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팬데믹 大위기] Part Ⅱ Global 워싱턴 | 공포에 빠진 美… 트럼프 재선에 복병 “4월쯤 종식될 것→7~8월까지 위기” 말 바꿔
입력 : 2020.03.30 18:04:40
-
“날씨가 따뜻해지는 4월이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사라질 것이다.”
얼핏 사이비 교주의 실패한 예언같이 들리는 이 말을 한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지난 2월 1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주지사 연례협의 연설 중 이렇게 자신했다. 중국에 대해서도 “그들은 매우 잘 대처하고 있다”고 추켜세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2월부터 중국인 입국금지를 단행해놓고는 저 멀리 태평양 너머의 일로 여겼다.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로 첫 기자회견을 연 것은 2월 26일이었다. 인도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에어포스원 안에서 코로나19가 세계적 유행병이 될 가능성을 보고받았다고 한다. 그때도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매우 잘 준비돼 있다”며 “정부의 선제적 조치 덕분에 미국인의 위험성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자신했다. 미국 내 감염이 확산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매우 작은 규모에 그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유세장에선 코로나19가 ‘팬데믹(대유행병)’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언론을 향해 “새로운 음모이자 사기”라고 비난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3월 첫째 주말에 자신의 리조트인 플로리다주 마라라고에 브라질 대통령을 초청했는데 일행 중에 감염자가 속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아들 도널드 주니어도 여자친구의 성대한 생일파티를 마라라고에서 가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월 18일 백악관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태스크포스(TF) 기자회견에서 취재진 중 질문자를 지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3월 11일 유럽 26개국에 대한 봉쇄 조치를 단행했고, 이틀 뒤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어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규모가 큰 1조달러 경기부양 패키지를 의회에 제출했고 10인 이상의 회합을 자제하라는 ‘대통령 가이드라인’도 내놨다.
3월 18일엔 스스로를 ‘전시(戰時·Wartime)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민간 부문의 물자공급 통제에 나설 뜻을 밝혔다. 또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신에 ‘차이니스 바이러스’라는 표현을 쓰면서 중국 책임론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오락가락 갈지자 행보를 하는 동안 미국인들은 공포에 휩싸여 스스로 살 길을 찾았다. 생수, 휴지, 시리얼, 스파게티면 등은 마트에 공급되는 즉시 동이 나고 있다. 미국 내 대도시 학교는 대부분 4월 초까지 휴교령을 내렸고, 재택근무가 일상이 됐다. 하지만 일용직 근로자나 영세 자영업자들은 당장 생계 위협에 직면했다.
연방준비제도(Fed) 2016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중위 저축계좌 잔고는 4500달러(550만원)에 불과하다. 특히 일용직과 파트타임 노동자가 주를 이루는 소득 하위 20%의 평균 잔고는 겨우 600달러다. 트럼프 정부가 세금환급도 아닌 생활자금 현금 지급을 추진한 배경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초기 오판 배경을 두고는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첫째, 11월 대선을 지나치게 의식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미국 경제가 집권기간 예상 밖의 호조를 보인 것을 최대 치적으로 내세웠다. 공포가 확산돼 주식시장이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코로나19를 독감과 다를 게 없다고 말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는 얘기다. 둘째, 전문가를 경시하고 자신의 직관적 판단을 과신하는 성격 탓이다. 특히나 백악관 내에는 직언을 할 수 있는 인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트럼프 대통령 눈치를 보는 사람들만 즐비하다. 이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이 초기에 잘못된 메시지를 내놓는 것을 누구도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셋째, 위험성을 알았다고 해도 코로나19의 빠른 확산에 대처할 수 없었다는 시각이다. 3월 초까지 미국 내 코로나19 진단 건수는 공식적으로 500건에도 못 미쳤다. 한국에서 이미 9만 건 이상 검사가 진행된 시점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보유하고 있다던 7만5000개의 진단 키트 중 상당수에 문제가 있었다는 내부 폭로가 나왔으나 무시됐다. 진단 조건도 초기에 너무 까다롭게 설정했다. 위험국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도 의사 소견이 있으면 무료 검사가 가능한 한국과 달리 미국은 매우 엄격한 조건을 만들어놓고 매우 제한적으로 검사를 허용했다. 진단 비용도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 의료보험이 없는 국민이 2800만 명에 달하고 엄청난 의료비 탓에 병원에 갈 생각조차 못하는 현실이야 잘 알려진 얘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생필품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한 월마트의 화장지 및 세정제 진열대가 텅 비어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국방물자생산법까지 동원해 방역장비 생산 확대에 나섰다. 국방부도 전시에 대비해 비축해뒀던 500만 개의 마스크와 2000개의 인공호흡기를 보건당국에 제공했다. 미 보건당국은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이 18개월 이상 지속될 가능성까지 백악관에 제시했다.
집권 후 경제든 외교든 지금과 같은 위기를 상상하지 못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원치 않던 리더십 시험대에 올랐다. 그가 어떤 리더십을 보여주는지에 따라 11월 대선 결과도 좌우될 것이다. 미국은 진짜 전쟁의 경우 대통령을 바꾸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멀리 1812년 영국과 전쟁 당시 제임스 메디슨 대통령의 재선으로 시작해 에이브러햄 링컨(남북전쟁), 프랭클린 루즈벨트(2차 세계대전), 린든 존슨(베트남전), 조지 W 부시(이라크전) 등이 그랬다.
코로나19 사태는 진짜 전쟁은 아니지만 미국인들이 느끼는 공포는 그 이상인 것 같다. 만약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실업률이 치솟고 기업들이 줄도산하면 새로운 통합의 리더십을 바라는 여론이 커질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시 대통령’을 자임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순탄해 보이던 재선가도에 만만치 않은 복병이 나타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신헌철 매일경제 워싱턴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5호 (2020년 4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