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기 특파원의 차이나 프리즘] 중국, 기술패권 야심 숨긴 채 제조 선진화 전략 추진… 中 제조업, 코로나19 충격 완충제 역할 톡톡, 반중 정서·美 견제하며 뒤에선 도광양회 전법
입력 : 2020.06.29 14:33:25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이면 우리는 만들 것이다.”
코로나19가 중국에서 무섭게 확산되던 지난 3월 9일 둥밍주 거리전기 회장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방역물자를 생산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 가정용 에어컨 1위 기업인 거리전기는 2019년 포천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으로, 지난해 2000억위안(약 34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린 중국의 대표 ‘제조 브랜드’다. 둥밍주 회장은 코로나19와의 싸움을 전쟁에 비유하면서 “국가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전염병 저지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일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거리전기는 곧바로 제조 설비를 전면 재조정해 마스크와 코로나19 바이러스 살균 공기청정기를 생산했다. 이로 인해 지난 1분기 300억위안(약 5조원) 규모의 적자가 발생했지만 10만 명에 달하는 직원을 단 한 명도 해고하지 않았다. ‘인재가 기업의 전부이자 중국 제조업이 자주 혁신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라는 경영철학 때문이었다. 둥 회장은 특히 연구개발(R&D) 인력과 엔지니어를 직접 챙겼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앞두고 제조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대비였다. 저가에 내놓은 고품질 마스크는 불티나게 팔렸고, 자체 개발한 공기청정기는 30여 개국에서 대량 주문이 들어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코로나19 여파로 거리전기의 전국 오프라인 매장이 한시적으로 문을 닫으면서 100만 명이 생계 문제에 봉착하자 둥 회장은 매장의 온·오프라인 융합 판매 시스템을 가동했다. 판매 촉진을 위해 둥 회장이 직접 온라인 쇼핑 생방송에 출연해 방송 시작 5분 만에 매출 1200만위안(약 20억원)을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는 코로나19가 앞당긴 언택트 시대에 전통 제조업이 인공지능(AI), 빅데이터와 같은 신기술 영역과 접목돼 부가가치의 외연을 넓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리커창 중국 총리가 5월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정부공작보고를 통해 정책 기조를 설명하고 중국 제조업을 적극 발전시킬 것이란 의지를 내비쳤다.
거리전기의 사례는 한 국가의 제조 역량이 팬데믹 정국에서 충격의 완충제이자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코로나19 쇼크는 공급과 수요를 연쇄적으로 위축시키는 복합불황을 야기했다. 우선 각 산업군의 생산 시스템을 강타한 뒤 공급 사슬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 연이어 소비와 투자 심리를 급속히 냉각시켜 수요 측면에도 큰 충격을 가했다. 세계에서 코로나19 확산이 가장 빨리 시작됐던 중국이 경제 정상화를 위해 ‘제조 기업의 생산 재개’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이유다. ‘세계의 공장’답게 중국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생존’ 전략을 펼쳤다. 전략의 골자는 제조업 정상화를 통해 일자리 안정과 소비 증대로 이어지는 선순환 고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코로나19 충격이 워낙 컸던 탓에 지난 1분기 중국 경제성장률은 -6.8%로 주저앉았지만 2분기 들어 제조업 구매자관리지수(PMI)를 비롯한 각종 경기 지표들은 완만한 회복 곡선을 그리고 있다. 중국에선 코로나19가 제조업의 중요성을 재차 인지하게 된 계기라고 평가한다. 중국 온라인 경제 매체 시나차이징은 “중국 제조업은 방역과 경기 회복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며 “자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미국과 일본 등 국가들이 공격적으로 ‘리쇼어링’을 추진하고 있는데 중국은 제조 기반 경제를 더욱 탄탄하게 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지난 2015년 5월 제조업 육성 전략인 ‘중국 제조2025’를 발표하면서 기술패권을 향한 야심을 드러냈다. 주요 육성 분야는 ▲정보기술(IT)·반도체 ▲로봇·무인기(드론) ▲항공우주 ▲해양공정·첨단선박 ▲친환경 고효율 자동차 ▲전력설비 ▲농기계설비 ▲신소재 ▲선진 궤도 교통설비 ▲바이오·첨단 의료기기 등이다. 중국 당국은 2025년까지 제조업 강국 대열에 진입하고, 2035년까지 제조 선진국과 어깨를 견주는 수준으로 제조기술을 끌어올리며, 2050년까지 세계 제조업을 선도하는 국가로 올라선다는 단계별 목표를 설정했다. 그러다 미중 무역전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2018년 7월 이래 미국의 대중국 기술 견제가 심해지고, 급기야 올해 미국이 ‘코로나19 중국 책임론’까지 꺼내들자 중국은 공개적으로 ‘중국 제조2025’라는 표현 자체를 삼가고 있다. 또 중국 지도부는 ▲세계화 추세의 위축 ▲코로나19로 인한 반중 정서 심화와 중국의 고립 가능성 ▲해외 첨단기술 접근 난항 등을 제조업 육성 여정의 장애물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 선전에 있는 폭스콘 공장에서 근로자들이 작업하고 있다.
자칫 중국이 미국의 공세와 코로나19 충격 탓에 ‘중국 제조2025’를 포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중국은 코로나19로 접근이 힘들어진 해외 첨단기술에 대한 관심을 줄이는 대신 기술 자립도를 높이는 전략으로 선진 제조 강국의 꿈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를 위해 중국은 자국 내 공급 사슬을 더욱 촘촘히 만들고 전통 제조업과 신기술 영역을 융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속내도 담겨있다. 세계가 중국의 탄탄한 공급망에 더욱 의존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중국 주도의 기술 표준을 제시하고픈 야심이다. 리커창 총리는 5월 22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정부업무보고에서 “제조업 업그레이드와 신흥 산업 발전을 추진하고, 제조업에 인터넷 기술을 접목시킨 스마트 제조 육성과 신흥 산업 클러스터 조성에 나설 것”이라며 ‘제조의 내실화’를 강조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중국이 제조 기술 영역에서도 ‘도광양회(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 전법을 꺼내든 것으로 분석한다.
특히 중국은 외관상 사라진 ‘중국 제조2025’를 달성하기 위해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정책들에 세부 액션플랜을 끼워 넣는 연막술을 펼치고 있다. 중국은 올해 대규모 인프라 투자에 나설 계획인데 이는 제조업 발전 전략과도 관련이 있다. 투자 분야는 5세대(5G) 이동통신, 인공지능(AI) 등으로 대두하는 신형 인프라 분야와 함께 도로·고속철 등 전통 인프라 부문을 아우른다. 올해 집행되는 투자 규모는 7조6000억위안(약 1290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중국이 내수 시장 확대를 꾀하고 자립 경제 기반을 만들고자 꺼내든 국토개발 전략에도 선진 제조 육성 방안이 담겨있다. 선전 등 광둥성 9개 도시와 홍콩, 마카오를 잇는 메가 경제권인 웨강아오다완취의 경우 첨단기술 기반의 선진 제조허브로 육성해 미국 등 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 자립도를 높이는데 활용할 방침이다. 또 중국에서 추진 중인 ‘중부 굴기’ 전략에서 중부는 중국의 제조업 중심지이자 코로나19 충격이 가장 심각했던 후베이성 우한이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중국 지도부가 지역경제 회복에 큰 공을 들이고 있다.
중앙 통제식 관리를 하고 있는 중국은 정부가 나서서 기술 취약고리를 지원하는 동시에 기업들이 당국의 제조업 육성 전략에 적극 동참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지난달 미국이 화웨이를 겨냥해 반도체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하자 중국은 곧바로 자국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인 SMIC에 22억5000만달러를 투자하며 반도체 자급 노선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반도체는 5세대 이동통신(5G), AI 등 차세대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 부품으로 시진핑 정권 들어 자급률을 높이려고 무척 애쓰는 분야다. 하지만 지난해 말 기준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15.7%에 불과해 중국이 ‘중국 제조2025’에서 제시한 반도체 자급률 목표치(70%)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코로나19를 계기로 제조업에 접목시킬 수 있는 디지털 인프라 구축에도 나서고 있다. 텐센트는 향후 5년간 클라우드 컴퓨팅, AI, 사물인터넷(IoT) 등 인터넷 신기술 영역에 총 700억달러(약 84조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는 “코로나19 여파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중국을 견제하게 된 것은 오히려 중국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하게 만든 계기”라며 “핵심 제조기술의 완전한 ‘탈미국화’에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중국 내부에서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