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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중국’ 폴란드 오해와 진실
입력 : 2013.05.03 16: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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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본 폴란드 사형수는 옳거니 하면서 자신도 소총수를 놀라게 해 달아나게 하기로 마음먹고 “불이야(Fire)”라고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총수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멍청한 폴란드 사형수는 Fire가 발사라는 의미도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왕궁
폴란드가 자랑하는 3C가 있다. 최초로 지동설을 주창한 ‘혁명적 전환’의 아이콘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피아노의 시인 쇼팽(Chopin), 핵물리학의 어머니 퀴리부인(Curie)이다. 3C 말고도 에스페란토어를 만든 자멘호프 박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 미국 카터 정부의 정책 브레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이 폴란드 출신이다.
폴란드 사람들이 스스로 만담의 주인공이 되기를 즐기는 것은 어떻게 보면 현명한 전략이다. 경계심을 없애고 부담 없는 친구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폴란드는 오랫동안 옛 소련의 위성국가 중 하나로 인식돼 왔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하늘을 생각케 한다’로 시작되는 김광균의 시 ‘추일서정’을 통해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낙후된 국가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기업들이 폴란드가 가진 저력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됐다. 1990년대 중반 대우그룹은 폴란드의 국영자동차 회사 FSO를 인수해 유럽의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대우가 폴란드에 깃발을 꽂은 이유는 지정학적으로 7개국과 접경을 맞대고 있는 중부유럽의 허브인 데다 인건비가 싸면서도 우수한 노동력 때문이었다. 그 두 가지 이유는 시간을 지나면서 더 뚜렷해졌고 폴란드는 이제 세계 주요 국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생산기지이자 투자 대상이 됐다. 지난해 유럽 재정위기가 확산되는 와중에도 폴란드는 27개 EU 국가 중 유일하게 경제성장률이 2%를 넘었고, 독일에 이어 외국인 직접투자(FDI) 2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4월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의 폴란드 방문은 인근 국가들에겐 ‘일대 사건’이었다. 원자바오 전 총리는 중동부 유럽 국가수반과 기업인들을 폴란드로 불러들인 뒤 100억달러 투자계획을 밝혔다. 이것은 중국이 폴란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메시지였다.
폴란드 바르샤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Warsaw)는 ‘대평원’이라는 뜻이다. 한반도 1.4배에 달하는 폴란드 국토면적 80% 이상이 평지다. 평지라고 해서 우리나라처럼 적당히 계곡이 있고 동산도 있는 그런 평지가 아니다. 말 그대로 수평인 대지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자동차로 내륙을 여행하다 보면 몇 시간을 달려도 똑같은 풍경뿐이어서 지루하기 짝이 없다. 철광과 석탄이 풍부해서 주변의 강호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숱한 침공을 받기도 했지만 폴란드의 전통적인 기간산업은 농업이다. 시 외곽으로 나오면 광활한 농지 군데군데에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훌륭한 저택들이 즐비한 것을 볼 수 있다.
광활한 평원은 농업에만 유리한 것이 아니라 각종 공장과 생산시설을 짓기에도 최적의 조건이다. 게다가 러시아, 독일, 체코, 우크라이나 등 7개국에 직접 생산품을 실어 나를 수 있다.
폴란드가 ‘유럽의 공장’ ‘유럽의 중국’이라 불리는 것은 지정학적 이유만은 아니다. 인구 3800만명으로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우크라이나 등에 이어 유럽에서 여섯 번째 인구대국이다.
국외 거주자 1500만명을 합치면 5300만명에 달한다. 국외 거주자 중 1000만명 이상이 미국에 거주하는데 특유의 단결력과 애국심으로 무시 못 할 파워를 행사하고 있다.
폴란드는 인구도 많지만 급격히 올라가는 소득수준 덕분에 엄청난 내수시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작년 기준 1인당 GDP는 1만4000달러다. 노동자들의 생산성도 동구권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와 비교해 월등히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순 생산인력뿐 아니라 기초과학과 공학 수준이 높아 세계 유수 기업들의 R&D 센터를 속속 유치하고 있다.
필자가 연초에 폴란드 취재 때 만난 스와보미르 마이만 폴란드 무역청장은 매우 정력적인 다변가였다. 그는 “파이낸셜타임스가 최근 세계적으로 생산시설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역으로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폴란드를 꼽았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투자 유망 분야로 자동차 부품과 전자, 항공산업과 함께 연구개발 분야를 포함한 것”이라고 속사포처럼 자랑을 늘어놓았다.
실제로 한국의 삼성전자가 연구개발(R&D) 센터를 독일에서 폴란드로 옮긴 것을 비롯해 세계 최대 검색 업체 구글과 노키아, 모토로라, 코카콜라뿐 아니라 최근에는 미디어그룹 로이터, 컨설팅 업체 맥킨지도 폴란드에 R&D센터를 신설했다. 폴란드는 뛰어난 노동력 덕분에 주요 글로벌 기업의 R&D 아웃소싱 유망지역으로도 부상하고 있다.
세계 최초 교육부 만든 ‘교육의 나라’ 지정학적 혜택은 운명이라 쳐도 우수한 인적자원도 우연이라고 봐야 할까. 근대에 들어서면서 주변 강호들 틈에서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한 폴란드도 한때는 ‘빛나는 시절’이 있었다.
1500년대 초 야기엘로인스키 왕조 때부터 약 100여년간 폴란드는 러시아를 압도하는 강국이었다. 실제로 수차례 러시아를 침공했고 1611년에는 수도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국력은 1700년대 초 러시아 피오트르 대제의 출현을 계기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쇠락해 가는 가운데도 폴란드의 왕들은 대체로 현명했고 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 선각자를 초청해 가르침 받기를 즐겼다고 한다. 세계 최초의 성문헌법을 1776년 미국 버니지아헌법으로 꼽고 있지만 공표한 시점이 아니라 제정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폴란드가 미국보다 몇 년 앞섰다는 것이 정설이다.
폴란드는 헌법뿐 아니라 세계 최초로 내각에 교육부처를 만든 나라이기도 하다. 그만큼 국가가 백년대계인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체계적으로 교육정책을 펴온 셈이다.
폴란드는 현재까지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7명을 배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독일군 암호체계 ‘에니그마(Enigma)’를 풀어냈을 만큼 논리와 수리에 강하다.
폴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은 나라여서 EU 전체 대학생의 11%가 폴란드 출신이다. 캠브리지 옥스포드 등 영국 명문대학의 유학생 중 인도 다음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바르샤바 공과대학은 세계 공과대학 순위에서 서울대보다 앞서 있고 크라코프의 야겔로니아대학, 브로츠와프의 브로츠와프대학도 바르샤바대학 못지않은 수준이다.
폴란드가 인력의 우수성을 인정받으면서 세계적 기업들의 R&D 베이스캠프가 되고 있는 것은 우연보다는 왕정 때부터 시작된 교육철학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폴란드에 진출한 기업들은 대체로 기업 환경에 만족을 표시하고 있었다.
LG전자는 므와바시에 현지인력 2500여명을 채용해 연산 800만대 규모의 LCD와 모니터 공장을 가동 중이다.
박시환 LG전자 폴란드법인장(상무)은 “폴란드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가 노조지도자 출신 바웬사 대통령이어서 노조 문제를 많이 걱정했는데 대단히 합리적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생각지 못했던 근로조건들을 폴란드 노조는 받아들이고 있다. 수주가 줄어 생산량을 줄여야 할 때는 근로시간을 단축했다가 생산량이 늘어날 때 그만큼 근로시간을 늘릴 수 있어 추가 근로수당이 크게 절감된다”고 전했다.
삼성전자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럽 R&D센터를 바르샤바로 옮기고 현지 연구인력을 1000명으로 증원했다. 대졸 초임이 120여만원 수준으로 독일의 5분의 1에 불과한데도 생산성이 독일에 뒤지지 않고 일에 대한 열의와 성취감은 독일보다 높다고 한다.
술 문화와 ‘빨리빨리’ 기질 한국과 비슷 폴란드인들은 교육열뿐 아니라 음주문화와 ‘빨리빨리’ 문화 등 기질적으로 한국과 비슷한 면이 많다. 역사적으로 외침을 많이 받다보니 우리와 맞닿는 애잔한 정서도 있다.
10년 넘게 폴란드에 거주하고 있는 이상훈 대우인터내셔널 지사장은 “유럽 다른 나라들을 가보면 저녁 9시만 되면 술집들이 다 문을 닫아 도시 전체가 적막에 빠지는데 폴란드는 한국처럼 늦은 밤까지 술을 즐기는 문화여서 한국 남자들에게는 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했다.
LG페트로뱅크에 근무하다 폴란드에 남아 15년 가까이 폴란드에 살고 있는 김영완 노르디아뱅크 부행장은 “1990년대 후반까지 러시아어 외에 제2외국어 구사자가 거의 없었으나 이제 대부분의 폴란드인이 영어를 구사해 영어만으로도 비즈니스와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
한국 사람만큼은 아니라도 폴란드 사람들도 빠른 시간 내에 뭔가를 이뤄내려는 성취 욕구가 강한 편”이라고 말했다.
요즘 폴란드가 국내기업에게 주목받는 것은 도로와 철도, 전력, 통신망 등에서 거대한 인프라 건설 시장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 취재 당시 수도 바르샤바에서 LG전자 LCD공장이 있는 므와바시까지 3시간 거리를 자동차로 이동했다.
비좁고 낙후된 2차선 도로에 중앙선이 마저 안 그려진 구간이 많아 서행하는 트럭들을 추월하기 위해 반대 차선을 여러 번 역주행하며 달려야 했다. 도로뿐 아니라 철도, 통신, 전기 등 인프라스트럭처의 사정이 한국의 1970년대 수준이다.
현재 총 연장 600㎞의 신도로를 건설 중이지만, 2400㎞에 달하는 구도로를 현대화하기 위해 외국자본의 투자를 기다리고 있다. 필자는 야누시 피에호친스키 폴란드 경제부총리와 인터뷰 기회를 가졌는데 그는 인터뷰 내내 한국기업들의 인프라 투자를 당부했다. 피에호친스키 총리는 폴란드의 소수당인 농민당 총재를 겸하고 있다.
폴란드 집권당인 시민강령(PO)이 연정을 제안하면서 부총리에 임명됐다. 단순히 정치적 타협의 결과만은 아니고 바르샤바대 경제학과에서 외자유치 관련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전문성이 감안됐다고 한다. 그만큼 폴란드는 외자유치와 인프라 현대화가 여야를 초월한 국가적 과제다.
인터뷰에서 외국기업들이 매력을 느끼는 저임금 구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물었다. 그는 “폴란드의 우수한 학생들이 공대로 몰리면서 양질의 연구인력이 배출되고 있고 특히 노동성과율이 EU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임금 상승은 불가피하겠지만 노동성과율이 임금 상승률을 웃돌 것이기 때문에 폴란드는 계속 매력적인 인력풀을 유지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글로벌기업들이 폴란드의 임금이 오르더라도 폴란드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피에호친스키 총리는 “특히 원전 건설 등 발전사업 및 철도, 도로, 통신 분야에 집중 투자가 이뤄질 예정이고 중국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한국 역시 적극적으로 투자해주길 기대한다”며 한국의 경쟁심을 은근히 자극했다.
2010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진 카친스키 전 대통령과 희생자 추모식 (위)폴란드 대통령궁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사열하는 폴란드 근위병들,(아래)프랑스 대통령 코모로프스키
EU가 저개발 회원국의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지급하는 EU 발전기금은 지난 2007년부터 올해까지 673억유로달러가 투입된다. 투자 성과가 좋다보니 2014년부터 7년간 2차 EU기금 735억유로달러를 지원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다. 폴란드는 이를 통해 신재생에너지와 발전 분야, 자동차부품 등 제조업 분야에서 매칭펀드 형태의 해외직접투자(FDI)를 유치하고 있다.
EU기금은 폴란드에 진출한 국내기업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고 있다. 바르샤바에서 3시간 거리인 루블린시의 자동차 부품업체 대원강업은 대우FSO를 따라 들어와 폴란드에 공장을 세웠다가 대우와 함께 철수했으나 폴란드가 가진 지정학적 장점 때문에 다시 들어왔다. 차량 서스펜션용 스프링 코일에서 세계적 수준의 기술을 가진 대원강업은 지난해 EU발전기금 3000만유로달러를 지원받아 공장을 전면 리모델링했다.
즈워티화 약세기조도 폴란드 경제에 순풍이 되어주고 있다.
폴란드 최대 은행인 뱅크 페카오의 마르친 므로비에츠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유럽 재정위기에도 폴란드가 크게 흔들리지 않고 성장세를 유지하는 요인 중 하나는 즈워티화의 통화관리가 정부의 계획대로 잘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정부의 재정건전성 관리 의지가 확고한 데다 인구기반 내수시장이 밑받침돼 안정적인 기조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즈워티화 약세 기조가 이어지는 한 유럽 전역의 유기농 농산품 수요 증대로 농업이 수출 강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에너지와 발전 분야에 250억유로를 집중 투자할 예정인 가운데 셰일가스 개발도 눈여겨볼 만하다”고 밝혔다. 또 그는 “공기업의 민영화에 따라 철도와 도로, 신도시건설 인프라도 앞으로 대규모 투자가 이뤄질 수 있는 분야”라고 소개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은 폴란드 정부의 재정건전화 의지는 헌법에도 반영돼 있다. 폴란드 헌법은 공공채무가 국내총생산(GDP)의 60%를 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헌법 규정은 선언적 다짐에 그치기 쉽다고 하지만 세계 최초 성문헌법 제정국이라는 자부심을 훈장처럼 달고 사는 폴란드인들은 재정건전화를 헌법적 가치로 담보한 이상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박봉석 코트라 바르샤바 무역관장은 “업무상 세계 여러 곳에서 살아봤는데 만약 한국을 떠나서 이민을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첫 번째 고려하고 있는 곳이 폴란드”라며 “정서적으로 한국과 비슷한 면이 많고 풍부한 자원과 성장가능성을 갖고 있어 양국이 활발하게 교류한다면 분명히 성장의 시너지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 개요 수도 바르샤바 언어 폴란드어 면적 31만 2685㎢ 세계 70위 (CIA 기준) 인구 약 3838만 3809명 세계 33위 (CIA 기준) GDP 5284억달러 세계 22위 (2012 IMF 기준) 1인당 GDP 1만 7800만 달러(2008년 기준) 종교 가톨릭 89.8% [바르샤바 = 이창훈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2호(2013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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