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훈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부활하는 일본 코고기업(古豪企業) 기린·후지필름·재팬 엔진 기술력으로 역전타

    입력 : 2024.08.22 16:53:01

  • 1991년 일본 거품경제가 붕괴한 이후 상당 기간 일본 경제는 침체를 이어왔다. ‘잃어버린 10년’이 20년이 됐고, 30년을 넘어 이제는 40년으로도 불린다.

    일본 정부가 만성적인 ‘디플레이션(물가 인하와 경기 침체가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도했지만 일본 경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부 변화가 생긴 것은 ‘아베노믹스’의 영향이다.

    아베노믹스에도 큰 효과를 못 보던 일본 경제는 코로나를 거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일본은행이 주목할 정도로 최근 3년간 연 2~3%의 인플레이션이 꾸준히 진행된 것이다. 만성 디플레이션이던 일본 경제에 인플레이션이라는 용어는 반가울 정도다.

    올해 성장률이 다시 마이너스를 보이고 있지만 일본 정부가 보는 전망은 나쁘지 않다. 특히 일본 증시 주요 주가지수인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꾸준한 인플레이션에 소비 지표 또한 호조를 보여 낙관적인 분위기가 많다.

    이러한 일본 경제 부활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이 기업이다. 일본 핵심 산업인 자동차를 필두로 반도체와 정보기술(IT) 기업의 기여가 크다. 여기에 못지않은 게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전통 기업이다. 기존 사업에 끊임없이 변화를 주면서 변신해 온 기업들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일본어로 ‘코고(古豪)’는 베테랑을 의미한다. 코고기업이라고 하면 역사가 100년이 넘는 전통 제조 베테랑 기업을 얘기한다. 여기에는 일본 원조 4대 재벌로 불리는 미쓰비시·미쓰이·스미토모·야스다 계열인 곳도 있지만, 1~2가지 핵심 기술 하나로 100년을 갈고 닦은 곳도 만만치 않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도 최근 이러한 코고기업을 집중 조망했다. 닛케이에 따르면 일본 주가지수 중 하나인 토픽스 100(TOPIX 100)을 구성하는 100개 기업 중에서 창업 100년 이상인 코고기업의 시가총액은 지난 5월 말 기준으로 최근 10년 새 157조엔이 늘었다. 증가율은 2.6배로 토픽스 100 전체 기업의 증가율인 2.3배를 웃돌았다.

    기업 지표도 탄탄하다. 2023년도(2023년 4월~2024년3월)까지 지난 10년간 코고기업의 순이익은 2.5배, 매출액은 1.5배 늘었다. 토픽스 100 기업의 순이익 증가율은 2배, 매출액은 1.4배로 모두 코고기업이 앞선다.

    이런 기업 중 하나가 기린홀딩스다. 우리에게 맥주 브랜드로 친숙한 기린홀딩스는 1907년 미쓰비시 그룹의 일원으로 시작됐다. 기린은 지난 6월 화장품·건강식품 제조회사인 판클을 2200억엔에 완전 자회사로 인수하기로 해 재계에서 화제가 됐다.

    최근 일본은 젊은 층이 건강을 생각해 술 소비를 줄이는 가운데 건강식품 시장은 꾸준히 확대 되고 있다. 기린은 판클 인수를 통해 주류 중심의 사업 방향타를 건강식품으로 돌리겠다는 각오다.

    우리에게 필름회사로 잘 알려진 후지필름홀딩스(HD)는 디지털카메라 사업에서 과감히 철수하고 디스플레이·의료용 소재 사업을 강화했다. 여전히 필름 등 카메라와 관련된 부분이 사업군에 있지만 이제는 소재 산업이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TDK는 시대의 변화에 잘 적응해 지금도 전자 부품 대기업의 지위를 유지하는 곳으로 꼽힌다. TDK의 주력산업은 1980년대는 테이프, 2000년대는 하드디스크용 부품, 2010년대부터는 리튬이온전지다. 카세트에서 PC로, 다시 스마트폰으로 바뀌는 산업의 흐름을 앞서 따라간 결과다.

    한때 TDK에서 만들었던 카세트 테이프
    한때 TDK에서 만들었던 카세트 테이프

    핵심 기술 지키며 다각화

    일본 선박 엔진 제조업체인 재팬 엔진 코퍼레이션은 지난해 주가가 1년 만에 5.8배나 뛰어 시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재팬 엔진은 1910년 창업한 고베 엔진과 1884년 세워진 미쓰비시중공업의 선박 부문이 2017년 합병해 세워진 전통적인 코고기업으로 꼽힌다. 지난해 주가 폭등의 배경에는 암모니아를 연료로 하는 대형 선박의 탈탄소 엔진 시험 운전에 세계 최초로 성공한것이 있다. 해양 운송 수단은 육상이나 항공에 비해 탈탄소가 늦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암모니아만으로 엔진 가동이 가능해진다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제로(0)로 만들 수 있다. 사실상 꿈의 기술인 것이다.

    재팬 엔진에서 개발한 암모니아 선박 엔진
    재팬 엔진에서 개발한 암모니아 선박 엔진

    문제는 현재 선박의 주요 연료인 중유와 비교할 때 암모니아는 절반 수준으로 잘 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경우 정상적인 엔진 가동이 어려운데, 재팬 엔진은 연료 분사 기술을 통해 이를 해결했다. 5년가량의 순이익을 연구·개발(R&D) 비용으로 쏟아부으면서 재팬 엔진은 회사의 미래를 만들 기술을 완성한 것이다.

    조선업에서 세계를 이끄는 한국과 중국은 아직 암모니아 엔진 기술이 없다. 재팬 엔진은 내년에 암모니아 엔진을 탑재한 수송선을 취항한다.

    우리에게 ‘유니(Uni)’라는 브랜드로 유명한 미쓰비시 연필의 역사도 137년에 달한다. 일본 시장과 일부 아시아 시장에만 주력했던 미쓰비시 연필은 해외 시장 개척을 통해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만들어 낸 케이스다.

    코로나 사태 때 문구·사무용품 시장이 크게 침체하자 미쓰비시 연필은 2022년 해외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특히 미국과 유럽 시장 진출을 통해 이 해에 처음으로 해외 매출이 국내 매출을 앞서게 됐다.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가격도 비싸게 받을 수 있게 됐다. 미국·유럽에서 인기 있는 수성 볼펜 가격은 3개에 약 8달러로 일본 내수 판매 가격보다 50%나 비싸다. 올해 초 미쓰비시 연필은 독일 유명 필기구 제조업체인 라미(Lamy) 인수에도 성공했다. 라미는 1930년 요제프 라미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만년필 공장을 설립한 이래 3대에 걸쳐 가족 경영이 이뤄진 전통 있는 기업이다.

    미쓰비시 연필은 브랜드 명칭과 독일 내 생산시설을 그대로 유지할 계획이다. ‘메이드 인 저머니(독일산)’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의지다.

    5년 만의 최대 IPO 일궈낸 고쿠사이

    과거 히타치 계열이었던 고쿠사이 일렉트릭(Kokusai Electric)은 지난해 2018년 이후 일본 내 최대 규모의 기업공개(IPO)로 관심을 끌었다.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인 이 회사는 2017년 히타치에서 분사돼 미국 사모펀드인 KKR로 소유가 바뀌었다. KKR이 당시 22억달러에 고쿠사이를 인수했다.

    대기업 계열인 히타치에서 분리됐을 때 고쿠사이는 동요했다. 내부 직원들의 이탈도 많았다.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본 기술의 고도화에 주력했고 결국에는 홈런을 쳤다는 평가다.

    고쿠사이의 주력 무기는 반도체 증착장비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인텔 등 주요 업체가 고객이고 경쟁사가 세계 5위 반도체 장비업체 중 하나인 도쿄일렉트론이다. 고쿠사이의 현재 시가총액은 1조엔이 넘는다. 상장 폐지했을 때의 히타치 시절과 비교하면 약 3배가 됐다.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가 인수가로 걸었던 3800억엔보다도 높다.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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