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tech] 더 얇게 더 얇게… 피 말리는 두께 경쟁

    입력 : 2012.05.04 13: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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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얇은 제품을 만들어라.’ 이는 전자업체에 주어진 숙명이자 굴레다. 슬림한 제품은 휴대성과 편의성을 높이고 디자인의 세련됨을 가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슬림(slim)’은 기술력을 뜻한다. 소비자들이 얇고 날렵한 제품에 손길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 에니악(ENIAC)의 길이는 25m, 높이는 2.5m에 달했다. 1946년에 탄생한 이 컴퓨터의 무게는 28t. 무려 1만8000여 개의 진공관이 들어간 탓이었다. 에니악의 출현은 더 나은 컴퓨터를 개발하는 시발점이 됐고 더 작고 더 강력한 컴퓨터를 만들어내려는 엔지니어들의 경쟁이 불꽃 튀게 이어졌다.



    삼성 노트북 12.9mm 최저두께로 애플 맞대응 올해 초 삼성전자는 12.9mm 두께의 프리미엄 노트북 ‘뉴시리즈9’을 출시했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 PC로 애플 맥북에어(17mm) 보다도 한층 얇다. 이 때문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 2012에는 뉴시리즈9을 확인하기 위한 경쟁업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12.9mm 두께를 만들어내기 위한 삼성전자 엔지니어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이관호 삼성전자 PC개발그룹장(상무)은 이러한 두께로 노트북을 만들어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윗선에 보고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그는 결국 이를 악물고 연구원들과 기적에 도전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전년 모델인 시리즈9 노트북보다 20%가량(3.4mm) 두께를 줄여야 하는 극한 프로젝트다.

    “노트북 두께를 줄이려면 키보드, LCD, 팬, 메인보드, 배터리 등 거의 모든 주요 부품을 새롭게 맞춤 설계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전체 두께를 줄이는 건 불가능하지요. 매일 밤을 새우며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PC업체들이 노트북의 두께와 무게를 줄이는 이유는 휴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PC 속도와 함께 가장 큰 가치를 제공하는 기능이 바로 두께와 무게다. 삼성전자 PC 개발팀은 우선 키보드에 주목했다. 키보드를 칠 때 쿠션 역할을 하는 고무의 높이는 종전 시리즈9의 경우 1.5mm이지만 이를 1.35mm로 줄이면서도 좋은 터치감을 유지하는 데 어렵게 성공했다. 키보드를 밝혀주는 백라이트시트의 두께도 도광판 방식에서 삼성 최초의 유기발광(EL) 방식으로 바꾸면서 0.2mm를 줄여냈다.

    노트북의 상판을 차지하는 디스플레이(LCD)도 손질했다. LCD에 빛을 전달하는 백라이트를 나사로 잇는 모듈화 대신 LCD 뒷면에 백라이트를 붙이는 일체형 작업을 진행해 두께를 줄였다. 메모리 모듈도 새 방식을 적용했다. 종전 모델에선 2기가비트 16개를 쌓은 4기가바이트(Giga Byte)짜리 메모리 모듈을 탑재한 반면 뉴시리즈9에는 8기가비트 4개로 모듈을 구성했다. 이렇게 메모리용 PC 면적을 50% 줄여 배터리 면적을 확

    보했다.

    이 그룹장은 “PC 두께를 줄이면 배터리 두께도 줄여야 하는데 이 경우 배터리 용량이 줄어들어 곤란해진다. 그래서 메모리 면적을 줄이고 그 만큼의 배터리 면적을 확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면을 사용해온 메인보드(PCB 회로)는 한 면에 부품을 탑재하는 식으로 바꿨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공간을 최적화하는 개발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노트북의 열을 배출하는 팬의 두께도 1mm 줄이고, 노트북 터치패드도 페트(PET) 타입으로 설계해 종전보다 40% 슬림하게 만들었다. 뉴시리즈9 개발의 최대 고비는 품질 테스트를 진행하는 작년 10~11월 찾아왔다. 두께를 한층 줄이면서 노트북의 내구성과 성능을 해치지 않는 게 최대 관건이었다.

    “각종 온습도 테스트와 충격 테스트를 벌이는 과정에서 ‘실패’ 메시지가 자주 떴어요. LCD에선 색 번짐 현상이 나타나 당혹스러웠고요. 제품 신뢰성 확보가 최우선이기 때문에 테스트를 진행하는 두달 동안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체임버(온습도 등을 테스트하는 밀폐된 방)를 오가면서 하도 땀을 많이 흘려 감기와 피부병을 달고 사는 연구원도 생겼다. 이러한 고비를 넘기고 두께 12.9mm, 무게 1.16kg(13.3인치 기준)의 뉴시리즈9을 탄생시켰다. 뉴시리즈9 개발 기간은 일반 노트북 개발의 3배가 소요됐다.

    LG는 1mm TV 테두리에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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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두께와의 사투를 벌이긴 마찬가지다. TV 몸체의 두께는 물론이고 베젤(테두리)을 한층 얇게 만들기 위한 기술 경쟁이 치열하다. LG전자는 TV 화면을 감싸는 겉 테두리인 베젤의 두께를 줄이기 위해 ‘베젤리스’ 제품을 표방하면서 연구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011년 초 삼성전자가 5mm 두께의 초슬림 베젤 TV를 선보인 것에 자극받아 1년간 절치부심했다는 후문이다. 삼성 스마트 TV의 2010년 모델이 28mm의 테두리였던 점을 감안하면 삼성이 1년 새 ‘천지개벽’ 수준의 베젤 슬림화를 이뤄진 것이다. TV 업체들이 베젤 두께에 집착하는 이유는 ‘시청 몰입감’에 차이를 주기 때문이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베젤 두께가 얇을수록 TV 화면에 대한 몰입감이 더 커진다”고 설명했다. 베젤이 얇을수록 TV와 벽면 사이의 시각적 장애를 최소화해 마치 극장에 온 것과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LG전자는 베젤 외관 두께가 1mm밖에 안 되는 시네마 스크린 TV를 개발하기 위해 종전까지 적용했던 소재와 가공법을 벗어던져야 했다. TV를 감싸는 메탈의 두께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갖가지 금속 가공법을 시도해야 했다. 이를 통해 화면과 TV 프레임 간의 경계를 사실상 없앤 콘셉트를 도출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이렇게 되면 TV에 꼭 필요한 부품을 제대로 배치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고안한 게 디스플레이 가장자리에 10mm 정도의 먹선을 두는 일명 온 베젤(on bezel)이다. TV가 꺼진 상태에서는 TV의 테두리가 눈에 띄지 않는 사실상의 ‘베젤리스’ 제품처럼 보이지만 TV를 켜면 10mm 정도의 먹선이 보이는 것이다.

    브라운관 TV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초슬림 TV가 속속 등장하면서 벽걸이 형태의 TV가 가능해졌다. 거실이나 사무공간의 활용도는 그만큼 개선된 셈이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아파트, 거실, 유리문 등에 디스플레이를 설치하는 투명 TV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TV가 잡아먹는 공간은 전혀 없게 된다.

    화웨이·모토로라, 삼성 두께 따라잡기 절치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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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스마트폰의 두께 경쟁을 살펴보자. 올해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선 중국의 휴대폰업체 화웨이가 내놓은 초슬림 스마트폰이 눈길을 끌었다. 화웨이는 6.68mm의 어센드(Ascend) P1 S와 7.69mm의 P1을 소개했는데, 두께만 놓고 보면 삼성과 LG를 추월할 태세다. 스마트폰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모토로라가 지난해 10월 선보인 7.1mm ‘모토로라 레이저’에 비해서도 0.4mm가량 줄어든 것이다. 스마트폰 변방에 위치해 있던 화웨이가 빠른 속도로 하드웨어 경쟁 대열에 합류한 느낌이다. [황인혁 매일경제 산업부 차장]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0호(2012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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