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llery] 한 가닥 붓털로 우주를 그리다… 작가 오정일

    입력 : 2011.06.23 14:17:37

  • 사진설명
    그는 대학교 선배였다. 내가 미대에 갓 입학한 신입생일 때 그는 졸업을 앞둔 4학년이었다. “오정일 선배 그 작업, 봤어? 머리카락 말야.”

    안 그런 척 하면서도 다들 미묘한 자신감과 도도함이 있을 때라 학교 안에서 동기들끼리 서로 괜히 남의 그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예외적으로 학과를 들썩이게 하는 소문을 듣고 슬쩍 들러본 그의 작업실. 이젤 위에 놓여 있던 큰 캔버스에 그려진 여자의 뒤통수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것은 강렬했다. 미대 전체에 소문이 퍼질 만하군.

    Braid2004 53 cmx33cm, acrylic on canvas, 2004
    Braid2004 53 cmx33cm, acrylic on canvas, 2004
    캔버스 속 어둠속에서 여자의 머리칼이 빛나고 있었다. 사람의 뒷모습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차마 혹은 미처 모두 말할 수 없는 삶의 결들을. 남몰래 차곡차곡 쌓인 뉘앙스 같은 것들을. 깊은 어둠속에서 수많은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생생하고 숨막히는 아름다움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정밀한 묘사 모두를 붓털 하나로 그린다는 점을 알고 나서였다. 그는 멀쩡한 1호짜리 붓털들을 대부분 칼로 잘라낸 후 한 올만 남기고 나머지 몇 가닥은 테이프로 감아둔다. 그리다가 닳으면 테이프를 떼어 한 올을 다시 세워 그리기를 반복한다. 속물적인 내 질문.

    “왜 굳이 붓털 하나로 그리시는 거예요? 엄청나게 오래 걸리잖아요. 게다가 말하기 전에는 누가 알아봐주기도 어렵고요.”

    그는 붓털 한 올이 회화적인 자신이라고 생각한단다. “현대회화에서 새로운 기법들이 많이 시도되고 있지만 저는 이 전통적인 그리기 방법으로 이야기할 것이 더 남아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어요. 결과보다는 과정이, 경제적 효율보다 나에게 맞는 방법인지가 더 중요해요.”

    유동적·추상적이면서도 보이는 확실한 형태
    작품을 그리는 데 사용되는 붓
    작품을 그리는 데 사용되는 붓
    그가 붓으로 수십만 올의 머리카락들을 그리는 것은 매일의 일상에서 인간 오정일이 살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자신이 털 한 오라기가 되어 화면과 만나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일이다. 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몰두해도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리기도 하니까. 오래 전 인연을 맺은 아트링크의 사장인 Tal Han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작가 오정일은 10년간 단지 여남은 개의 그림을 완성했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깊이를 얻었다.’

    그는 헤어스타일(?) 안에서 구조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머리카락 한 가닥씩이 모여 전체의 스타일과 느낌을 이루는 것. 전체와 부분이 서로 주고받는 리듬의 변주가 아름다웠다. 그것을 회화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은 그에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 크게는 사회 구성원과 국가의 관계로도 읽혔다.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무조건 많이 그리자, 밀도를 쌓자 하면 결과적으로 아름답게 안돼요. 결 자체, 하나하나의 머리카락이 아름다워야 해요. 원자를 소중히 하는 마음으로 그려야 진짜가 돼요. 그러면서도 전체를 잊지 않아야 하죠.”

    사실 작품만 보고 사람을 대면하기 전까지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꼼꼼하고 빈틈없는 하이퍼리얼리즘적 그림만 평생 그리다니 틀림없이 편집증적이거나 날카로운 성격일 거야. 그러나 막상 오정일 작가를 직접 만나보니 의외의 느낌이다. 그의 말투와 표정은 무척 푸근했고 태도가 무척 여유로우며 소박했다. 대화를 하면서 상대를 점점 무장해제시키는 편안함. 그것은 꾸며진 사회적 매너라기보다는 상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여유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짓궂은 마음에 시비를 걸어본다.

    “이렇게 살다보면 조바심이 생기진 않나요? 돈도 벌어야죠, 빨리빨리 성공하고 싶진 않아요?”

    “저라고 왜 조바심이 없겠어요(웃음). 이러고 있다고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게 없는 거잖아요. 하지만 정신 차리고 가도 조바심은 생기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것도 사랑해줘야 해요. 내가 왜 불안할까. 고민하는 나를 살펴봐주면 정확히 왜 번뇌를 하는지, 스스로의 생각의 오류도 발견해낼 수 있더라고요. 그걸 찾는 과정에서 결국 평화롭고 안정적인 상태가 돼요. 번뇌 자체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요. 하지만 그게 재밌는 거잖아요, 삶이. 끔찍하지만 재밌는 거죠.”

    그런 그가 요즘 중요한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 그는 13년간 그려온 머리카락에서 벗어날 때임을 암시한다.

    “모색해가는 과정이지만 ‘나’라는 핵심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제가 머리카락에서 매력을 느꼈던 이유도 구름이나 연기처럼 유동적이고 추상적이면서도 확실한 형태가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죠. 들여다보고 들여다봐도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하게 발견되는 대상이 제 마음을 끕니다.”

    “지금 그리고 있는 새로운 대상이 무엇인지는 비밀이에요. 올해 11월 발표할 겁니다. 그때까지 개인전을 기다려줄래요? 힌트는 아마 여전히 유기적이고 구조적인 형태라는 것이죠. 그리고 동료들이 다들 한숨 쉬는 방향(웃음), 즉 붓털 한 올로 그리기는 변함없을 거예요.”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나는 말했다. 저는 이 그림이 특히 좋아요. 그가 웃으며 말한다. 그 그림, 예전 여자친구가 모델이었어요. 사랑을 담아 그린 거죠. 역시 그랬구나. 이 작품은 그의 세레나데였구나.

    자신의 뒷머리 모양이란, 스스로는 보고 싶어도 잘 볼 수 없는 곳이다. 내가 모르는 뒤통수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헤아려 묘사하며 캔버스를 채워나가는 남자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그 숨 막히는, 농도 짙은 시선을 받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여자에게는 존재의 세포 하나하나 낱낱이 사랑받고자 하는 깊은 욕망이 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판타지일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사람도, 그렇게 사랑받는다고 믿는 사람도 어쩌면 스스로의 도취 안에 빠져 있는 것일지 모른다. 다만 우리의 최선은 너와 내가 만나는 관계의 순간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봐주고 마음으로 안아주는 것이 다일런지 모른다. 작가가 한 치의 오차 없이 리얼하게 머리카락을 그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안을 자신만의 추상적 생각과 경험과 구조로 채워 나가듯이, 사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인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너와 내가 맞닿는 순간을 충실히 사랑하는 것.

    작업실 밖으로 나오니 계절은 봄이다. 아직 바람이 약간 차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다. 사랑이 어쨌든 사랑인 것처럼.

    ■ 작가 오정일은 누구?
    오정일의 작업실 풍경
    오정일의 작업실 풍경
    1972년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2003년 갤러리 상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갤러리아트사이드와 시립미술관 등 국내 전시를 비롯해 중국, 오스트리아, 미국 등 주요 그룹전에 20여회 참여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최근 2010년 이스라엘 데비한과의 전시에서 호평 속에 주목받은 바 있으며 현재 목원대학교와 인천 가톨릭대학에서 회화강의를 맡고 있다. 다가오는 11월 갤러리 비원에서 개인전을 선보일 예정이다. [박보미 / 아트 칼럼니스트·봄봄 대표 bomi1020@empal.com]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호(2011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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