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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 ‘네이버후드 스카우트’의 악순환
입력 : 2013.05.03 16: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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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도 워싱턴D.C.도 마찬가지다. 지난 1990년대만 해도 워싱턴D.C.의 별명은 ‘살인수도(Murder Capital)’였다. 매년 살인사건으로 죽어나가는 사람의 숫자가 500명을 육박해 미국 내 1위를 도맡다시피 했다. 2000년대 이후 범죄율이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미국 평균을 크게 웃돈다. 인구 1000명당 살인사건 비율은 워싱턴D.C.가 0.17명으로 미국 평균 0.05명의 3배가 넘는다. 여기에 강도, 강간 등을 포함한 폭력범죄 비율 역시 12.02명으로 미국 평균 3.9명의 3배 수준이다.
범죄율 학군 부동산 정보까지 세밀하게 공개 사정이 이렇지만 워싱턴D.C.에서 범죄를 걱정하면서 생활하는 계층은 예나 지금이나 따로 정해져 있다. 중산층 이상은 범죄를 ‘회피 가능한 사회부조리 현상’으로 여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빈곤층이 몰려 사는 지역에서 범죄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험한 곳을 피해 다니면 범죄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워싱턴D.C.에선 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흑인들이 많이 사는 유니언 스테이션 너머 동쪽 지역이 ‘위험한 곳’에 해당된다. 집세 등 거주비용이 싸게 들지만,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이라면 평소 지나다닐 이유가 없는 곳이기도 하다.
네이버후드스카우트닷컴(www.neighborhoodscout.com)이라는 인터넷 웹사이트가 있다. 이름 그대로 이웃을 정찰하는 사이트다. 새로운 도시로 이사하는 미국인이라면 한번쯤 들어가 보게 되는 곳이다. 경찰 등 정부기관도 지역별 범죄율 정보를 세밀하게 공개한다. 하지만 이 사이트에서는 주소만 치면 지역별 범죄율은 물론이고 학군, 부동산 정보까지 한꺼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높다. 범죄율과 학군이 부동산 시세와 직결되는 미국의 현실을 십분 반영한 사이트인 셈이다.
이 사이트는 동네마다 범죄율을 색깔로 표시하는데, 파란색이 짙을수록 안전하다는 뜻이다. 워싱턴D.C. 지역을 검색해 보면 서북쪽은 완전히 파랗고 시내 중앙과 남부도 푸르스름하지만 동쪽 지역은 거의 흰색에 가깝다.
미국에서 경제적 계층은 흔히 인종과 연관된다. 아무도 드러내놓고 표현하진 않지만 통계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현실이다. 미국 연방 인구조사국이 최근 발표한 ‘2007∼2011 인종별 빈곤율’에 따르면 빈곤율이 가장 높은 인종은 인디언과 알래스카 등 원주민계로 27.0%였다. 그 다음이 아프리카계로 무려 25.8%다.
오바마, 인종 간 경제 불균형 뾰족한 대안 없어
여기서 ‘네이버후드스카우트의 악순환’이 발생한다. 얼마 전 워싱턴 포스트(WP)에서 씁쓸한 내용의 통계조사 결과가 보도됐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인구 100만명당 총기에 의해 살해된 흑인은 한 해 평균 151명으로, 백인(15명)의 10배였다. 2008~2010년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총기 희생자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총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흑인들이 많다. 워싱턴 포스트 조사 결과, 흑인 응답자의 78%가 총기규제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반대한다고 밝힌 비율은 22%에 불과했다. 백인의 경우 찬성(48%)과 반대(49%)가 엇비슷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이어 ‘최초의 흑인 재선 대통령’이 됐지만 인종 간 경제 불균형 문제에 대해서는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선 취임식 취재를 갔다가 흑인 파워를 새삼 실감했던 적이 있다.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날 오후에는 국회의사당부터 백악관까지 이어진 펜실베니아 애비뉴를 따라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많은 시민들이 길가에 늘어서 함께 축하를 해주는데, 당시 나와 있던 인파의 60~70% 가량이 흑인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몇 년 사이에 희망적인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워싱턴D.C.를 비롯한 미국 내 주요 도시 범죄율이 매년 낮아지고 있다. 또 다른 희소식은 워싱턴D.C. 지역의 부동산 경기가 좋아지면서 서서히 개발 붐이 불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동산 시세가 뛰면 집세가 버거운 빈민들을 구제하는 것이 숙제로 남겨지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동네 자체는 발전하기 마련이다. 결국 ‘네이버후드스카우트의 악순환’을 이루는 세 가지 기둥 가운데 ‘범죄율’과 ‘부동산 시세’라는 두 가지 기둥이 개선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의 기둥인 교육(학군)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흑인 거주 지역 = 우범지대’라는 오랜 고정관념에도 변화가 올지 모르겠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2호(2013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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