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ddle East] 아랍 민주화 시위의 파장과 전망

    입력 : 2011.06.17 16: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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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의 무풍지대였던 아랍세계가 연일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민주화 시위와 정권 퇴진 투쟁에 휩싸이고 있다. 독립 이후 22개 아랍국가 중 단 한 나라도 자유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보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과 저항은 분명 21세기 이슬람 민주주의를 향한 의미 있는 출발로 보인다.

    튀니지 군부정권이 무너지면서 23년간 집권한 벤 알리 대통령은 금괴를 갖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가장 충실한 우방이었던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마저 힘없이 무너졌다.

    자유와 인권, 복지와 인간다운 삶을 부르짖으며 시작된 절절한 외침은 국경을 넘어 아랍세계 전체로 번지고 있다.

    리비아에서는 내전의 양상으로 발전하고 예멘, 바레인, 오만, 요르단, 모로코, 모리타니 등지에서도 대대적인 개혁요구와 민주화 항쟁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아랍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 시위는 앞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미 정권이 무너진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정치적 대안 세력의 역부족과 치솟는 물가와 민생고로 인해 또 다른 권위주의 정권이 대두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곧 무너질 줄 알았던 리비아 카다피 정권은 반 카다피 진영과 힘겨운 내전의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다. 바레인에서는 시아파들의 정치적 개혁 수용 대신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끌어들이면서 무차별 군사적 진압을 펼치고 있다.

    이웃의 시아파 이란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자칫 역내 분쟁으로 확대될 조짐이다. 민주화 시위 이후 아랍세계에 과연 진정한 민주정권이 등장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아직 부정적이다.

    왜 튀니지 민주화 시위가 22개 아랍 전역으로 확산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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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니지에서 출발한 한 국가의 시위가 왜 아랍권 전체로 번져나갈 수 있었을까. 아랍은 1920년대만 해도 하나의 문화공동체였다. 아랍은 원래 종족적 개념은 아니다.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주된 종교로 믿으며(이집트·시리아 등지에는 아랍 크리스천들도 많이 있다)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아랍’이라고 주창하는 사람들의 집합개념이다. 아랍인 중에는 흑인, 백인, 햄족, 순수 아랍인 셈족도 존재한다. 소말리아나 수단은 완전한 흑인 아랍이다. 사하라 사막에 사는 베르베르족은 체질인류학 분류로 따지면 코카서스계 백인에 속한다. 이집트 일부지역 주민들은 햄족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아라비아반도와 걸프해 연안에는 대부분 주류 셈족 아랍인들이 거주한다. 이렇게 보면 아랍은 종족적 공동체라기보다 문화적 개념이다. 이런 공동체 개념의 아랍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서구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 찢기고 저리 쪼개지면서 22개의 개별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대부분은 왕정국가로 출발했지만 이라크,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튀니지, 시리아 등 많은 나라들이 군사 쿠데타에 의해 사회주의 권위주의 정권으로 탈바꿈했다. 그나마 석유가 매장돼 복지상태가 좋은 산유국들은 오늘날까지 왕정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비산유국이면서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요르단과 모로코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요르단과 모로코 왕가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종교적 상징성을 갖고 있다. 때문에 무력으로 성립한 다른 아랍 왕정국가들과 근본적인 성격이 다르다. 아랍 민중들의 존경과 보호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현재의 아랍 국가들이 각각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언어와 종교, 종족적 동질감을 공유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속력이다.

    튀니지 사태를 비슷한 환경에서 억눌리고 있는 자신들의 일로 쉽게 받아들이는 배경이다.

    재스민 혁명의 발단과 아랍 민주화 시위의 전개과정 재스민 혁명은 한 평범한 아랍청년의 분신자살에서 촉발됐다. 26살의 무함마드 부아지지는 튀니지 남쪽의 자그마한 마을 시디 부지드의 과일 행상이었다. 무허가 과일 리어카를 끌고 가던 부아지지는 그 날도 경찰의 단속에 걸렸다. 그를 기다리고 있을 8명의 가족을 생각하며 애원해봤지만 통하지 않자 결국 하루 임금에 해당되는 10디나르(약 8500원)의 벌금을 내야만 했다. 그때 여자 경찰의 모욕이 그를 자극했다. 죽은 아버지를 들먹이며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명예와 자존을 먹고사는 아랍 남성에게 여경이 준 수치와 침의 모욕은 이미 한계를 뛰어넘었다. 이것은 ‘영적인 살인’이었다.

    그래도 그는 이성을 잃지 않고 시청에 찾아가 여경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항변했다.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부랑아 취급하며 쫓아냈다. 2010년 12월17일 오전 11시30분, 그는 석유통을 들고 다시 시청에 찾아가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죽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고한 처절한 항변이었다. 그의 분신은 트위터와 유투브 등을 통해 삽시간에 아랍 전역으로 확산됐다. 그것은 거대한 분노의 폭발음이었다.

    그동안 권위의 위협에 억눌려 왔던 잃어버린 존재감이 함성으로 되살아났다. 30~40년 권위주의 정권이 누적해온 부정과 부패, 치부와 인권적 억압은 한계치를 넘고 있었다. 더욱이 최근의 식량난으로 생필품 값이 폭등하고 사회의 주류계층인 청년 실업이 늘어가면서 일자리 기회는 점점 힘들어져 갔다. 위키리크스의 폭로로 자신들을 돌본다고 선전하던 지도자들과 그 자식들의 더러운 치부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게 됐다. 소셜네트워크의 힘을 타고 분노는 뭉쳐졌다. 뭉친 힘은 철권통치체제를 무너뜨렸다. 이렇게 하여 재스민 혁명은 억눌린 반세기를 되찾기 위한, 인간의 근원적 자유를 향한 민주화 시위로 승화됐다.

    무너질 거라던 카다피 정권은 왜 잘 버티고 있는가
    연설 전 지지자들과 악수하고 있는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연설 전 지지자들과 악수하고 있는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 정권의 조기붕괴는 서방의 오판이었다. 나쁜 정권이니까 무너져야 한다는 것과 쉽게 무너진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카다피는 폭압정권이지만 나름대로 단단한 충성 지지계층이 형성돼 있다. 그동안 ‘리비아’와 ‘카다피’는 거의 동의어였다. 오늘날 이상하게 변질된 ‘카다피가 금방 무너질 것 같다’는 예상은 집권 초기 20년 가까이 카다피가 리비아 국내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서방세계가 놓쳐버린 부분이다. 1969년 9월1일, 27세의 청년 카다피가 혁명을 성공시키고 반외세·반굴종의 기치를 내걸며 국민들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도덕적 자주국가를 표방했을 때 카다피는 리비아 국민은 물론 많은 제3세계 청년들에게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였다.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 대신한 국민집회를 통한 직접민주주의,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도덕적 경제와 이슬람 사회주의, 여성해방과 남녀역할 분담론, 완고한 이슬람 율법체계에 대한 과감한 개혁 등을 통해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다. 또 하나 아랍세계를 위한 카다피의 큰 공헌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자극해 원유 제값 받기 운동에 불을 댕겼다는 점이다. 그는 메이저 석유회사 대신 주로 리비아 석유에만 의존하던 개별 석유회사들을 상대로 원유가 인상을 성사시켰다.

    1970년대까지 국제유가는 배럴당 겨우 2달러 수준이었다. 그 결과 19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우리나라와 서방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지만 아랍산유국 입장에선 배럴당 15달러 이상으로 치솟으며 누적된 가격 착취구조를 개선하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리비아 시위의 본질은 독재와 민주의 구도가 아니었다.

    부족 간 갈등, 권력투쟁, 석유 이권의 공정한 분배, 권력소외계층의 반발 같은 고질적인 이해관계의 다툼이 본질이다. 그래서 반 카다피 세력은 처음부터 무장 투쟁으로 시작했다. 그것은 완벽한 내전의 성격이었다. 반 카다피 진영의 리더들도 하나같이 민중과 고통을 함께한 적이 없는, 어제까지 카다피의 품에서 호위호식하며 온갖 부정과 부패를 저지른 공범자들이었다. 많은 리비아 국민들이 그들을 향해 변절자, 배신자 딱지를 붙이는 이유다.

    결과적으로 현재 카다피의 기이한 궤변과 행태를 보면 정신이상자로 낙인찍어 마땅하지만 초기의 정치적 이상을 공유한 단단한 기득권층이 그를 떠받들고 있다. 카다피를 제거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군부를 그의 아들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도 카다피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을 위해 비싼 아프리카 용병들을 사들이고 자신의 국민들을 학살하는 카다피가 물러설 곳은 더 이상 없다. 충성파 국민들이 아무리 혁명 지도자의 과거 영광을 기억한다해도, 옆에서 죽어가는 가족과 이웃들의 학살에 더 이상 지지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왜 개입을 주저하는가 리비아 사태에 미국은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피했다. 걸프전 후 지금까지 미국이 취해왔던 정책과는 사뭇 다른 측면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목을 조이는 재정적자 문제 때문일 것이다. 금년만 해도 재정적자는 1조4000억 달러에 이르렀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쏟아 부은 전비만 해도 1조2000억 달러를 넘었다. 그러니 리비아에서 또 다른 전선을 형성할 정치적 상황이 되지 못한다. 둘째는 카다피를 제거하기 위해 반정부군이 미국과 서방의 개입을 요청하고는 있지만 지난 40여 년간 워낙 단단한 반미정서가 깔려있기 때문에 미국과 협력이 가능한 정권의 등장이 쉽지 않은 점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처절한 교훈에 비춰 본다면 출구가 불확실한 것이다. 오히려 반군을 지원했다가 지금 카다피 정권보다 더 강경한 이슬람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카다피를 주저앉히는 대신 온건한 그의 아들 하나로 하여금 정권 안정을 꾀하게 하고 야권과 권력 분점을 통한 느슨한 연방제도를 더 선호할지도 모른다. 결국 아랍연맹이나 중립적 국가들이 중재에 나서 당사자 사이의 협상을 통해 카다피에게 출구전략을 마련해 줘야 한다. 필요한 경우 유엔평화군을 양 진영의 중립지대에 파견해 내전 장기화로 인한 민간인 희생을 막고 시간을 두면서 협상을 진행시키는 방안도 유력하다. 물론 카다피의 범죄에 대해서는 국제사회가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

    아랍의 미래 아랍세계는 근대화 이후 처음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변화의 몸짓을 시작했다. 그렇더라도 아랍세계가 치열한 투쟁을 거쳐 곧바로 민주정권이 들어선다는 보장은 없다. 나라마다 사정이 너무 다르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군부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지면서 이웃한 장기독재정권인 알제리와 예멘의 변화가 필연적이다.

    걸프지역의 산유국 왕정은 비교적 안정세계지만 수니파 소수집권세력에 맞서 시아파의 정치적 요구가 거센 바레인은 상당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오만 등은 민주화 지수는 낮아도 자국민들의 높은 소득수준으로 미뤄 왕정 붕괴라는 극단적 반발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사우디아라비아가 가장 반민주적, 반인권적, 반여성적 체제를 가진 국가로서 일차적인 개혁대상이다. 그렇지만 사우디 왕정 붕괴가 주는 세계경제 타격이 워낙 크기 때문에 미국이 결사적으로 사우디 왕가를 보호해 줄 것이다. 이번 아랍민주화 시위가 주는 중요한 변화는 설령 정권교체라는 최종적인 꿈을 이루진 못해도 나라마다 대대적인 개혁과 인권개선, 분배정책을 통한 빈부격차 해소, 새로운 제도도입 등으로 엄청난 긍정적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현재 진행 중인 민주화 시위 이후가 더 걱정이다. 민주주의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랍국민들이 겪을 혼란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지금보단 덜하지만 또 다른 폭압적인 권위주의정권이 등장할 가능성도 높다. 이러한 과도기적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야겠지만 분명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이슬람의 가치를 바탕으로 서구와 협력하고 공존하는 이슬람식 민주주의가 정착할 것이란 점이다.

    21세기 들어 급진적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잃은 지 오래다. 미국의 군사적 개입과 전쟁이 치열한 일부 이슬람 국가에선 이슬람 정치집단들의 영향력이 더 세지만 이는 일시적 현상이지 대중적 지지기반을 근거로 한 안정된 집권문화가 아니다. 그래서 이집트나 알제리 등지에서 이슬람 정치집단이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전망이다.

    이슬람 정당으로 서구와 협력관계를 지속하면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고 국제적 이슈에 주도적 중재자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 터키가 현재로서는 아랍 국가들이 추구하는 롤 모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이러한 과정을 수긍하면서 기다려줄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과도기적 이슬람 정권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고 무리하고 인위적인 정권교체를 감행한다면 아랍의 민주화는 다시 50년을 기다려야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중동인식과 준비
    리비아의 위성도시 자위야 반정부 시위
    리비아의 위성도시 자위야 반정부 시위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중동–이슬람권 연구 분야에서 전문가 수나 연구축적 면에서 단연 최하위권이다. 아랍만 해도 22개국인데 아랍세계 전체를 관리하는 시스템도 없이 어떻게 개별 국가단위의 고급정보 획득과 전문가 양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9·11 테러로 우리의 대중동인식과 전문가 부족을 절감하고, 그 후 김선일씨 사건,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인질사건 등이 터질 때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부나 기업 누구도 체계적인 중동 연구의 틀을 다지려는 시도는 뒷전이었다. 이슬람 문제를 함께 살아가야 할 문화적 협력 파트너가 아닌 깨고 부서져야 할 종교적 악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우리나라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왜곡된 인식도 큰 문제다. 이제라도 해외지역연구원 같은 전문적 기구를 설립해 급변하는 중동·아랍세계의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이희수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lee200@dreamwiz.com]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호(2011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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