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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의 순간들] 오리온 | ③ 쓸데없는 일, 필요 없는 일 하지 말라
입력 : 2025.10.13 15: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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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脫殼)의 순간들>
성공한 기업들은 보면 결코 우연이란 건 없습니다. 운이 따랐다 한들 그 운을 기회로 만든 결정적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뱀이나 매미가 껍질을 벗듯, 탈각(脫殼) 이전의 기업과 이후의 기업은 전혀 다릅니다. 담대한 변신으로 위대한 성공을 이끈 기업가의 여정을 기록합니다.외부에서 영입한 최고경영자가 임직원 군기를 잡으면 조직이 제대로 굴러갈까? 군기 잡기로 기업의 실적이 개선될까? 필요조건일지는 모르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성과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출발하겠다는 의지를 결집시켜야 한다. 당근이 필요했다. 그가 오리온에 오기 직전 3개연도의 역성장, 마이너스 매출. 그 결과 직원들의 임금 동결. 그는 직원들의 월급부터 올렸다.
“기업이 이익이 나는데도 급여를 올리지 못하면 그게 경영하는 사람 책임이지, 직원들 책임인가요. 해마다 물가는 오르는데 직원 급여 동결시키면 그들 삶의 질이 떨어지고 사기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성과가 나기도 전이었지만 먼저 직원들의 급여를 인상하고 성과가 더 나면 급여를 더 올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목표는 업계 최고 수준의 급여라고 했습니다. 미래성장동력의 핵심인 연구개발 인력은 품질 좋은 제품을 개발해야 하니 연구수당 등을 통해 추가로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기업이 이익을 내려면 몸을 가볍게 하는 게 중요하다. 허 부회장이 평소 자주 인용하는 명언이 있는데 그게 몽골 제국의 창시자인 칭기즈 칸의 책사 야율초재(예뤼 추차이·耶律楚材)의 말. 학문과 식견이 뛰어나 칭기즈 칸이 가장 아꼈던 인물로 유비에게 제갈공명이 있었다면 칭기즈 칸에게 야율초재가 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하나의 이익을 얻는 것은 하나의 해를 제거함만 못하고, 하나의 일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일을 없애는 것만 못하다(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여일리불약제일해, 생일사불약멸일사).”
경영의 고수들은 늘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데 집중한다. 새로운 일 만드는 것보다 골치 아픈 일을 없애는 게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경영학의 대가인 하버드대 마이클 포터 교수가 전략에 대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전략은 선택이다. 전략의 본질은 하지 않아야 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복귀하고 나서 했던 첫 번째 시도도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작업이었다. 수십개에 달하던 애플 제품을 전문가용, 일반인용, 최고사양, 적정사양 등 4가지로 압축하고 다른 경쟁 회사들이 잡다한 기능을 추가할 때 스티브 잡스는 오히려 불필요한 기능을 제거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제품이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다.
허 부회장의 모토도 줄이고, 없애는 거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샐러리맨들은 의당 승진하면, 또 승진을 하기 위해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야 자기 업적이 생기거든요. 제가 40년 넘게 샐러리맨을 했지만 이런 거 저런 거 하겠다는 품의서는 많이 봤는데 이런 거 저런 거 없애겠다는 품의서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왜 줄이고 없애느냐”고 물었다. 답은 간단명료하다. 그래야 비용을 줄일 수 있으니까. 불필요한 일을 하면 코스트가 올라가니까.
사실 그는 오리온에 들어오면서 내심 혹독한 구조조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필요한 계열사를 없애거나 합치고 부실 사업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입사 후 6개월이 안 된 2014년 12월이었다. 감자 영농을 하는 신농상사라는 계열사, 스낵을 판매하는 오리온스낵인터내셔널, 제품 포장지를 생산하는 아이팩까지 제과와 관련된 3개 회사를 오리온으로 합병해 관리 비용을 줄이고 경영 효율성을 제고했다. 스포츠토토는 국가에 반환하고 건설회사들은 청산 절차를 밟았다. 구조조정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이익이 단숨에 몇 백억원 올랐다.
허 부회장에겐 확고한 기업관이 있다. 그는 2018년 매일경제TV <열린 특강>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기업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이익을 내는 겁니다. 해마다 이익이 증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 기업의 경영자가 무능한 겁니다. 적자를 내 기업을 도산에 빠뜨리는 경영자는 죄인입니다. 기업이 망하면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직장을 잃고 그 가족들까지 경제적 피해를 입습니다. 그다음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이 법에 맞아야 하고 기업이 속한 사회의 도덕적 정서와도 부합해야 합니다. 창출된 이익은 먼저 이익 창출에 기여한 임직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기업에 투자한 주주들에게 이익의 일부를 환원하고, 세금 납부를 통해 국가 재정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익의 일부를 재투자해 미래의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구축하고 일자리를 창출해 사회 발전에 공헌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오리온그룹이 지난 4월 24일 서울시 강남구 916빌딩에서 개최한 윤리경영 도입 10주년 행사. 무대 위 좌측부터 박세진 리가켐바이오 사장, 허인철 오리온그룹 부회장, 이승준 오리온 사장, 신호정 쇼박스 대표이사. 온라인 생중계를 통해 참석한 전 세계 법인 직원들은 화면을 통해 행사에 참석했다. 화면 좌측 위부터 이성수 중국 법인 대표이사, 우측 위 박세열 베트남 법인 대표이사, 좌측 아래 박종율 러시아 법인 대표이사, 우측 아래 김민우 인도 법인 대표이사. 과자 봉지로 뗏목을 만들 줄이야2016년에 작성한 ‘오리온 징비록’의 첫 장표는 <업(業)의 본질>이다. 제과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모든 사업의 본질은 소비자의 가치 증대이다. 그럼 제과 소비자의 가치 증대는? 답이 간단하다. “맛있고 품질 좋은 과자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리온의 할 일은 ‘높은 품질(Higher Quality), 낮은 가격(Lower Price)’이어야 한다.
그가 오리온에 출근하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였다. 대학 다니는 아들이 동영상을 하나 보여준다. 과자 회사에 다닌다고 하니 이것 한번 보라면서 건네준 55초짜리 유튜브 동영상. 제목이 ‘질소를 샀더니 과자가 서비스’. 대학생 3명이 국산 과자 봉지 60개를 테이프로 꼼꼼히 붙이고 둘러서 만든 ‘과자 배’에 올라타 천안시 분수대의 얕은 물을 헤엄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동영상은 며칠 후 있을 한강 퍼포먼스(?)를 앞두고 행한 안전 테스트이자 일종의 예고편. 질소로 가득 차 있어 막강한 부력을 자랑하는 국산 과자 봉지 위에 올라타 한강을 한번 건너보겠다는 것이었다. 한국 제과업계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이 결국 극도의 조롱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 당시 상황이 실제 그랬다. 소비자문제연구소 분석 결과에 따르면 4개 제과업체의 20개 제품 가운데 85%인 17개가 내용물이 포장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한 과자는 내용물 부피가 박스 부피의 5분의 1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다. 바로 이 문제의 과자가 오리온 ‘포카칩’이었다.
그는 참담함을 느꼈다. ‘질소 과자’. 스낵 봉지 안에 과자는 없고 공기는 많다는 비난. 그 비난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오리온은 물론 제과업의 도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출근해서 오너를 찾았다. 그러면서 업의 본질을 말했다. “나는 이걸 하겠다”고 오너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이화경 부회장이 그 말을 듣자마자 “돌아가신 선대 회장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라고 답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고,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나 철저하게 지속적으로 실천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사실 허 부회장이 오리온에 들어온 이후 11년간 한 일은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낮추고’, 그것 하나였다. 그리고 그가 직원에게 한 말도 이 말 하나였다. 다른 건 없었다. 현재 오리온에서 어떤 결정을 할 때 묻는 질문은 단순명료하다. 그거하면 품질 좋아져? 그거 하면 비용 낮출 수 있어?
그는 임원들을 불렀다. 노골적으로 시장 바닥의 언어를 사용했다. “과자 봉지를 액자 만들어 걸어 놓더냐”라면서. 그러면서 무겁게 지시를 내렸다. ①포장지 줄여라 ②잉크 줄여라 ③디자인에 돈 쓰지 말아라 ④질소 감량해라. 오리온에겐 알맹이가 중요했다. 그게 업의 본질이었다. 그걸 직원들은 나중에 ‘착한 포장’ 프로젝트라 이름을 붙였다. 허 부회장은 네이밍에는 관심이 없었다.
경기 안산시 단원구에 소재한 오리온 포장재 공장에서 직원들이 친환경 인쇄기로 불리는 플렉소 인쇄기에서 생산된 포장재 품질을 검수하고 있다. 이 인쇄기는 기존 설비보다 잉크비가 50% 적게 든다. 그다음은 가격 조정. 허 부회장이 오리온에 들어와 제품 가격은 딱 두 차례 올랐다. 그것도 입사 9년 차인 2022년과 2024년. 그러니까 9년간 동결한 셈이다. 그는 경영자에게 가격 인상은 달콤한 유혹이라고 생각한다. 숫자를 좋게 만들기 위한, 그리고 경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쉬운 대처법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가격을 인상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비용을 줄이고 경영을 효율화 할 방법을 찾는 게 최고경영자의 도리라는 것.
그는 “9년째 가격을 동결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수익성을 개선하면서 버틸 힘이 생겼기 때문”이라며 “2022년 처음 가격을 올리게 된 것도 3여년간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가 끝나고 밀가루, 식용유, 설탕 같은 원부자재 값이 최대 70~80%나 오르는 유례없는 일이 벌어진 데다 물류비용까지 폭등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사실 이 당시 우리나라 주요 식품회사의 평균 가격 인상 횟수는 3회. B사·O사는 6회, C사는 7회나 올렸다. 10년간 가격 인상 횟수를 보면 오리온이 2회, 7개 주요 식품회사가 합쳐서 107회, 평균 15.3회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