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트럼피즘 딛고 다시 힘받는 글로벌 민족주의

    입력 : 2025.07.14 15:47:06

  • 지난 6월 1일 치러진 폴란드 대선 결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지지를 받은 보수 성향 카롤 나브로츠키 무소속 후보가 당선됐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 6월 1일 치러진 폴란드 대선 결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지지를 받은 보수 성향 카롤 나브로츠키 무소속 후보가 당선됐다. <사진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며 국제 무대에 다시 등장한 이후 세계 각국 선거가 ‘트럼프’ 영향에 좌우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무차별적인 관세 폭탄 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직후 있었던 각국 선거에서 반트럼프 효과가 힘을 얻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트럼프발 글로벌 우파 흐름이 득세를 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진영이 당초 기대했던 것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세계 이념 지형도는 ‘또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 강화’현상을 뚜렷하게 그리고 있다.

    반트럼피즘이 승패 좌우했지만…

    지난 5월 19일 동유럽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에서 친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 후보가 극우 민족주의자인 제1야당 결속동맹(AUR) 대표인 제오르제 시미온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치른 후에 당선을 확정됐는데 이번 루마니아 선거는 유럽에서 트럼프식 민족주의의 부상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로 관심을 받아왔다. 루마니아 유권자들의 관심도 커 결선투표의 투표율은 2000년 대선 1차투표 이후 25년 만에 가장 높은 64%를 기록했다.

    수학자 출신인 단 대통령은 은 부동산 불법 개발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이번 대선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단은 루마니아의 나토 가입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루마니아의 자체 안보의 핵심으로 보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계속 제공하겠다고 내세운 바 있다.

    이번 대선과정에서 러시아의 개입 의혹이 불거진 것도 그의 당선에 한몫했다. 결선 투표 상대였던 시미온 후보는 1차 투표에서 단 후보에게 배에 가까운 격차로 1위를 차지했지만 역전패 당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 제공에 반대하고 유럽연합(EU)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이념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차용해 ‘루마니아를 다시 위대하게’란 선거전략을 내세웠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책사로 알려진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등 핵심 ‘마가’ 인사들로부터 지지를 모으기도 했다.

    앞서 치러진 알바니아 총선에서도 좌파 성향의 집권 여당이 압승을 거뒀다. 현 에디 라마 총리는 4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알바니아가 1990년대 초 공산 체제에서 민주적 정치 체제로 전환한 이래 첫 4연임 총리로 이름을 올렸다. 라마 총리는 2030년까지 EU 가입을 달성하겠다는 공약을 앞세워 4년 전 총선(74석)보다 의석수를 늘렸다. 알바니아의 우파 정당은 전직 트럼프 대통령 선거 캠프 고문인 크리스 라치비타도 고용했지만, 결과적으로 패배를 맛봤다. 지난 5월 3일 치러진 호주 총선에서도 트럼프의 영향력이 예상보다 못미쳤다. 앤서니 알버니지 총리가 이끄는 중도좌파 성향의 노동당이 정권교체 전망을 뒤집고 재집권에 성공했다. 노동당은 지난 2월까지만 해도 자유당·국민당 연합에 지지율이 꾸준히 뒤처졌으나, 불과 두 달여 만에 이를 뒤집어 극적인 승리를 얻어냈다. 노동당은 특히 단독으로 각종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킬 수 있는 과반 의석수를 확보해 국정 안정성도 확보했다. 알버니지 총리의 상대 후보였던 피터 더튼 자유당 대표는 선거 과정에서 반이민, 대규모 정부 구조조정 등 트럼프 대통령을 벤치마킹하는 전략을 내세워 초반 인기 몰이를 했지만 기세를 이어가진 못했다. 피터 대표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와 같은 ‘호주를 다시 위대하게’(MAGA·Make Australia Great Again)까지 사용했다.

    트럼프 정권 재출범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글로벌 선거인 캐나다 총선에서도 반 트럼프 영향이 선거를 뒤집었다. 쥐스탱 트뤼도 당시 총리의 경제 실정으로 민심이반이 가속화되면서 애초 승리가 희박했던 자유당이지만 극적으로 뒤집었다. 당시 후보로 나섰던 마크 카니 총리는 경제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부각하며 미국에 맞서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카니 총리는 캐나다 재무부를 거쳐 중앙은행 총재에 오른 경제 전문가다.

    자유당이 반전에 성공하게 된 계기는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드라이브를 건 관세 정책의 첫 타깃이 되면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캐나다를 압박했고, 심지어는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州)로 만들겠다는 발언까지 해댔다. 이 같은 트럼프에 캐나다인들은 분노했고, 친 트럼프 성향의 앞서나가던 보수당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트럼프’로 불리던 포일리에브르 보수당 대표는 선거 패배는 물론, 20년간 지켜온 자신의 지역구에서도 자유당 후보에게 패배해 의원직을 잃었다.

    유럽서 분위기 반전, 우익 정상 더 늘어날 가능성도 제기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의 국제 사회 재등장 직후 ’트럼프 선거전략 따라하기‘를 했던 각국 후보들이 줄줄이 낙선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과격한 관세 정책이 한몫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각국의 사정을 생각지 않는 미국 우선주의에 토대를 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에 각국은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고, 국제 사회를 지탱해왔던 미국이 오히려 혼란을 부추긴다는 인식이 커졌다. 앞서 언급한 캐나다의 선거결과가 대표적이다. 영토를 탐내는 미국의 행보는 기존에 알던 세계 초강대국이 아니었다.

    하지만 트럼프 발 관세 정책에 각국이 출구를 찾고, 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상황이 다소 변하는 기류가 엿보인다. 일부 국가에서 트럼피즘이 작동하며 자국 우선주의가 힘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반트럼프 정서가 강한 EU에서 6번째로 큰 경제 대국인 폴란드에서 민족주의 우파 성향의 야권 후보인인 무소속 카롤 나브로츠키(42)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폴란드 대선은 EU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해온 여당과 폴란드의 국익을 우선으로 보는 민족주의 우파 야당 법과정의당(PiS)의 맞대결 양상으로 치러졌다.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출마 당시 무소속이었지만 법과정의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보수 역사학자인 나브로츠키 대통령의 대선 선거 전략은 폴란드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자국 헌법이 유럽법에 우선한다고 했고, 유럽 난민협정에서도 탈퇴해야 한다고 선거 기간 내내 주장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을 적극 활용했다. 트럼프와 적극 협력해 안보 불안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히는가 하면, 아예 미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기도의 날 행사에 찾아가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사진을 찍고 이를 선거전에 대대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트럼프측도 나브로츠키를 측면에서 지원했음은 물론이다. 대표적인 것인 결선 투표를 앞두고 미 마가(MAGA)운동의 본거지격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를 폴란드에서 최초로 연 것이다. CPAC이 나선 것은 루마니아, 캐나다, 호주 등 앞선 선거에서 친 트럼프를 내세운 후보들이 낙선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마가 측은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이후 트럼피즘의 글로벌 확산을 꾀해 왔다. 지난 2월 J.D.밴스 미 부통령이 뮌헨 안보회의에 참가해 유럽 정상들 앞에서 극우 정치세력을 공개적으로 옹호할 때만 해도 이에 대한 의심을 하는 분위기가 없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각국 선거에서 트럼프를 표방했던 정치세력이 연패를 하자,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판단하에 마가 측은 폴란드 선거에 사실상 ‘올인’을 했다. 폴란드 CPAC 회의에서 크리스티 놈 미 국토안보부 장관이 등장한 것이 단적인 예다. 그는 연설에서 친 EU성향의 트샤스코프스키 후보에 대해 “엉망진창인 지도자”라고 비난하며 “나브로츠키가 당선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AFP는 “나브로츠키 후보가 승리함에 따라 그간 폴란드 정부가 추진해온 진보적 정책들이 대부분 중단되고, EU와 폴란드의 관계도 껄끄러워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포르투칼 총선에서는 극우 성향 정치 세력인 셰가가 비록 집권에는 실패했지만, 돌풍을 일으키며 창당 6년 만에 제 1야당이 됐다. AFP에 따르면 지난 5월 19일 열린 포르투갈 총선에서 루이스 몬테네그루 총리의 사회민주당(PSD)이 이끄는 중도우파 민주동맹(AD)이 91석을 확보해 1당이 됐고, 셰가는 60석을 얻어 원내 2번째로 큰 정당이 됐다. 다만 AD는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연정으로 새 정권을 꾸렸다.

    포르투갈 제1야당이 된 극우 성향 정당 셰가의 대표 안드레 벤투라 의원. <사진 연합뉴스>
    포르투갈 제1야당이 된 극우 성향 정당 셰가의 대표 안드레 벤투라 의원. <사진 연합뉴스>

    2019년 축구 해설가 출신 안드레 벤투라가 창당한 셰가는 신규 이민자의 복지 혜택 접근 제한, 범죄 및 연금 인상과 연계된 이민에 대한 엄격한 통제, 공권력 강화 등의 공약을 내세웠다. 소아성애자에게는 화학적 거세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번 포르투갈 총선 결과는 수십 년간의 양당 체제를 뒤집는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분석했다.

    벤투라 대표는 총선 결과가 나온 이후 ”큰 승리“라며 “포르투갈 정치 시스템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했다. 이 같은 흐름을 두고 유럽 현지에서는 EU 27개 회원국에서 우익 세력 정상이 8명까지 늘어날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제기되고 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향후 2년 반 동안 유럽 각국에서는 정권의 향방을 결정짓는 선거가 열린다”면서 “마가 영향으로 메가(MEGA·Make Europe Great Again, 유럽을 다시 위대하게)가 힘을 얻고 있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각국마다 우익세력들이 이번 흐름을 타고 정권 창출을 해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오는 10월 조기 총선이 치러진다. 극우 성향 자유당(PVV)이 연정내 파트너 정당들이 이민 감축 등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자 연정탈퇴를 선언했다.

    [문수인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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