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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 미국 우위 시대는 끝났다
입력 : 2011.05.20 15:5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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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먼델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1월4일(현지시간) 열린 전미경제학회에서 ‘세계경제 어디로 가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잔치는 매년 미국의 주요 도시가 돌아가면서 연다. 지난해는 애틀랜타, 올해는 덴버, 내년에는 시카고다. 호텔까지 가는 내내 어디서 왔느냐, 뭐 하는 사람이냐 등을 물어보는 택시 기사는 한 대목 잡을 욕심으로 마냥 들떠 있다.
자정이 가까운 늦은 시간에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 앞에 이불 보따리 같은 것이 듬성듬성 보인다. 도심 한복판에 웬 이불인가 하고 봤더니 노숙자들이 침낭을 펴고 길에서 자고 있는 광경이다. 1월이면 여기도 한겨울인데, 고산지대라 더 추울 텐데 다른 곳도 아니고 도심 한복판 호텔 앞에서 노숙하는 모습이라니. 우리나라 돈으로 하루 20만원이 넘는 호텔에서 자는 사람과 같은 시간에 그 호텔 앞에서 한겨울에 침낭을 펴고 자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이 오늘날 미국의 모습이다. 덴버에 모인 1만여 명의 경제학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경제 주체의 부정부패가 경제 위기 초래전미경제학회 참석차 덴버를 방문한 국내 경제연구원장들과 재미 경제학자들이 대담을 마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형태 자본시장 연구원장, 김선웅 한미경제 학회장, 안국신 한국경제학회장, 현오석 한국개발 연구원장, 김영용 한국경제 연구원장, 김준한 포스코경영 연구소장, 김세형 매일경제 논설실장, 조인구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
올해 개막 연설자는 윌리엄 블랙 미주리대 교수와 알페로비츠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 작년에 비해 기조연설자의 중량감은 떨어진다. 올해 주제는 ‘윤리,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 제목이 심상찮다.
지난 1970년대 이후 미국은 세계 경제학의 흐름을 이끌었다. 그 동안의 주된 기조는 ‘효율성’이었다. 어떻게 하면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화려한 수학적 방법론을 도입해 가장 효율성을 높이는 경제 체제는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 그 동안의 중요 관심사였다. 경제윤리, 분배 등의 개념은 뒤로 밀렸다. 하지만 올해는 전미경제학회가 ‘경제윤리’를 화두로 들고 나왔다. 지난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경제학자들은 기존의 이론을 반성하고 있다. 올해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금융위기는 경제학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윌리암 블랙 미주리대 교수는 “경제학자들의 방심으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면서 “우리가 부정문제를 감독하는 역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이어 2008년 금융위기를 비롯해 과거 경제위기를 초래했던 요인이 근본적으로 경제 주체들의 부정부패에 기인한 점이 크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정부패를 법이 아닌 경제학자들이 감시해야 한다니 모순인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의 논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일리가 있다. 불법행위는 법에 의해 처벌받는다. 반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제행위는 처벌할 방법이 없다. 예를 들어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항상 주가가 오를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주식을 사고 증권사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의 이런 행위가 주식 거품을 만들고 금융위기를 야기했다. 특히 고객에겐 주가가 오른다고 얘기하면서 자신들은 주식을 판다. 윤리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법적으로 딱히 처벌하기 애매하다.
다른 예도 있다. 경제학자 중 많은 사람이 일반 기업의 사외이사나 자문역 등으로 일한다. 또 이들 경제학자는 정부기관의 컨설턴트로도 활용된다. 정부가 어떤 제도 개편안에 대해 자문을 구할 때 이들은 자신이 사외이사로 근무하는 기업에 유리한 쪽으로 답변한다. 제도개편안이 자문받은 대로 이뤄진다면 그들은 이익을 얻는다. 제3자 입장에서 공정하게 자문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공정’이라는 탈을 쓰고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양심 없는 행동이다. 이런 행동도 법적으로 처벌하기 쉽지 않다. 이런 경제행위는 명백한 불법은 아니지만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행동이고 경제학자들이 이를 조장하는 측면이 있었다. 경제학자들 스스로 이런 비윤리적인 행동을 되돌아보자는 반성의 목소리다. 윌리엄 블랙 교수는 “1980년대 미국 대출은행(S&L) 문제는 물론 이번 금융위기도 근본적으로 부정한 행위에 기인한다”며 “경제 상황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이 이들의 부정한 행위를 감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다른 연사로 나선 알페로비츠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는 “제도적인 통제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금융섹터가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금융 위기도 초래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금융 부문이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경제학자들이 금융 부문 부가가치를 영원히 만들 것처럼 포장하는 이론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블랙 교수는 “민주경제를 구현하기 위해, 진보하기 위해 정책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제도적인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제학자들 스스로의 윤리적 반성’이 올해 경제학계의 큰 흐름을 형성할 것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중국과 아시아 중심의 세계경제 재편 1월7일. 수십 개의 호텔 룸에서 오전 8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경제학세션이 열렸다. 주제도 미시, 거시, 금융, 산업, 노동 등 모든 경제학 분야를 망라한다. 어떤 세션은 대중적인 관심을 유발하기도 하고 어떤 세션은 수학적·통계학적 방법론에 치중해 경제학 발표장인지 수학 발표장인지 헷갈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만큼 현대 경제학은 다양하고 다원화돼 있다.
눈길이 가는 곳은 단연 올해 세계경제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발표하는 세션이다. 2008년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과 2009년 이후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유럽에 대해 미국 경제학자들은 논문을 쏟아냈다. 이들 세션에서는 의자가 부족해 청중들이 바닥에 앉아 경청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미국·유럽 경제에 대한 학자들의 전망은 아직도 암울한 편이다. 비관적인 현실에 대한 전망과 그 안에서 희망 섞인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학자들이 올해 보여준 모습이다.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미국 경제가 다시 성장하고 있지만 노동시장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미국도 과거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장기불황에 빠진 것으로 생각된다”고 전망했다.
유럽도 비관적이긴 마찬가지다. 로버트 구트먼 호프스트라대 교수는 “유럽 경제는 향후 불황심화로 공동경제 붕괴, 일본과 같은 장기불황, 경제위기 극복, 3가지 시나리오가 예상된다”며 “이중 두 번째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전망했다. 반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대해서는 다소 낙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데일 조건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아시아 신흥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향후 10년 내 서방 선진7개국(G7)을 능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G7이 차지하는 비중은 35%, 아시아 신흥시장은 20%인데 이 비중이 뒤바뀔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는 이어 향후 10년 내 중국이 미국을 앞지르고 인도는 일본을 능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 경제 지도가 중국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 미국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는 셈이다.
사실 경제학자들의 역할은 단순히 미래를 점치는 것은 아니다. 우울한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이 같은 비관론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정책대안을 내놓는 것도 경제학자의 역할이다. 미국의 경제학자들은 이 같은 비관론과 함께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더 친기업적인 정책을 수행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저축을 낮추고 소비를 늘릴 것을, 미국에 대해서는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릴 것을 주문했다.
경제학 박사들도 취업시장은 한파역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과 미국 경제석학들이 1월8일 미국 덴버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초청 오찬간담회에서 미국 경제 전망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왼쪽 첫째는 2009년 수상자 올리버 윌리엄슨 UC버클리 교수, 왼쪽 다섯째는 2010년 수상자인 데일 모텐슨 노스웨스턴대 교수.
피터 키넌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달러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며 “국제통화기금(IMF)이 고안한 국제통화인 특별인출권(SDR)을 보완해 기축통화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유럽연합(EU) 가입국이 줄어들면서 유로화의 지위도 흔들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이먼 존슨 메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금융위기 이후 미국 우위 시대는 끝났다”며 “향후 20년 안에 중국의 위안화가 세계 기축통화로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울한 미래 경제전망과 정책 대안을 찾는 것이 주된 세션 내용이다.
8일 열린 또 하나의 볼거리는 노벨경제학 수상자의 오찬행사다. 올해는 2009년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 인디애나대 교수와 올리버 윌리엄슨 UC버클리대 교수를 위한 자리가 열렸다. 연단 위쪽에 역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위치하고 그들을 보기 위해 대략 500명이 넘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했다.
미국 경제학계의 태두인 루카스를 비롯해 2010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데일 모텐슨 노스웨스턴대 교수 등 미국경제학계의 석학이 대부분 참석했다.
세계 경제학의 거두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전미경제학회가 주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전미경제학회는 미국 경제학 박사들의 인력시장으로도 활용된다. 미국 각지에 있는 대학은 물론 각종 연구소, 국제기구 등 경제학 박사급 연구인력이 필요한 기관은 전미경제학회 기간 중 구직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를 일제히 실시한다. 특히 올해 처음으로 취업시장에 나서는 박사과정 졸업생들에게는 이 기간에 실시하는 인터뷰가 직업을 갖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다. 대략 한 사람당 10여 개 이상의 인터뷰 일정이 학회기간 중 잡혀 있다. 동시다발적으로 인터뷰가 진행된다. 호텔방은 물론, 로비, 커피숍 등 세션이 열리지 않는 주변 모든 장소에서 2~3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한 박사과정 졸업생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학 박사들의 취업시장이 얼어붙었다”며 “올해는 조금 풀리는 것 같은데 여전히 취업은 바늘구멍”이라고 말했다.
금융위기는 최고급 두뇌인 경제학 박사들에게 취업 한파를 가져왔다. 취업난이 풀리길 바라는 마음은 어느 구직자와 마찬가지였다. 세션장에서의 열띤 토론은 물론 세션 장 밖에서의 구직 인터뷰 등으로 학회 기간 중 덴버 다운타운은 북새통을 이룬다.
1월9일. 학회 마지막 날이다. 학회 참석자들이 덴버를 본격적으로 빠져나간다. 논문 발표자, 구직희망자, 단순 관람객 등 학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악수를 나누고 내년을 기약한다. 내년 학회는 시카고에서 열린다. 올림픽 폐막 때처럼 “시카고서 또 만나자”는 말들이 공식인사다.
취재를 마치고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덴버는 미국에서 스키 관광으로 워낙 유명한 도시라 눈이 많다더니 이를 실감케 한다. 비행기에 올랐더니 활주로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비행기가 장시간 공항을 배회한다. 옆자리의 승객이 “이 비행기는 날지 않고 굴러가는 모양”이라며 웃는다. 한참을 배회하다 마침내 비행기가 날았다. 비행기가 좀처럼 뜨지 못하는 것이 마치 경제학이 첩첩이 쌓인 경제문제를 풀지 못하고 고민하는 모습 같았다. 결국 멋지게 날아 오른 비행기처럼 경제학이 앞으로 각종 문제를 명쾌하게 풀어내길 기원해본다.
[덴버=노영우 / 매일경제 기자 rhoyw@mk.co.kr 사진 매경DB]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호(2011년 0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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