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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 앞둔 정지선 회장의 뚝심경영
입력 : 2011.09.15 16: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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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조용한 유통강자 또 다른 승부수 ◆
‘2020년 매출 20조원, 경상이익 2조원, 현금성 자산 8조원’
지난해 현대백화점그룹이 ‘비전 2020’을 선포하며 밝힌 목표다. 비전에 제시하는 수치는 다소 허황될 정도로 높여 잡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현대백화점그룹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 가능한 수준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 생각이다.
송선재 하나대투증권 애널리스트는 “50%의 낮은 부채비율을 기반으로 2020년까지 총 3조3000억원을 투자해 현재 12개인 점포수를 20개 이상으로 늘릴 계획인데 이를 통해 백화점 부문 총매출액이 2010년 4조5000억원에서 2015년 7조4000억원, 2020년 10조6000억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홈쇼핑과 SO 등이 속해있는 미디어 사업부문 매출액은 현재 1조9000억원선에서 2020년에는 4조8000억원까지 늘린다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지난해 기존 현대H&S, 현대푸드시스템, 현대F&G를 통합해 현대그린푸드를 출범시킨 식품사업 부문 목표는 현재 8000억원에서 2020년에는 2조6000억원이다. 더불어 2015년 4조원 가까이 될 것으로 보이는 현금성 자산을 바탕으로 대규모 인수합병(M&A)에 나서 미래 신성장동력을 적극 발굴한다는 스토리도 덧붙여진다. 이 계산대로만 가면 2020년 20조원 매출액이라는 계산이 ‘그림의 떡’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온다.
비전도 그렇지만 실제 현대백화점그룹의 성장세가 무섭다. 2003년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현대백화점그룹을 떠맡아 10년 가까이 키워온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의 공이 크다는 평가다. 2012년에 만 40세를 맞는 정지선 회장이 오랜 공언대로 과연 40세가 되면 자신을 드러내는 전략으로 선회할 것인가도 관심사다. 이래저래 유통업계를 넘어 재계 눈이 현대백화점그룹에 쏠려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을 규정하는 한마디는 ‘베일 속 조용한 행보’다. 외부에 잘 나서지 않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같은 백화점 업계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롯데쇼핑과 신세계백화점의 2세 경영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언론에 화려하게 이름을 수놓을 때도 정지선 회장은 늘 뒤쪽 한켠에 멀찍이 물러서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에 밀리지 않을 것 같은 정지선 회장이 두 경쟁자와 달리 늘 ‘베일’ 로 자신을 가리는 것은 두 경쟁자에 비해 너무 어린 나이에 기업을 총괄하는 자리에 오른 때문이다.
72년생인 정지선 회장은 2003년 1월, 32세 때 그룹 총괄부회장이 됐다. 당시만 해도 30대 그룹 수준에서 가장 어린 나이였다. 총괄부회장에 올랐을 때 아버지인 정몽근 회장이 현대백화점 대표이사 회장으로 있기는 했지만, 정지선 총괄부회장이 아버지를 대신해 모든 일을 처리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젊어서 그룹을 책임지게 된 것도 부담스러운데 대외활동까지 활발하게 해 세인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는 생각에서 정지선 회장은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는 전략을 활용해왔다.
정 회장은 오래 전부터 “40세가 되면 활발하게 외부활동을 할 것”이라 밝혀왔다. 2012년은 정지선 회장이 공언해왔던 ‘활발한 외부활동을 하는 첫 해’다. 그러나 2012년이 되더라도 정 회장 행보에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다.
비노출전략에서 선회, 활발한 활동
A 애널리스트는 “솔직히 지금의 현대백화점 모습이 만들어진 게 정지선 회장의 경영능력 때문인지, 전문경영인 능력 때문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는 그룹을 대표하는 정지선 회장에게 공이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기업이 잘 되고 있는데 경영자가 어떤 행태를 보이던 밖에서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라며 “정지선 회장이 지금까지와 같은 비노출 전략을 굳이 바꿀 필요가 없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B 애널리스트는 또 다른 이유를 댄다.
“오너 경영자가 외부로 나오지 않으면 회사에 대한 불필요한 논쟁을 유발시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단점은 우리나라 회사들이 아직까지 상당부분 오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서 오너의 의지, 경영스타일 등이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는데 반해 오너지 나서지 않으면 이런 걸 알 수 없어 투자자들이 답답해하고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백화점은 워낙 실적이 괜찮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오너에게 앞으로 나오라는 요구를 할 필요가 없는 상태다.”
애널리스트들이 정지선 회장을 평가하는 첫 번째가 실적이라면 두 번째는 내실경영이다.
현대백화점 측은 신규출점도 새로운 영역 진출도 없어 신성장동력을 포기한 것으로 보였던 시기는 사실상 내실을 다지느라 상대적으로 조용해 보였던 시기라고 강조한다.
2003년 정지선 회장이 그룹 총괄 부회장이 되면서 명실상부 그룹을 이끌기 시작한 이후 현대백화점그룹은 총 8400억원의 부채를 갚으며 200%대이던 부채비율을 50% 이하로 낮췄다. 덕분에 40대 그룹 중 부채비율이 가장 낮은 그룹이 됐다. 동시에 영업이익을 꾸준히 사내에 유보해 현재 그룹의 현금성 자산이 1조원에 달한다.
할인점 우회 백화점 올인 결실 달라진 환경도 한 몫 했다. 한 때 ‘할인점 사업에 왜 뛰어들지 않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백화점에 올인한 것이 바른 전략이었다’는 쪽으로 평가가 달라졌다. 할인점이 한국 유통업의 정점에 위치했던 시절에는 할인점에 제 때 들어가지 못한 것이 엄청난 아킬레스건이었지만, 이후 할인점이 조금씩 하강곡선을 그리고 유통왕좌를 내줄 것이라 여겨졌던 백화점이 계속 건재하면서 백화점업에 올인한 현대백화점이 도리어 각광을 받는 재미있는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외부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정지선 회장이 유일하게 얼굴을 보이는 행사가 현대백화점의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이다. 할아버지(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이미지를 풍기듯 시무식을 마치자마자 리어카를 끌며 연탄을 배달하기도 했지만 그는 특히 ‘아동 사랑’에 주력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 백화점을 자주 이용하는 계층에게 백화점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마음은 있지만 방법을 몰라 소외 계층을 돕지 못할 뿐”이라는 게 정지선 회장 생각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의 사회공헌활동은 대부분 ‘소외 아동’에게 포커스가 맞춰져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의 ‘소외 어린이 사랑’ 활동은 특별하다.
아동사랑·헌혈경영 ‘이채’
현대백화점은 올해 이 숫자를 2만5000명으로 늘린다는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지난해 1만1000명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수치다. 현대백화점뿐 아니라 현대홈쇼핑 등 계열사까지 범위를 넓히고 연간 총 240회 이상 행사를 진행하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 캠페인을 통해 얻어지는 2만5000장의 헌혈증은 모두 ‘한국혈액암협회’에 기증돼 혈액암을 앓고 있는 어린이를 돕는 데 쓰일 예정이다.
헌혈 캠페인 지원 대상이 ‘혈액암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에 국한된 게 독특하다. 정 회장이 유독 소외 아동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가장 규모가 크면서도 사정이 심각한 복지 사각지대가 바로 차상위계층 소외 아동’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2006년 정몽근 명예회장과 정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현대백화점그룹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할 때 내건 ‘파랑새를 찾아, 희망을 찾아’ 슬로건도 정지선 회장이 직접 정했다. ‘파랑새’ ‘희망’ 모두 아동 복지를 염두에 두고 선택한 단어다.
지난 1월 정지선 회장이 동생 정교선 현대백화점그룹 사장과 함께 참여한 ‘연탄 배달’ 행사도 역시 소외 아동을 위한 활동이다. 이날 행사에서 연탄이 배달된 가정은 전부 ‘조손가정(부모 없는 아동이 조부모와 함께 사는 가정)’이었다.
현대백화점그룹사회복지재단 지원도 차상위계층 소외 아동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매년 33명의 순직 소방관 자녀에게 학자금을 주는가 하면, 방과후학교 수업을 듣고는 싶지만 돈이 없어 참가하지 못하는 차상위계층 학생 수를 각 학교별로 파악해 이들에게 직접 수강료를 지원해주는 식이다. 현대백화점이 후원하는 공부방도 33개에 달한다. 단순히 돈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문화센터 강사를 공부방에 파견해 공부방 아동들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3월부터는 생일파티용으로 꾸며진 차량을 갖고 공부방에 찾아가 학생들의 단체생일파티를 열어주고 있다. 계속 늘어나는 다문화가족 아동 대상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투어 등 다양한 국내 문화체험 투어를 진행한다.
어찌 보면 실적, 내실, 사회공헌을 통한 지속가능경영 등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듯한 정지선 회장이 만40세를 맞는 2012년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일지 재계의 이목이 쏠려있다.
[사진 = 정기택 기자]
[김소연 / 매경이코노미 차장 sky6592@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2호(2011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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