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sia Leaders]아시아적 가치인가 민주주의 후진성인가…아시아를 뒤 흔드는 ‘유산의 정치’
입력 : 2012.07.06 17:17:18
-
싱가포르
유산의 정치를 완성하는 마지막 요소는 비극적 죽음이다. 인디라 간디 전 인도 총리는 시크교 분리주의자에 대한 강경진압을 지시한 뒤 암살당했고, 그의 아들의 라지브 간디 총리 역시 스리랑카 내전에 간여했다가 타밀반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연이은 비극은 네루 가문에 대한 인도인들의 애착을 한층 두텁게 했다. 아키노 대통령과 수치 여사, 하시나 총리도 하나같이 부친을 암살로 잃었다.아시아적 특수성이 반영된 것이라 하더라도 유산의 정치는 민주주의 미성숙을 드러낸다.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지만 내용면에서는 봉건주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아에선 앞으로도 당분간 2세들의 시대가 이어질 전망이다. 2014년 인도 총선에선 라훌 간디 의원이 가문의 세 번째 총리 입성을 노리고 있고, 같은 해 열리는 인도네시아 대선에선 국부 수카르노 전 대통령의 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출마할 태세다. 최근 국회에 입성한 아웅산 수치 여사는 2015년 총선에서 집권에 도전한다.
印 간디가문 네 번째 총리후보, 라훌라훌 인도 총리 후보
소냐 간디의 ‘베팅’은 성공을 거둘까. 네루-간디 가문에 대한 인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놓고 보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문의 1세대인 모틸랄 네루 국민회의당 대표와 2세대인 자와할랄 네루 초대 총리는 인도독립의 초석을 놓았다.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 전 총리(마하트마 간디와는 혈연관계가 없으며 남편 페로즈 간디의 성을 따랐다)와 손자 라지브 간디 전 총리는 파키스탄과의 전쟁 등 격동기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인도 독립 이후 65년간 37년을 네루-간디 가문이 집권한 셈이다.
5세대 주자는 라지브 간디의 아들이자 현 집권당인 국민회의당 소냐 간디 당수의 아들인 라훌 간디 상원의원(42)이다. 미국 하버드대를 나와 인터넷회사를 경영하다 2004년 정계에 입문한 뒤 줄곧 차세대 총리후보로 거론돼 왔다.
하지만 지난 3월 치러진 5개주 지방선에서 네루-간디 가문은 참패를 맛봤다. 라훌이 가문의 네 번째 총리가 되는 데도 빨간불이 켜졌다. 연초부터 3월까지 우타르프라데시(UP)주를 비롯해 5개 지역에서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집권 국민회의당(INC)은 의석이 가장 적은 한 곳에서만 승리하고 4개 주에서 완패했다.
특히 UP주 선거 패배가 뼈아팠다. 인구가 2억명에 달해 인도의 ‘정치 1번가’로 불리는 UP주 선거는 차기 총리를 노리는 라훌의 정치적 시험무대였다. 암 수술을 받은 어머니를 대신해 그가 선거운동을 진두지휘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국민회의당은 UP주 의회 403석 가운데 고작 28석을 얻는 데 그쳤다. 당초 여당에 유리할 것으로 점쳐졌던 펀자브주와 우타라칸드주, 고아에서도 패배했다. 여당과 내각의 잇따른 부패 스캔들에 유권자들이 등을 돌린 결과다.
지방에서 행정경험을 쌓은 도전자들도 라훌의 대항마로 속속 부상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나렌드라 모디 구자라트주 주지사다. 모디는 인도에서 드문 CEO형 정치인으로 최근 10년간 구자라트 경제를 인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개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도에서 일상화된 부정부패를 척결했고 기업규제를 철폐해 미국 포드와 GM 등 외국기업들을 대거 유치해냈다. 이에 따라 구자라트주는 모디가 취임한 2001년 이후 매년 두 자릿수 경제성장률을 지속하고 있다.
다른 주와 달리 석탄이나 철광석 자원도 없고 대규모 곡창도 없는 사실상 불모의 땅을 인도에서 가장 산업화된 지역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오로지 모디의 비전과 추진력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초 현지 언론이 실시한 차기 총리 후보 여론조사에서도 모디는 1년 전의 두 배 가까운 24%를 얻었다.
소냐 간디 당수와 라훌이 넘어야 할 또 한 가지 도전은 경제위기다. 유로존 위기로 인도경제가 직격탄을 맞은 것. 1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5.3%에 머물렀다. 이는 지난 2003년 1분기 이후 9년 만에 최저치다. 전년동기(7.8%)는 물론 시장의 예상치(6.1%)보다도 한참 밑돈 수치다.
브릭스(BRICs)로 각광받던 인도 성장률이 급락한 것은 유럽 재정위기로 수출이 줄어든 반면 루피화 약세로 물가가 오르고 투자가 위축된 탓이다. 루피화 가치는 1년 전과 비교해 25% 떨어진 상태다. 이에 따라 국제신용평가사 S&P와 피치는 인도 신용등급을 강등할 수 있다고 최근 경고했다. 인도가 브릭스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신용등급이 강등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유럽 탓만 할 일도 못된다. 소냐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당이 경제위기 와중에 이렇다 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도는 12억 인구와 양질의 IT인력, 석탄과 철광석 자원 등 성장잠재력을 갖췄지만 리더십 부재로 인해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곡물파동이 대표적이다. 5세 이하 어린이 절반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지만 밀이 창고에서 썩어나고 있다. 펀자브를 비롯한 곡창지대에선 수확량이 크게 늘었지만 인도는 3년째 곡물수출을 금지하고 있다.
국내 곡물가격 폭등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창고부족과 물류인프라 낙후로 밀값은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네루-간디 가문에서 총리를 배출할 때는 항상 극적인 요소가 있었다. 라지브 간디는 어머니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한 뒤 총리 후보로 부상했고, 라지브가 암살당하고 국민회의당이 침체에 빠졌을 때는 아내인 소냐 간디가 당을 부활시켰다.
인도 국민들은 경제위기와 정치력 실종을 타개할 지도자로 ‘젊은피’ 라훌을 꼽고 있다. 힌두스탄 타임스가 지난 5월 35세 이하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차기 총리후보로 라훌을 꼽은 응답이 27%로 가장 많았다.
필리핀 최고 정치가문의 ‘엄친아’ 아키노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
아키노 가문도 그 가운데 하나다.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전 상원의원은 마르코스 독재에 저항하다 1980년대 암살당했고, 그의 아내인 코라손 아키노는 민주화 혁명 이후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어 아들인 노이노이(아키노 대통령의 애칭)가 다시 2010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올해 52세인 노이노이는 1998년 하원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2009년 뜻하지 않은 반전이 이뤄진다. 어머니인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이 타계하면서 전국적 추모열기가 일어난 덕분에 야당의 대권후보로 선출된 것. 결국 그는 다음해 5월 치러진 대선에서 승리, 세계 첫 모자 대통령 기록을 세웠다. 집권 2년이 지난 현재 노이노이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이다. 그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함께 동남아 국가에서 성공한 지도자로 꼽힌다.
무엇보다 경제성적표가 좋다. 신흥국가들이 유로존위기 여파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필리핀은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지난 1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6.4%에 달했다. 2년 만에 최고치다.
필리핀 경제가 ‘나홀로 호황’을 구가하는 것은 상당부분 아키노 대통령의 정책덕분이다. 도로를 비롯한 인프라 확충과 부정부패 척결에 나서 외국인 투자가 크게 늘었다. 그가 집권한 뒤 2년간 외국인 투자는 연평균 50% 가까이 증가했다. 이에 따라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 5월 말 필리핀의 국가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stable)에서 긍정적(positive)으로 상향조정했다.
하지만 아키노는 대외문제에서 최대 위기에 직면해있다. 중국과의 남중국 영유권 분쟁이다. 중국은 스카보러섬(중국명 황옌다오)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작은 나라가 대국에 맞서지 말라”며 공개적으로 필리핀을 압박하고 있다.
이에 맞선 아키노의 대응카드는 미국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필리핀과 미국은 지난 5월 처음으로 양국 외교, 국방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2+2 회담을 열고 안보분야 협력강화에 합의했다. 대(對)중국 공동전선을 구축한 셈이다.
사실 중국이 갑자기 스카보러섬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데는 미군철수가 단초를 제공했다. 수빅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에 미군이 주둔할 당시만 해도 스카보러섬은 미군의 사격연습장이었다. 필리핀 주둔 미군으로 인해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철저히 봉쇄당했다.
하지만 필리핀 의회가 미군 주둔 연장을 부결한 뒤 미군은 1992년 철수해 버렸고, 스카보러섬은 중국이 주인행세를 하게 됐다. 아키노가 뒤늦게 미군을 끌어들이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이미 필리핀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부상한 중국이 “우리끼리 해결하자”며 눈을 부라리기 때문. 필리핀 최대 정치가문에서 ‘엄친아’로 성장한 아키노가 중국에 맞서 얼마나 외교력을 발휘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잉락 친나왓 총리에 붙은 ‘탁신 대리인’ 꼬리표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
지난 2008년 탁신이 부정부패 혐의로 쫓겨나 해외 망명길에 오르고, 지난해 잉락이 오빠를 대신해 푸어타이당을 이끌고 총선에서 승리한 뒤 태국 정치권에선 그녀가 오빠를 위한 사면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관측해왔다.
마침 지난 5월 말로 탁신에 대한 5년간 정치활동 규제가 풀리자 잉락 총리와 여당은 ‘화해 사면 법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발생한 모든 시위와 쿠데타에 관련된 범법자들을 일괄 사면해주는 내용이다.
태국은 지난 2006년 탁신 전 총리가 군부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난 뒤 정정불안이 심화됐다. 특히 2010년에는 친탁신 시위대(레드셔츠)와 군경 간의 충돌로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하지만 군부와 야당은 이 법안에 반대 입장이다. 민주당은 “유혈사태 관련자 사면을 핑계로 탁신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의도”라며 반발하고 있다. 게다가 법안은 탁신이 부정부패를 통해 모았다가 국가에 몰수된 재산 460억바트(약 1조7000억원)를 돌려받는 길도 열어놓았다. 야당 의원들은 화해사면 법안에서 몰수 재산 환수부분을 뺄 것을 주장하며 법안 상정을 저지하기 위해 의장석을 점거하기까지 했다. 의사당 밖에서도 5000여 명의 반(反)탁신 시위대, 일명 ‘옐로셔츠’가 며칠씩 항의시위를 벌였다. 결국 잉락 총리와 푸어타이당은 화해사면 법안을 처리하지 않고 다음 회기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소동은 잉락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이나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등은 국가수반이었던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집권했지만 잉락은 영향력이 막강한 오빠의 ‘대리인’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 것. 내정에서도 그녀는 아직 오빠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작년 총선에서 내걸었던 공약은 대부분 탁신이 추구하던 포퓰리즘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청구서’는 혹독하다.
농민표를 잡기 위해 내걸었던 수매가 인상은 태국 쌀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렸다. 잉락과 푸어타이당은 지난해 선거당시 쌀 수매가를 평균 50% 인상하겠다고 공약해 집권 이후 그대로 이행했다. 이에 따라 태국 쌀값은 톤당 550달러로 치솟아 450달러 안팎인 베트남, 인도 등에 가격경쟁력에서 크게 밀리고 있다. 올들어 1~4월 수출량은 지난해 동기의 절반으로 급감했다.
최저임금 인상도 태국경제의 뇌관이다. 잉락은 총선 당시 서민층 표를 의식해 최저임금 인상을 내걸었고, 지난 4월 전국 76개 주 가운데 우선적으로 방콕을 비롯한 7개 주에서 최저임금을 40% 안팎 올렸다. 당초 전국에서 일괄적으로 인상하려다 재계의 강력 반발로 7개 주에서 먼저 시행한 것이다. 나머지 지역에서는 올해 말이나 늦어도 내년 초까지 하루 최저임금을 300바트(약 1만1000원)로 올리게 된다.
이렇게 되자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먼저 올린 7개 지역으로 ‘대이동’을 시작했고, 의류업체를 비롯해 노동집약 산업에선 미얀마 등지로 생산시설을 이전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태국상의에 따르면 최저임금 인상 여파로 전체 중소기업의 10%에 해당하는 20여만개가 올해 안에 폐업하거나 해외로 이전할 전망이다.
방글라데시 전직 대통령과 그 딸들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지난 20년간 두 여걸은 번갈아가며 두 차례씩 총리를 맡아 방글라데시 정치를 쥐락펴락했다.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들이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유산의 정치 덕분이다. 하시나 총리의 부친은 국부로 추앙받는 무지부르 라만 초대 대통령이고, 지아 당수의 남편은 1981년 암살당한 지아우르 라만 전 대통령이다. 부친과 남편의 집권기간까지 포함하면 1971년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한 지 41년이 되도록 방글라데시 정치권력을 두 집안이 양분해온 셈이다.
두 집안이 권력을 독점하는 동안 국가는 성장동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군부와 공무원, 심지어 조직폭력배들까지 두 가문에 줄을 서 부정부패가 일상화됐다. 국제투명성기구가 2009년 180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방글라데시 부패지수는 148위였다. 1500만명이 밀집한 수도 다카는 세계 최대 빈민촌으로 꼽힌다. 도로를 닦고 공중화장실을 짓는 데 쓰일 예산이 정치인과 공무원 호주머니로 들어간 결과다.
하지만 하시나 총리와 지아 당수는 오로지 권력에만 집착하고 경제재건은 사실상 포기한 상태다. 차기 총선이 아직 18개월이나 남아있지만 하시나 총리는 벌써부터 야당을 누르기 위해 공포정치를 펼치고 있다. 지난달에만 BNP소속 의원과 당직자 30여 명이 공공질서 파괴 혐의로 투옥되고 당원 3000여 명이 체포됐다. 뿐만 아니라 정치보복으로 의심되는 살해사건이 잇따라 발생했고 정권의 부패를 파헤치던 기자들이 살해당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시민운동가들에 대한 납치테러도 줄을 잇는다.
두 가문과 다른 대안세력을 표방해온 무하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총재에 대해서도 박해가 가해졌다. 유누스 전 총재는 지난 1983년 빈민층 여성에게 소액 대출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그라민은행을 설립해 세계 마이크로크레디트 시장을 개척한 인물이다. 이에 대한 공로로 지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시나 총리는 노벨상 수상자인 유누스를 잠재적 라이벌로 의식해 그가 설립한 그라민은행에 대한 흠집내기에 열을 올렸다. 결국 유누스는 지난해 정년을 이유로 그라민은행 총재직에서 쫓겨났다.
칼레다 지아 진영도 민생을 보듬기보다는 권력투쟁에 몰두하고 있다. BNP는 공정선거가 보장되지 않을 경우 총선에 불참하겠다는 엄포를 놓으며 활동가들에 반정부 시위를 촉구하고 있다.
수십 년간 원조를 퍼부어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나라에 대해 국제사회도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월드뱅크는 최근 파드마대교 건설에 대한 자금지원을 철회했고, 방글라데시에 대한 최대 원조 공여국인 일본도 방글라데시 정부에 부패 일소를 요구하고 나섰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최근 방글라데시를 방문했을 때 무하마드 유누스를 따로 만나 존경을 표시한 것은 하시나 정권에 대한 간접적인 경고로 해석된다.
[박만원 매일경제 아시아순회특파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2호(2012년 07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