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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의 블루칩 작가 탐방기] 뜨겁게 더 자유롭게…작가 박정란
입력 : 2011.07.01 10: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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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섬 (island) 162X130cm,acylic on canvas,2009
거실 한편이 작업실이다. 그림들과 물감들이 쌓여있고 한쪽 벽면엔 공부 중인 미학 서적들이 가득했다. 다른 쪽은 주방이다. 주부모드와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학생모드, 강사모드, 화가모드로 금방 변환할 수 있게 구성된 공간이다.
대학교 1학년인 큰딸은 바쁜 엄마를 위해 점심으로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내민다. 저렇게 큰 딸이 있구나. 작가의 일상이 그간 얼마나 바쁘게 돌아쳐 왔을지 잠시 짐작해 본다. 직업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일들이 불시에 여기저기서 터지는 게 삶일 텐데. 매년 개인전을 여는 화가이자 두 아이의 엄마, 남편에겐 아내, 학생들에겐 선생님이다. 1인 4역. 모든 일들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붉은여우 (red fox) 162X130cm,oil on canvas,2010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슈퍼우먼의 인간적 면모를 엿본 것 같아 작가가 슬그머니 친근하게 보인다. 그녀는 컴퓨터로 은행 업무를 몇 가지 보고 현재 상황을 대략 설명해 준다. 어쩌면 인터뷰 날짜를 잘못 잡은 게 아닐까. 조금 미안해졌다. 그녀는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으니 괜찮아요. 일종의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는데 그게 오늘일 뿐이에요”라고 말했다.
자, 그럼 우리 이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하려는데 그게 참 어색하다. 작가의 얼굴이 심란해 보여서다. 이런 게 삶과 예술의 간극인 걸까.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림 이야기 대신 그녀의 사업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녀는 금세 얼굴이 밝아져서는 열정적으로 웃으며 말한다. “제가 남편과 2년 전부터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했어요. 아티스트가 사업이라니 조금 안 어울리죠?”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 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거기엔 ‘대표이사 박정란’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얗고 평범한 명함. 신이 나서 그녀는 그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예술가의 안목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지 이야기했다.
seed 117X91cm,oil on canvas,2010
하지만 사업을 돕기 시작하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참여하면서 인테리어의 부가가치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다.
게다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사실도 깨달았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예술의 가치를 알게 됐어요. 예전엔 예술이란 게 사람에게 어떤 효용이 있을까, 어떤 가치가 있을까 고민했죠.
하지만 사업이라는 다른 영역에서 미술을 바라보니 오히려 확신이 생겨요. 힘들지만 예술은 분명히 빛나는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요.”
“더 자유롭고 싶어요.”에로스의 눈물 (tears of eros) 117X91cm,oil on canvas,2010
여기까진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가 특별하다. 삶의 수많은 일들 때문에 움츠려들거나 피해의식을 가지는 대신 그녀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모든 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발적 열정으로 주어진 책임을 맞이했다. 그것은 어렵고 특별한 재능이다. 그래서 어깨를 짓누르는 많은 업무량이 많을수록, 정신없이 벌어지는 관계의 어떤 돌부리에 넘어질수록 힘이 났다. 그것은 마치 싸우면 싸울수록 더 강해지는 전사의 능력처럼 보인다.
쨍하고 깨어질 듯한 날카로움과 포근함, 소름끼치는 아름다움, 위험함 속의 안락함, 공포 속 친숙함. 이런 이중적인 속성들은 오늘도 우리 삶에 가득하다. 그것들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삶에 밀착된 하나의 원형이다. 우리는 당황하며 매혹되고 상처받지만 결국 이 모든 것들과 떨어질 수 없어서 더불어 산다. 그것이 도대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생명인지 죽음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 모든 것을 암시하는 작가의 그림처럼. 어쩌면 그녀는 스스로의 모든 상처와 기쁨, 아픔을 그녀의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조만간 비즈니스 사무실 한편에 작업실도 옮길 생각이다. 일하다가 돌아서서 그림도 그릴 수 있게. 이제 사업가 모드와 예술가 모드가 합쳐지는 셈이다. 그녀에게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업과 작품 두 쪽 다 시너지가 될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그 방식은 지극히 작가 박정란다웠다. “더 자유롭고 싶어요.” 작업실 겸 거실 창밖으로 내리는 비에 시선을 돌리며 토해내듯 그녀가 말했다. 내 주변의 여성 작가들에게 이런 속내의 말을 자주 듣곤 한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자유는 일 년짜리 세계일주 여행이라든지, 주부나 아내로서의 의무의 해방 같은 것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똑같은 말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뜻은 달랐다. 그녀는 이미 자유로웠다.
그녀는 해야 하는 일들에 마음이 짓눌리는 일이 없었다. 그게 그녀의 자유였다. 그것은 더 많은 것들을 해내고 싶다는 말이었다. 살아있는 동안 남김없이 열정을 불사르기를 원하는 소원의 말이었다. 그 열정에 내 심장까지 순간 두근거릴 정도로. 그녀의 얼굴 위로 아까 본 자유로운 바람이 또 한 번 스쳤다.
■ 작가 박정란은 누구?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호(2011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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