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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미국도 ‘지하경제’ 홍역…주범은 고액팁 레스토랑
입력 : 2013.06.07 14: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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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CNBC 방송은 위스콘신 메디슨 대학의 경제학자 에드가 파이지의 연구 결과를 인용해 지난해 미국의 지하경제 규모가 2조달러, 한국 돈으로 2200조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2200조원이면 한국의 GDP(국내총생산)의 2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CNBC 방송은 또 다른 연구결과를 인용해 이 같은 금액이 2009년에 비해 지하경제 규모가 두 배나 늘어난 것이라고 전했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미국의 지하경제가 급신장했다는 얘기다.
미국의 지하경제가 쑥쑥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는 많다. 미 국세청(IRS)에 따르면 지난해 신고되지 않은 근로소득은 무려 5000억달러(550조원)에 달한다. 지난 2001년 3840억달러에 비교하면 10년 새 1000억달러 이상이 불어난 금액이다. 미국에선 근로소득을 감추고 직업이 없다고 속이면 세금을 안 내도 될 뿐만 아니라 상당액의 실업급여까지 받을 수 있다. 최근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지난 2011년의 경우, 이렇게 지급된 실업급여가 33억달러(3조6000억원)에 이른다. 전형적인 지하경제의 폐해다.
사실 지하경제라고 해서 대단한 음모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지하경제의 주요 원천은 마약이나 주류를 밀거래하는 범죄조직이 아니라 평범한 식당들이다.
얼마 전 워싱턴D.C.의 한 고급식당에서 미국인 사업가와 점심식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하얀색 테이블보가 깔려있는 프라이빗 클럽 식당이었는데, 웨이츄레스는 40대 초반의 백인 여성이었다. 매력적이면서도 지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던 사업가는 “유명한 고급식당에서는 웨이츄레스가 상당히 많은 돈을 벌기 때문에 채용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한다”며 “불경기일수록 웨이츄레스의 인기가 좋아지는데, 현찰로 받는 팁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사업가가 은연중에 암시한 것처럼 웨이츄레스가 현금으로 받은 팁을 세무당국에 신고하지 않는다면 그 금액만큼 지하경제의 덩치가 커지게 된다.
미국에선 식당, 주점에서 근무하는 대부분의 웨이터나 웨이츄레스들은 월급을 아예 안 받거나 아주 조금 받는 대신 손님들이 주는 팁을 주 수입원으로 삼는다. 어지간한 식당에서도 이들이 받는 팁은 음식 값의 15~20% 수준이다. 워싱턴D.C.에서는 점심식사 15%, 저녁식사 20% 정도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팁 수준이지만 딱 정해진 룰은 없다. 25~30% 이상 팁을 주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손님 주머니 사정이 두둑하고, 음식 값이 비싼 고급식당이나 주점일수록 이들의 수입이 많아지게 된다.
‘지하경제가 나쁜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나쁘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지하경제가 나쁜 이유는 탈세를 통해 조세 형평성을 해치고 세수 감소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소득 분배 기능을 약화시켜 양극화를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장기적으로 지하경제는 분명히 경제에 독(毒)이 된다. 그러나 ‘지하경제가 언제나 나쁜 것이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정답을 말하기가 쉽지 않다. 경제가 어려울 때에는 세금탈루보다도 경기 부양에 무게가 실리기 마련이다. 경로야 어찌됐든 돈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이후 미국 정부가 지하경제의 급성장을 가만히 지켜본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진우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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