2008
그래서일까. 그림 속의 소녀들은 요술모자를 쓰고 있다. 모자에는 수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고양이, 백조, 호수, 바다 등. 그 모자를 빌려 쓰고 싶은 기분이다. 요술모자를 쓰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곳이든 갈 수 있다고 하니까.
그의 작품에서 고개를 돌린 소녀들의 시선은 어디에 닿아 있을까. 아마 우리가 닿기 어려운 순수한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소꿉장난처럼 꾸며 놓은 그의 카페처럼. 말없이 나를 말해주는 것 같은 그림들이 이 시간과 이 공간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이 촉촉해지는 것 같다.
그림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짙은 노란색과 파란색의 감정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그는 과감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이처럼 감흥의 순간을 포착했지만, 사실 그가 보는 색과 우리가 보는 색은 다르다. 조덕환 작가는 선천적으로 약시다. 그래서 작가가 느끼는 빨간색과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빨간색은 다른 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림 속 아이들의 감정을 상상할 수 있다. 정확한 소통은 아닐지라도 진실한 소통은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생각이 이제 다 커버린 어른들을 위로한다.
작품을 통해 조 작가는 ‘그래서 언제 도착하겠어?’, ‘그래서 언제 성공하겠어!’라고 외치는 세상의 끈질긴 재촉을 한편으로 슬쩍 흘려보낸다. 하지만 정답이 없는 인생길 앞에서 그는 누구 못지않게 진지하다. 그리고 작은 간판과, 커피 머신, 제라늄을 하나씩 이 공간에 채워 넣었다. 그는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그렇게 천천히 가꾸어 나가고 있었다.
어수룩하지만 햇살이 부서지는 그 순간만큼은 산토리니 부럽지 않게 빛나는 ‘르 쁘띠 샤’ 카페도 그의 작품과 꼭 닮았다. 일제히 뽑아낸 듯한 프랜차이즈 카페가 싫증났다면, 삐뚤빼뚤 조금은 촌스럽고 알록달록 정겨운 그의 작업실로 놀러 가보자. 틀림없이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그가 커피를 내오며 반겨줄 테니까.
세련된 강남보다 사람 냄새 나고 소박한 동네 북가좌동이 좋다는 조 작가. ‘르 쁘띠 샤’가 그의 바람처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이 돼 북적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때쯤엔 카페 주인장 조 작가의 바리스타 기술도 나아져 있기를 기대하며.
■ 조덕환 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3호(2011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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