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nterprise] 농사가 신성장 엔진이다…땅에 씨 뿌리는 대기업들

    입력 : 2012.05.04 13: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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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야 흙에 살리라~!” 유행가 가사처럼 ‘귀농’에 대한 관심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젊은 나이에 귀농해 억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농촌 부자들의 얘기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답답한 직장생활에 염증을 느낀 30~40대들의 도시 탈출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있어서다.

    그래서일까. 대기업들 역시 ‘귀농’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기존 식자재 관련 기업들이 영농사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최근에는 중공업기업과 화학기업, 건설업체들까지도 귀농을 통해 곡물 산업에 진출하려는 모습이다. 일부에서는 막강한 자본력과 인력을 갖추고, 곡물 산업을 회사의 신(新)성장 동력으로 삼아 도약을 꿈꾸는 그룹들도 생겨나고 있다.

    1960~70년대 경제개발 계획을 통해 제조업으로 부를 쌓고, 서비스·금융 등 3차 산업으로 사업영역을 넓혀왔던 대기업들이 농토로 되돌아가는 이유에 대해 알아봤다.

    재계의 뉴트렌드 ‘귀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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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고 CBOT빌딩.
    시카고 CBOT빌딩.
    러시아 동쪽의 유일한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평원지대에는 방대한 규모의 ‘현대미하일로프카농장’이 있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이곳은 여의도 면적의 23배에 달하는 6700ha의 규모를 자랑한다. 현대미하일로프카농장의 주인은 세계 최대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이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2009년 러시아 연해주에 건설한 ‘현대하롤농장’(1만ha)에 이어 이곳에 또 농장을 세웠다.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올 것 같지만 두 농장에서는 해마다 1만6000t의 곡물이 생산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이 농장에서 콩과 옥수수, 밀, 귀리 등을 생산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만이 귀농에 나선 것은 아니다. 삼성물산 역시 4월 미국 시카고 현지법인인 aT그레인컴퍼니를 통해 곡물 사업에 나섰다. aT그레인컴퍼니는 삼성물산 외에도 ㈜한진, 농수산물유통공사, ㈜STX가 공동 참여했다. 삼성물산은 aT그레인컴퍼니를 통해 지난해에만 10만t이 넘는 콩과 옥수수를 국내로 들여왔다. 오는 2015년까지 215만t 이상의 곡물을 들여올 예정이며, 콩과 옥수수 외에도 밀과 보리 등으로 곡물류를 확대할 계획이다.

    국내 기업 중 가장 먼저 귀농에 나선 대우인터내셔널은 영농사업은 물론, 도정사업에 진출했다. 지난해 9월 인도네시아의 팜오일(야자유) 농장 개발업체를 인수하고, 3만6000ha 규모의 농장을 개발 중에 있다. ‘쌀농사 천국’으로 불리는 캄보디아에서도 2만6000ha 규모의 농장을 조성하고 있어 내년부터는 14만t 이상의 곡물을 생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밖에도 LG상사가 인도네시아에 1만6000ha 규모의 팜오일 농장을 확보하고 있으며, STX그룹 산하의 해운사 STX팬오션은 미국 서부 롱뷰항에 연간 800만t 이상의 곡물을 처리할 수 있는 해외곡물터미널을 건설 중에 있다.

    대기업들이 해외에서 영농활동에 나서는 것과 달리, 국내에서 농사를 짓는 기업들도 있다. 현대차그룹 계열의 현대건설이 대표적인 예다. 현대건설은 1984년 폐유조선을 활용한 ‘배 물막이 공사’(일명 정주영 공법)를 통해 충남 서산 일대에 간척지를 조성했다. 여의도의 48배에 달할 정도로 매립 면적만 1만5000ha에 달한다. 이곳에서는 현대건설 산하의 서산농장이 대단위 기계화 영농을 하고 있다.

    뷰티기업으로 잘 알려진 아모레퍼시픽그룹도 오래전부터 농사를 지어왔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은 계열사인 태평양물산을 통해 제주도에서 녹차밭을 경작하고 있다. 여기서 생산된 녹차잎들은 아모레퍼시픽이 제조하는 ‘설록차’의 재료로 쓰이고 있다.

    이 밖에 LG그룹 2대 회장이었던 구자경 명예회장은 경영에서 물러난 후, 충남 천안 연암대학에서 버섯과 특수작물 재배에 집중하고 있다.

    곡물파동으로 농사에 눈 돌려
    현대건설 서산간척지.
    현대건설 서산간척지.
    곡물 하역 장면.
    곡물 하역 장면.
    현대중공업이 인수한 연해주 제2공장 위치도.
    현대중공업이 인수한 연해주 제2공장 위치도.
    국내의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이처럼 국내외를 막론하고 영농산업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영농사업을 중심으로 한 곡물사업이 성장성이 가장 높은 새로운 사업 분야로 성장하고 있어서다. 농촌경제연구소가 지난해 7월 발간한 ‘해외곡물 자원 확보 동향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73개 기업이 해외 18개국에 진출해 2만3567ha의 농지를 경작 중이다. 직접적인 배경은 2008년 국내 경제를 휘청거리게 했던 ‘곡물파동’이었다. 2007년 하반기부터 곡물 저장량이 감소하고 있다는 보도와 통계가 잇따르면서 쌀과 콩, 옥수수 가격이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이로 인해 국내 옥수수와 대두 수입량이 줄면서 국내 사료값이 폭등해 축산농가와 식품가공업체들에 큰 타격을 주는가 하면, 곡물 외에 다른 원자재의 가격 상승을 불러와 제조업체들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

    글로벌 곡물업계에서는 ‘2008년 곡물파동’의 배경으로 중국과 인도 등 브릭스 국가들을 지목했다. 해당 국가들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소득이 늘어난 국민들의 육류 소비가 급격하게 늘었기 때문이란 설명이었다. 또한 고유가로 인해 미국 등 선진국들이 바이오에탄올 생산량을 대폭 늘리면서 옥수수 가격을 상승시킨 점도 곡물파동의 원인이란 지적이 있었다.

    결국 전 세계적인 육류 소비의 증가와 옥수수의 가격 상승이 옥수수 재배 면적 증가를 불러왔고, 밀과 대두·쌀의 경작지를 줄이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곡물파동’을 일으켰다는 설명이다.

    반면 세계 곡물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4대 곡물메이저는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수익을 남겼다.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ADM)’는 2008년 3분기 순익만 42% 증가했으며, 카길 역시 분기 순익이 86% 증가한 10억 달러에 달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2년 뒤인 지난 2010년에도 비슷한 충격이 전 세계 곡물 시장을 강타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 세계적인 곡물 수출국들이 연말까지 해외 수출을 제한하면서 국제 곡물가격이 한차례 더 요동쳤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본 대기업들은 그동안 등한시했던 영농산업과 곡물시장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2010년을 기준으로 해외 영농 부지 개척에 나섰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바이오, IT 통해 수익성 높아져
    기계로 수확하는 모습.
    기계로 수확하는 모습.
    씨를 뿌리고 가꾼 후 재배하는 단순한 노동집약적 산업이었던 영농이 과학기술을 만나면서 수익성이 높아진 것 또한 대기업들의 영농사업 진출 배경으로 작용했다. 기업들이 운영하고 있는 해외의 대규모 영농단지들은 대부분 기계식 작농법으로 운영되고 있다. 트랙터와 전자식 수로시설을 통해 논을 일구고, 비행기를 통해 씨앗을 뿌리고 관리한 후 다시 트랙터로 추수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추수된 곡물들은 대량 처리가 가능한 도정시설로 옮겨져 곧바로 가공되거나, 터미널로 이동해 저장된다. 과거에는 사람 손으로 일일이 처리해야 했던 일이 기계를 통해 이뤄지면서 높은 효율성을 갖게 된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바이오기술과 IT기술을 적용할 수 있게 됐다는 점도 영농사업의 수익성과 효율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국내 대기업들이 가장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는 분야는 땅을 되살리는 ‘토양 복원’ 사업이다.

    토양 복원 사업은 앞서 밝힌 것처럼 황폐화된 땅을 옥토로 재건하는 사업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높은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현대건설과 대우건설, 동부건설, GS건설 등 대형 건설사를 중심으로 전문건설업체들이 진출해 있다.

    이들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중동을 중심으로 한 해외에서 수주활동에 나선 상태다. 실제 올해 초에는 GS건설이 국내 건설사로는 최초로 해외 수주를 따냈다. 쿠웨이트의 오일컴퍼니가 발주한 6700만달러 규모의 석유오염 토양 복원사업을 맡게 된 것이다. 건설업계에서는 “브랜드 인지도 면에서 미국·유럽 대형 건설사들에 밀리지 않는 중동을 중심으로 토양 복원 사업의 수주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직접 영농사업을 하지 못하는 대기업들은 가공업이나 관련 업종을 통해 1차 산업에 접근하는 사례도 있다. 가공업에서는 국내 최대 유통업체인 신세계그룹의 이마트가 지난해 4000억원을 투자해 축산가공업체를 설립했으며, CJ제일제당과 SPC그룹은 2000년 이후 국내 밀 생산량의 대부분을 사들여 ‘우리밀’ 제품으로 출시하고 있다.

    화학업체들은 농사에 쓰이는 비료나 약품들을 통해 영농사업에 한발을 걸치고 있다. 대표업체로는 동부그룹의 동부하이텍(구 동부한농)과 농협이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남해화학, 삼성그룹 계열의 삼성정밀화학 등이 있다.

    곡물 가격 흔드는 4대 곡물 메이저 ‘ABCD’를 아시나요?

    전 세계 곡물시장은 이들 ABCD로 시작되는 네 개의 회사들이 사실상 좌우하고 있다. 이른바 4대 곡물메이저로 불리는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ADM), 벙기(Bunge), 카길(Cargill), 루이스 드레퓌스(LDC) 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중 맏형 격인 카길은 1865년 스코틀랜드 출신 사업가인 윌리엄 카길이 미국 오하이오주에 곡물 저장고를 사들이면서 시작됐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곡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대규모 회사로 성장했고, 1998년에는 한때 양강 구도를 그리던 콘티넨털그레인을 인수하면서 몸집을 불렸다. 현재는 50여개국 800여 도시에서 5만5000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39억5000만 달러의 순수익을 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기업 문화는 매우 폐쇄적이다. 창립자인 카길 가문과 맥밀런 가문이 지분 85%를 보유하고 있으며 증권시장에 상장하지 않아 재무제표를 공개하지 않는다. 벙기는 허시 가문이, LDC는 프랑스 드레퓌스 가문이 소유하고 있다. 반면 ADM은 뉴욕 증시에 상장돼 있다.

    4개 곡물 메이저는 국제 곡물 시장 유통량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몬산토, 노바티스 등 농업생명공학기업과 합작관계를 맺고 종자산업과 유전자 변형 농산물에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들 4대 메이저는 일단 직접 생산보다는 곡물의 유통 과정에 주로 개입하며, 가족 중심 경영을 통해 기업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또 자금 결제는 대부분 스위스 현지 법인을 통해 처리돼 일반인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극히 꺼린다.

    황금알이 될 곡물산업
    곡물 하역.
    곡물 하역.
    대기업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곡물산업의 규모는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경작지는 줄어드는데 인구는 계속 늘어나면서 곡물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어서다. 실제 미국 컬럼비아대와 스탠퍼드대의 연구에 따르면 대표적 곡물인 옥수수의 생산량은 1980년 이후 30년 동안 2300만t이나 감소했다. 반면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에서의 육류 및 곡물소비량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또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해 하반기 발표한 연차보고서에서 “향후 수년간 식량가격은 더욱 불안정해질 것”이라며 “곡물을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는 더 많은 돈을 줘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기업들의 영농사업이 제대로 빛을 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기업들이 몇 해 전부터 곡물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는 있지만, 선두업체인 4대 곡물메이저에 비하면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978년부터 젠노그레인이라는 곡물회사를 설립해 미국에 대형 저장·유통시설을 확보하는 등 자체적인 글로벌 조달시스템을 구축한 일본과 비교해도 한참 모자란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충남 서산의 한 영농법인 관계자는 “곡물산업은 곧 먹을거리 싸움이다”라고 강조한 뒤 “앞으로 인구가 더 늘어나게 되면 곡물이 기름보다 더 비싸지는 날이 올 것”이라며 “대기업들도 영농산업의 가능성을 보고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만큼 정부 차원의 지원과 전략이 뒷받침돼야 안정적인 곡물 수급시스템이 구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종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0호(2012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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