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untry Report]포퓰리즘 때문에 휘청이는 아르헨티나

    입력 : 2013.04.08 1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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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분별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엄청난 자원대국 아르헨티나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2001년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 10대 부자 국가였다. 278만㎢나 되는 광활한 토지에선 세계인들의 밥상을 채워줄 농산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덕분에 아르헨티나에선 한국의 밥값으로 스테이크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쇠고기가 넘쳐날 정도다. 게다가 석유며 천연가스도 풍부하다. 이런 자원을 배경으로 1991~1994년 연평균 경제성장이 7.7%에 이르렀다. 그러나 복지확대 등 포퓰리즘 정치와 함께 환율고평가, 경상수지 적자 등이 겹치면서 한순간에 나락에 빠졌다. 국가부채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아르헨티나 정부의 실질 재정지출은 연평균 5.5% 늘어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채비율이 1992년 30.7%에서 2001년 62.2%로 2배 이상 뛰었고 결국 IMF에 구제금융까지 신청했다.

    문자 해독률이 98%를 넘을 정도로 교육율도 높고, 80년대 중반에 핵무기급 우라늄 생산기술을 갖췄을 만큼 과학기술도 뛰어난 나라가 이렇게 위기를 맞은 것은 아직까지 횡행하고 있는 포퓰리즘 정책 탓이다.

    2011년 10월 치러진 대선에서 민주주의가 회복된 1983년 이후 가장 높은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선거 승리를 위해 무분별한 포퓰리즘 정책을 약속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국가 총예산의 19%(170억달러)를 국민생활 보조금으로 사용하고 은퇴자 670만명의 연금을 37%나 올렸다. 무주택 가정의 보조금도 50% 올렸다. 이처럼 지나친 보조금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진데다 엄격한 수입제한법 마련과 외환규제, 반시장적인 외국회사 국유화 강행 등으로 국제사회마저 등을 돌렸다. 페르난데스 대통령 초기에는 모든 것이 장밋빛이었다. 2009년 마이너스 성장률(-3%)을 기록했던 경제가 2010년 9.2%, 2011년 7%라는 높은 성장세를 나타낸 것이 페르난데스 지지표로 이어졌다. 페르난데스의 지지율은 2기 정부 출범 직후 70%를 넘어섰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나타난 경제성장 둔화세로 페르난데스의 지지율도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아르헨티나 경제성장률은 1.9%를 기록했다. 최근 10년래 가장 낮다. 인플레율 상승과 빈곤층 확산도 지지율 추락을 부채질했다. 여론조사기관 폴리아르키아(Poliarquia)의 지난해 말 조사에서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에 머물렀다.

    정부 산하 국립통계센서스연구소(Indec)는 지난해 인플레율을 10.8%로 발표했으나 컨설팅 업체들은 25.6%로 추산했다. 올해 인플레율도 Indec은 10%로 예상했으나 민간에선 25~30%로 내다보고 있다. 노동계는 인플레율을 고려해 25~30%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를 못 믿고 민간이 제시하는 인플레율에 맞춰 임금 인상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Indec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 정부(2003~2007년) 때부터 통계 수치 조작 의혹을 받아 왔다.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은 인플레 억제를 위해 가격동결 정책을 추진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2006년 말부터 Indec의 운영에 개입했다. 이후 Indec의 통계는 민간 부문은 물론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IMF는 오는 9월까지 물가를 비롯한 경제 지표들을 국제 표준에 맞게 고치라고 요구했다. 아르헨티나가 수용하지 않으면 IMF에서 배제하겠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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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업 또 파업 인플레 논란은 노동계를 비롯한 사회 각 부문의 파업과 시위에 기름을 부었다. 4월부터 진행될 임금 협상을 앞둔 노동계는 “경제 성장이 멈추고 인플레율은 치솟아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기고 있다”며 정부와 정면 대결을 예고했다.

    이미 지난해 11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양대 노동단체인 전국노동자총연맹(CGT)과 아르헨티나중앙노조(CTA) 주도로 총파업이 벌어졌다. 열차와 지하철, 버스 운행이 멈췄다. 공항 직원들의 파업 동참으로 국제선 항공기 운항이 상당수 취소됐다. 은행도 일제히 문을 닫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고 대중교통이 끊기자 상점들이 영업을 중단했다.

    노동계의 총파업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2003~2007년 집권)과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부부 대통령’ 체제에서 처음 벌어진 일이었다. 아르헨티나 노동계를 대표하는 우고 모야노 CGT 위원장은 “현 정부는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며 국민의 지지를 받지도 못한다”고 비난했다. 모야노 위원장은 ‘부부 대통령’ 체제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인물이었으나 지금은 ‘노동계의 반군’으로 불리며 페르난데스 비판세력을 이끌고 있다. 노동계뿐 아니라 사회 부문별 파업과 시위도 계속되고 있다. 농업단체들은 지난해 5월 정부의 농지세 인상 조치에 반대해 시한부 파업을 벌인 데 이어 6월엔 정부의 농업정책에 항의해 1주일간 전국적인 파업을 벌였다. 농업단체들은 극심한 가뭄과 홍수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상황에서 이뤄진 농지세 인상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정부와 농업 부문의 갈등은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인플레 억제 방안의 하나로 농축산물 내수시장 물량을 늘리고 수출을 줄여야 한다며 수출세를 인상하려 했다. 그러나 농업 부문이 3개월간 파업과 시위를 벌이며 강력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좌절됐다.

    지난해 10월에는 직업 군인과 경찰관 수천 명이 정부의 임금 삭감 방침에 항의해 시위했다. 12월에는 금융노조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한부 총파업을 벌였다. 최근엔 교사들도 파업에 가세해 각급 학교의 수업에 차질이 빚어졌다. 전문가들은 중산층의 심각한 민심 이반, 농업 부문의 파업, 노동계의 시위 등이 한꺼번에 분출하는 사실을 들어 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한계 수위를 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르헨티나 여론조사회사인 폴리아르키아(Poliarquia)의 세르히오 베렌스테인 소장은 “경기 침체와 고(高) 인플레, 달러화 거래 규제 강화 때문에 특히 중산층의 불안심리가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대중들의 요구에 못 이겨 아르헨티나 정부는 지난 2월 5일 월마트 등 대형 유통매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상품의 가격을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는 2월 1일로 소급 적용되며 4월 1일까지 계속된다. 대상은 전체 유통업의 70%에 달한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주요 컨설팅 회사들은 정부의 가격동결 정책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노동계 역시 불만이다. 모야노 위원장은 가격동결 조치가 4월로 예정된 임금 협상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플레율 상승세를 인위적으로 억제해 노동계의 임금 인상 요구 수위를 낮추려는 ‘꼼수’라는 것이다.

    중산층마저 지갑을 닫고 있다. 아르헨티나 일간지 라 나시온의 조사에서 지난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택시와 미용실, 음식점 등의 매출이 전년과 비교하면 30%가량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중산층의 소비 감소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디 텔라(Di Tella) 대학 재정연구센터가 발표하는 1월 소비자 신뢰지수는 지난해 1월과 비교해 18.3% 하락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무역수지 개선과 자국 기업의 경쟁력 강화, 달러화 국외유출 억제 필요성 등을 내세워 다양한 방법으로 수입 장벽을 높였다. 그러나 지나친 보호주의는 경제 성장세를 급속하게 둔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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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규모 외화유출 미래를 잠식 아르헨티나 정부는 달러화의 국외 유출을 막는다며 2011년 10월부터 외환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기업의 국외송금을 억제하는가 하면 개인의 달러화 거래도 철저하게 통제했다. 국외여행자에게도 소액의 달러화 매입만 허용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 정부가 출범한 2007년 이래 국외로 빠져나간 달러화는 800억달러에 달한다. 2011년에만 210억달러가 국외로 유출됐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올해도 외환시장에 강력하게 개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런 외환 규제 탓에 브라질 헤알화 암거래가 크게 늘고 있다. 달러화를 사고팔던 거리의 환전상들은 최근 들어 헤알화 거래량을 늘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발표한 헤알화의 공식 환율은 매입 1헤알당 2.02페소, 매도 1헤알당 2.03페소다. 그러나 암시장에서는 1헤알당 3.55페소와 3.75페소 수준에 거래되고 있다.

    헤알화 거래가 늘기 시작한 것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달러화 거래 규제를 강화한 2011년 10월부터다.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을 강화하면서 암시장에서 달러화 가치도 배 이상 뛰었다. 이 기간 헤알화의 공식 가치는 20%가량 올랐다. 같은 기간 암시세는 80% 가까이 상승한 것으로 전해졌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모든 거래에서 미국 달러화가 아닌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이용하도록 할 것”이라며 외환시장 개입 의지를 이어나갈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지난해 아르헨티나 밖으로 빠져나간 달러화는 총 210억달러를 기록해, 종전 연간 최고 유출 기록인 2008년의 230억달러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특히 최근 수개월 사이 아르헨티나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고, 경제 전망의 불투명성이 확산되면서 도피성 달러 유출은 더욱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르헨티나 정부의 달러화 거래 규제는 부동산 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부동산 매매에서 달러화 사용을 금지한 지 1년여 만에 아파트와 주택, 토지, 상가 건물 등의 매매가 27%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2011년 11월 대비 지난해 11월 부동산 매매는 43.5% 줄어들었다고 업계는 전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유층 거주지역인 레콜레타, 팔레르모, 벨그라노 구역에서 활동하는 한 부동산 전문가는 “달러화 사용이 금지된 이후 부동산 시장이 크게 침체됐다”고 말했다. 달러화 사용 금지는 건설업과 부동산 업계의 일자리 감소를 가져왔다. 지난 1년 사이 민간 건설업체에서 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부동산 업계의 해고 근로자는 3만5000명에 이른다. 부동산 전문 컨설팅 업체인 레포르테 이모빌리아리오는 “부동산 분야는 2003~2012년 아르헨티나 경제에서 가장 높은 성장세를 나타냈다”면서 “그러나 올해는 큰 기대를 걸기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며 아르헨티나는 국제사회에서도 공공의 적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유럽연합(EU)과 미국, 일본이 보호주의를 일방적으로 강화했다며 아르헨티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카렐 드 휴흐트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아르헨티나 정부의 보호주의로 유럽 기업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론 커크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비슷한 내용의 주장을 제기했다. 엄청난 자원에도 불구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모습은 정치 지도자들이 어떤 자세로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김덕식 매일경제 국제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1호(2013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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