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이진우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美의회의 대통령 골탕 먹이기

    입력 : 2013.03.07 15: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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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회가 정치적 부담 없이 대통령을 괴롭힐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힌트가 필요하다면 최근 한국과 미국의 정치판을 들여다보면 금세 답이 나온다. 그렇다. 인사 청문회다. 의원들이 지명자를 작정하고 물 먹이거나, 언론이 앞장서 흠집을 내기 시작하면 천하장사도 버틸 재간이 없다. 지명자가 낙마하면 그 정치적 충격은 고스란히 대통령 몫이다. 야당 입장에서는 지불해야 할 대가가 없다. 말 그대로 꽃놀이패다. 얼마 전 정책협의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했던 새누리당 이한구 원내대표는 워싱턴 특파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정치수준을 감안해 인사 청문회 제도를 손볼 필요가 있다”면서 미국을 모범사례로 꼽았다. 미국에선 능력과 자질을 따져 적당하다고 판단되면 정파를 초월해 지지해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얼핏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준 절차에서 대통령을 괴롭히는 기술은 미국이 한수 위다. 무턱대고 인신공격부터 하고 보는 한국 국회의원보다 훨씬 지능적이고 영악하며 끈질기다.

    미국 의회의 대통령 골탕 먹이기 수법을 몇 가지 살펴보자.

    인준 권한을 갖고 있는 미국 상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은 ‘미리 흠집내기’다.

    대통령이 지명하기도 전에 유력한 후보자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놓으면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은 더욱 커진다. 밀어붙였다가 인준을 받지 못하면 더 큰 낭패를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전 라이스 미 유엔주재 대사가 그런 케이스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일찌감치 2기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꼽고 있었지만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들의 잇단 으름장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방법은 대통령의 ‘지명 철회’를 촉구하는 것이다. 개인 비리 등 지명자에게 심각한 결함이 드러났을 때 쓰는 방법이다. 인준 청문회에 보내봤자 소용이 없으니 대통령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각료 지명자에 대한 지명 철회가 12차례 있었다. 세계를 쥐락펴락한다는 미국 대통령도 이럴 땐 ‘휘청’하게 된다.

    세 번째 방법은 ‘시간 끌기’다. 척 헤이글 국방장관 지명자와 존 브레넌 중앙정보국장 지명자가 이렇게 애를 먹었다. 다양한 방법이 동원될 수 있는데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흔히 거론된다. 상대방이 질려버릴 정도로 장시간 발언을 하거나, 무더기로 다른 입법안을 제출하는 방식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행위를 말한다. 필리버스터를 풀려면 상원의원 100명 가운데 60명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한번 발동되면 그만큼 풀기가 어렵다. 하지만 인준 절차에서 필리버스터는 자주 쓰이는 방법이 아니다.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인준절차에 ‘유보(Hold)’를 걸어놓은 방법이다. 미 상원의 인준은 다수결 원칙에 따라 이뤄지게 된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요구하며 ‘유보’를 걸면 절차 자체가 멈춰 버린다.

    마지막 네 번째 방법은 인준 청문회에서 문제점을 집중 거론함으로써 인준을 부결시키는 것이다. 1989년에는 존 타워 국방장관 지명자가 단지 ‘술을 너무 좋아한다’는 이유로 ‘인준 부결’의 고배를 마셨다. 일종의 ‘극약처방’이므로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미국 역사상 각료급 지명자가 인준 부결이 된 경우는 9차례다.

    정치는 겉치레라고 한다. 옛 히브리 속담에는 ‘한 가지 거짓말은 거짓말이고, 두 가지 거짓말도 거짓말이지만 세 가지 거짓말은 정치가 된다’란 말이 있다. 야비한 잇속을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하는 기술이 정치라는 것이다.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장관 지명자를 의회가 괴롭히면 대통령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정치적 당근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근사한 격식을 갖춘 미국 정치판이 부러울 때가 있다. 포장이라도 그럴 듯하면 국민들이 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0호(2013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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