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oking] 잘 익은 홍시 같은 속살… 멍게
입력 : 2011.06.17 15:19:23
-
“늙은이 X도 아니고 개봉하믄 쪼그라들어?” 그중 최고의 인기는 원숭이나 차력사를 고용한 요상한 약장수였고-애들은 가라-그 다음으로는 즉석 안주를 파는 좌판이었다. 예비군 훈련을 가도 들병이처럼 담요와 약주병을 든 아낙들이 있던 시절이라 기동력 막강한 좌판형 술집이 시장통에 없을 리 없었다. 시장통에는 늘 직업 분명치 않은-다수는 시장에 아내를 내몰고 딱히 하릴없이 주머니에 손 꽂고 빈둥거리는-남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약장수에게서 회충약도 사고 남성 불끈 약도 사 쓰곤 했다.
그들은 좌판에 앉아 술을 마셨는데, 그 좌판의 재질이 대개는 신속 이동이 가능하고 버리고 가도 전혀 아깝지 않은 사과상자였다. 안주는 온갖 것들이 계절마다 올라왔는데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멍게와 해삼이었다. 왜 멍게와 해삼은 세트로 묶이는지 이유를 모르겠지만-지금도 수산시장의 도매상들조차 이걸 세트로 판다-꼭 그렇게 좌판에 올랐다. 대개는 비닐주머니에 빵빵하게 바닷물과 함께 포장된 것인데 그걸 좌판의 아주머니가 뜯으면 남정네들이 꼭 한 소리 했다. 비닐주머니가 일종의 돋보기 역할을 해서 봉지 안의 안주가 훨씬 커보이게 마련이었다.
“엥? 비니루를 뜯어 놓으니까 해삼 멍게가 진짜 작아졌네. 뭐야, 늙은이 X도 아니고 개봉하믄 쪼그라들어?”
그래도 비린 것이 늘 모자란 서울 변두리 시장통 사내들은 멍게와 해삼에 기갈이 들려 열심히 먹고 소주를 부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못 먹는 게 없었던, 변두리 출신다운 식성이 있어서 어른 안주라고 마다하지 않았다. 멍게는 수염을 자르면 속에 든 체액이 왈칵 쏟아져 나오면서 기막힌 향을 낸다. 그 휘발성 향은 술꾼들의 코를 자극해서 하염없이 소주를 마시게 만든다. 좌판의 주인아주머니들은 멍게 껍질을 솜씨 있게 벗겼다. 수염을 자른 후 칼날로 몸통의 밑둥을 슬쩍 따서 마치 사과 껍질을 벗기듯 돌돌 벗겨냈다. 초짜들이 하면 꼭 멍게가 행패를 부리게 마련인데 저 죽는데 가만히 있는 게 또 이상한 일이었다. 행패라고 해봐야 물총처럼 체액을 사람한테 냅다 쏘는 거였다. 멍게가 발이 있나 손이 있나, 하다못해 콱 물 수 있는 이빨이 있나. 물총이라도 쏘는 건 장한 반항이었다. 친구인 해삼은 아무 반항도 못하고 그냥 토막이 나는 데 비하면 결기 있는 건 멍게인 셈이다.
껍질 벗긴 멍게는 대충 썰어서 초장과 함께 먹었다. 멍게 ‘입’이라고 부르는 빨갛고 우둘투둘한 머리꼭지 부분은 따로 썰어서 멍게와 함께 냈다. 우리 같은 애들이 좌판 주위에 어슬렁거리면 어른들은 이 꼭지를 주면서 입을 막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야박한 어른들이다. 멍게 꼭지 씹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게 씹어도 씹어도 멍겟살 한 점 제대로 넘어오는 게 없다. 살로는 부족한 안주발을 아무 건더기 없는 꼭지로 메워보겠다는 눈물겨운 생각에 간택된 부위일 뿐 아니던가.
오래 전 통영 여행을 할 때 멍게 구경을 실컷 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S형의 취재 보조로 따라 나선 일이었다. 날은 따스해서 바다에 군불이라도 지핀 양 가물가물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그야말로 술 욕심이 도도한 늦은 봄이었다. 이른 멍게였는데도 찾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멍게양식장에서는 줄줄이 멍게를 올리고 있었다. 담벼락에서 해바라기 하는 겨울 소년 같은 뺨 색깔의 멍게가 기다란 밧줄에 하염없이 매달려 있었다. 통영 앞의 어느 바다는 그렇게 멍게로 바닷속을 새빨갛게 채우고 있다가 늦봄에 맛이 들기 시작했다. 통영 출신의 친구는 먹을 게 별난 지역 출신답게 계절을 음식으로 구별했다. 그가 ‘쑥국’이라고 하면 봄도다리 쑥국이요, ‘복어’하면 여름 복국이었다.
“봄에 멍게 향이 코에 살살 느껴져. 아, 이제 멍게가 나오겠구나, 하는 거지.”
어느 오월이었다. 그가 시장에 들러 멍게를 한 상자 사왔다. 스티로폼 상자 가득 멍게가 들어 있었다. 알이 제법 굵었고, 만져보니 껍질도 탄탄했다. 비록 그 시절의 사과나무 좌판 아주머니의 솜씨는 아니지만 사과처럼 살살 돌려서 껍질을 벗겼다. 잘 익은 홍시 같은 속살을 저며서 입에 그대로 넣었다. 그때 좌판에 열병하듯 늘어서 있던 붉은 상표의 소주가 생각났다.
Matching Wine
샤블리 프르미에 크뤼 ‘레 보드베’ (Laroche Chablis 1er Cru, Les Vaudevey)
신선한 과일향과 함께 부싯돌향, 버터향 등 전형적인 샤블리의 아로마를 느낄 수 있다. 입안에서 산뜻하면서도 복합적이고 섬세한 맛, 깔끔한 여운이 남는다. ※ 와인협찬 = 레뱅드메일
[박찬일 / 라꼼마 셰프 chanilpark@naver.com│사진 =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호(2011년 05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