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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만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 바이든의 ‘넥스트 페이지’는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입력 : 2021.09.29 14:5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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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미국을 이끌어왔던 외교정책 페이지를 넘기면서, 과거 실수로부터 배워야 한다. 2001년의 위협이 아니라 2021년과 내일의 새로운 위협에서 미국을 보호하겠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 철군한 다음날인 지난 8월 31일 대국민연설에서 대외전략 궤도를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더 이상 다른 나라 재건을 위한 군사작전에 나서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또 미국 국익에 맞지 않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세계의 경찰로서 분쟁지역에 파병하던 미국의 역할을 내려놓겠다는 뜻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시선을 돌려 중국, 러시아, 사이버공격, 핵 확산 등 현안에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구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구체화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9·11 20주기를 보내면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거론하며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없다고 믿는 독재자들이 많이 있다”고 표현했다. 이어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과의 경쟁국가로 중국과 러시아를, 미국의 적성국을 북한과 이란이라고 못 박았다. 해외주둔 미군 병력들도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집중 재배치될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시진핑 소통 채널 개통… “경쟁이 충돌로 번지지 않게” 바이든 대통령은 올해 1월 취임 이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책들을 일제히 뒤집고 있지만 강경한 대중국정책만큼은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중국을 향해 냉·온탕식 대외정책을 펼쳤다면, 바이든 대통령은 동맹국들과 스크럼을 짜고 중국 인권문제부터 차근차근 압박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 신장지역 인권탄압과 강제노동 문제를 공개 비판하면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태양광 재료인 폴리실리콘 수입을 금지했다. 남중국해와 대만해협 항행의 자유를 줄기차게 요구하며 대만과의 접촉 빈도도 높여가고 있다. 홍콩의 민주주의 열망을 억압하는 중국의 국가보안법도 지적한다. 5G와 인공지능 같은 첨단 기술 유출 문제와 함께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와 사이버테러 지원 문제도 제기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월 1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9월 시진핑 중국 주석과의 전화통화에서 양국의 치열한 경쟁이 충돌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책임을 논의했다. 서로 대립하는 현장에서 의도하지 않은 군사적인 분쟁을 방지하려는 조치다. 미중 정상 통화는 바이든 대통령 취임과 맞물린 지난 2월 이후 7개월 만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시 주석과의 통화에서 인도태평양지역 평화를 비롯한 여러 현안에 대해 설명했다. 서로 협력할 점과 경쟁할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지만, 결과적으로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는 정도의 평행선을 그었다. 백악관은 미중 최고위급 소통창구를 열어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이 당시 전화통화에서 시진핑 주석에게 첫 대면 정상회담을 제안했다가 거부당했다는 보도가 뒤늦게 나오기도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바이든 대통령이 대면회담을 제의했고, 시 주석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미국이 중국을 향해 덜 거친 어조를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고 전했다. 시 주석 입장에서는 미중 정상회담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적은 데다 코로나19 재확산까지 감안했을 때, 당장에 외부활동에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시 주석은 내년 가을 세 번째 총서기 연임을 준비하고 있다.
▶美·우크라이나 밀착, 러시아 에너지 위협 견제 아프간 전쟁이 끝나고 미국 백악관을 찾은 첫 외국 정상은 공교롭게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2014년 군사훈련을 가장한 러시아에 크림반도를 강제로 빼앗기고 나서 러시아와 대치 중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은 러시아의 침략에 직면한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위해 굳건히 헌신하고 있다”고 강조했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은 우리의 전략적 파트너이자 주권과 영토 보전의 확고한 지지자”라고 답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던 기존 안보 지원에 더해 6000만달러에 이르는 안보 지원 패키지를 제공하기로 했다. 아프간에서 발을 뺀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지렛대로 해서 러시아를 압박하는 모양새다.
우크라이나는 독일과 러시아를 직접 연결하는 해저 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2’ 완공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통과해 유럽으로 지나가던 기존 노르트스트림에 대안이 생겼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가스관을 틀어막게 되면 우크라이나에 에너지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경제적으로 봐도 수십억달러의 가스관 통행료 수입이 사라질 수 있다. 이에 따라 미국도 우크라이나 편에 서서 독일을 통해 노르트스트림2가 에너지안보 위협 도구로 활용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北 핵시설 가동·미사일 발사에 외교적 관여 갈림길 국제원자력기구(IAEA)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7월부터 영변 핵시설 원자로를 재가동하면서 핵무기 개발 의지를 내비쳤다. 9월에는 순항미사일과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면서 무력시위에 나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올해는 식량난 등 내부 경제 문제와 코로나19 방역에 집중하느라 대외활동을 자제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는 행보이다. 미국 제재를 뚫기 위한 북한의 연이은 도발로 인해 한반도 정세는 얼어붙고 있다. 바이든 정부에서도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미국은 심각한 위협으로 판단하면서도 제재와 압박보다는 지속적으로 대화 의지를 타진하는 상황이다.
앞서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북한을 향해 조건 없는 대화를 제안한 바 있다. 그는 서울, 도쿄, 워싱턴DC를 오가면서 대북 인도적 지원을 약속했고 남북 협력에도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인도적 지원 분야로는 감염병 방역, 보건, 식수, 위생 등이 다뤄질 수 있다. 이처럼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유화 메시지를 던지면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국이 본토를 위협하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를 사실상 ‘레드라인’으로 보고 그 전까지 대북상황 관리 모드를 유지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아프간 사태를 완전히 수습하지 않아 미국 내부의 압박이 거센 상황에서 중국과의 경쟁에도 집중하려면 북한 문제를 가급적 후순위로 미뤄놓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이다.
▶이란 우라늄 농축도 60%로 높여… 임시 핵사찰 재개 합의 이란은 중동에서 미국과 가장 적대적으로 대치하는 국가이다. 반면 이란은 중국과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삼각구도에서 미국이 이란을 제어해야만 중국의 중동 진출 야심을 막을 수 있다.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지난 2015년 7월 서방국들과 함께 이란과 핵 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에 전격 서명했다. 이란이 핵 활동을 제한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를 받는 대신에 유엔의 이란제재를 종료해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당시 핵 합의 주역이던 제이크 설리번, 웬디 셔먼이 각각 바이든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 국무부 부장관을 역임하고 있다. 이란 전문가들이 바이든 핵심 외교안보라인에 포진해 있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18년 일방적으로 파기한 핵 합의에 대한 복원을 핵심적인 중동정책으로 설정하고 있다. 9월에는 임시적인 핵사찰도 이끌어냈다. 미국 입장에서는 임시방편이지만 일단 외교적인 시간을 벌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란은 우라늄 농축도를 단계적으로 높여 60%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등 여전히 핵 확산 움직임을 가져가고 있다.
[강계만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3호 (2021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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