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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ship] 구직난 속 인기 끄는 금융권 인턴의 명암
입력 : 2011.09.28 16: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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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 청년 인턴 연수생들이 중소기업을 방문해 회사 관계자로부터 생산시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하지만 바늘구멍을 뚫고 인턴에 선발된 후에도 치열한 경쟁이 기다린다. 신입행원 공채 시 서류전형 면제 등의 혜택을 얻기 위해선 우수인턴으로 선정돼야 하기 때문이다. 필기전형까지 면제되는 KB국민은행 우수인턴의 경우 전체 인턴 중 상위 10%에 속해야 할 만큼 까다롭다. 인턴 입장에선 단기에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영업실적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영업실적 압박까지… 인턴십 취지 무색 대학생 박종범(23) 씨는 사용하지 않는 체크카드가 6장이나 된다. 경제학을 전공하다 보니 주위에 은행 인턴을 하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이다. 박씨는 “친구 부탁으로 하나씩 만들다보니 거의 모든 은행에 통장을 개설했다”며 “거절하기가 난처해 일단 만들었다가 나중에 해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상반기 기업은행에서 인턴활동을 한 이모(24) 씨는 “영업실적에 대한 압박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사측이 인턴사원 워크숍에서 뛰어난 영업실적을 보인 인턴들의 비결을 발표하며 독려했다는 것. 그는 “상위 50%에 해당하는 우수인턴은 공채 시 서류전형을 면제받기 때문에 가뜩이나 모두들 열심인데 체크카드를 500개 신규 발급한 인턴 사례 등을 듣고부터는 영업실적에 부쩍 신경 쓰게 됐다”고 말했다.
SC제일은행은 아예 금융권 최초로 세일즈인턴 제도를 도입했다. 2009년 말 선발된 71명의 1기 인턴들은 각 영업점에 배치돼 고객에게 직접 상품을 판매했다. 하지만 인턴십 프로그램으로는 상대적으로 긴 1년의 활동기간과 정규직 전환 가능성을 내건 무리한 실적 요구 등이 논란이 됐다. 은행 측은 지난해 말 2기를 채용하며 활동기간을 6개월로 단축했다.
인턴들의 실제 활동 내용이 ‘관심직무를 미리 체험한다’는 인턴제도 취지에 맞는지도 의문이다. 금융권은 정부의 권고로 2009년부터 인턴 채용을 대폭 늘렸다. 지난해 1500명에 가까운 인턴을 고용한 KB국민은행은 이들을 전 지점에 한 명씩 배치해 현장을 체험하게 했다. 이들은 주로 단순 CS(고객만족)업무를 맡아 로비매니저와 같이 방문객을 응대했다. 은행권 인턴이 ‘인사만 하는 인턴’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지난해 외환은행에서 인턴활동을 한 유모(25) 씨는 “요샌 워낙 금융권 인턴 경험자가 많은데다 실제 맡는 업무도 단순해 정규채용 시 차별성을 갖는다고 보진 않는다”고 말했다.
돈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금융권의 업무 특성상 단기간에 실무를 맡기 어렵다. 이 때문에 대기업 인턴보다 정규직 전환비율이 훨씬 낮은 것으로 보인다.
일자리로 이어지지 못하는 ‘단기알바’일 뿐 금융권 인턴 채용은 지난 2009년 정부의 일자리창출 정책에 의해 본격화됐다. 경제위기로 청년실업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이명박 대통령은 기업들의 책임감 있는 해결책을 주문했다. 청년인턴 도입 3년차를 맞는 올해는 금융권이 보다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인턴 채용안을 내놨지만 아직도 취업난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란 평가가 나오고 있다.
기업은행과 산업은행은 신입행원의 20%를 인턴 경험자에서 채용할 계획이다. 우리은행이나 하나은행도 일부 인원을 인턴 중에서 뽑을 예정이지만 선발비율은 정하지 않았다. 인턴경험을 우대하기 위해 할당량을 정한 것이지만 혜택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서류전형 면제에 그친다. 필기, 합숙면접, 임원면접 등 주요 전형은 온전히 구직자의 몫이다. 게다가 짧게는 한 달 반, 길게는 반년 가까이 인턴십에 시간을 쏟은 80% 가량의 구직자들은 채용이 안 될 수도 있다.
기업은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이 높을수록 인턴도 보다 꼼꼼하게 뽑는다. 때문에 은행권 인턴 선발은 대체로 간단하다. 서류전형 이후 실무자면접만 통과하면 된다. 반면 현대·기아차는 1000명 중 70% 이상, SK그룹은 350명 중 70% 등 일반 대기업의 ‘인턴·정규직 전환비율’은 대체로 높은 편이다. 그래서 인턴 선발과정에 인·적성검사 등의 전형을 추가하는 경우가 많다.
인턴에게 주어진 일이 대부분 단순 업무보조에 그치는 것도 문제다. 지난해 국민은행은 무려 2000여 명, 우리은행은 15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선발했다. 유명 온라인 취업준비 카페에선 ‘정작 하는 일은 로비매니저와 다름없다’며 인턴십을 중도에 포기하겠다는 글들이 속속 올라왔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던 당시 행장이 정부의 코드를 맞추기 위해 인턴 규모를 대폭 늘린 것”이라며 “이 때문에 인턴을 많이 뽑은 감이 있다”고 고백했다.
지점마다 인턴관리 팀장이 따로 있긴 하지만 인턴을 활용할 구체적인 매뉴얼이나 교육 프로그램이 없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현금거래가 많은 영업점의 경우 업무특성상 단기 인턴에게 맡기기 어려운 일이 많다. 외환은행의 한 지점장은 “영업점에 배치된 인턴들에게 시킬 일은 주로 간단한 업무보조”라며 “고객을 상대로 하는 객장 안내나 서류정리 등을 많이 시킨다. 고객 응대가 은행원의 기본이긴 하지만 종일 단순 업무를 하는 인턴들을 보면 아까운 대졸 인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본사 인턴은 그나마 상황이 낫다. 세부 부서별로 배치돼 해당 업무를 익히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인사 인턴(방문객에게 인사만 하는 인턴)’으로 불리는 지점 인턴보다 본사 인턴의 인기가 더 높다.
기업은행 신입행원 강유선(26) 씨도 본사 인턴을 거쳐 올 여름, 오랜 꿈인 은행원이 됐다. 그가 금융권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작년 이맘때쯤이다. 경희대 06학번인 그는 졸업을 앞둔 지난해 7월부터 5개월간 기업은행 본점 외환사업부에서 인턴활동을 했다. 당시 함께 인턴활동을 수료한 140명 중 상위 절반인 우수인턴에 선정돼 신입공채에서 서류전형을 면제받았다. 올해 신입행원 중 인턴 출신은 강씨를 포함해 30명이다.
대학 때부터 줄곧 금융권 취업에 관심이 있었던 강씨는 금융동아리 등의 활동을 해왔다. 은행 인턴십에 지원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지원한 타 은행 인턴에도 합격했다. 하지만 좀 더 오래 일하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 판단해 인턴기간이 긴 기업은행을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강씨가 배치된 외환사업부는 규모가 커서 매주 세부 부서를 돌며 업무흐름을 익혔다. 그는 “어느 지점 어느 부서에 배치됐느냐에 따라 분위기나 업무가 많이 다르겠지만 다행히 내가 있던 곳은 주별로 담당 멘토가 지정돼 어떤 업무를 해야 하는지 체계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맡은 일은 주로 멘토들의 실무를 곁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다. 외환업무팀 내에서도 수출계와 수입계를 두루 돌며 업무 내용을 살폈다. 업무 특성상 실무를 도맡아 할 순 없었지만 대신 관련 서류는 자유롭게 볼 수 있었다. 업무 관련 PPT를 만들고 사내 인프라넷에 주요행사를 게재하는 등의 보조업무도 맡았다.
강씨는 신입행원 연수가 끝나는 이달 말에 정식행원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그는 “우선은 영업점 수신 파트에서 개인금융 업무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싶다. 이후 기업금융과 외환관리 분야도 다루고 싶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갈수록 치열한 인턴경쟁에 인맥 총동원몇 달 간의 인턴활동이 끝나면 다시 구직활동에 뛰어드는 현실에서 단순 인턴십보다 채용으로 이어지는 실질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3개월의 인턴활동을 성실히 끝내면 정규직 전환 제의를 받기도 한다. 교내 공고를 통해 SC제일은행 본점에서 인턴활동을 한 권모(26) 씨는 “취업이 이렇게 어려운 마당에 치열한 입사경쟁을 건너뛰고 외국계은행 본점에 배치 받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라며 “이 때문에 수시채용의 폐쇄성이 일부를 위한 특혜로 악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권 인턴십 프로그램이 아예 대학 전공과목으로 개설된 경우도 있다. 한양대 경제금융학부는 봄 학기에 ‘인턴십’ 강좌를 운영한다. 겨울방학에 모집한 수강생 20명에게 금융권 인턴 자리를 알선하고 성실히 프로그램을 마친 학생에게 이듬해 봄 학기에 학점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고려대 경제학과도 계절 학기에 ‘경제실무인턴십’ 과목을 개설해 일반 기업은 물론 금융권 기업 인턴활동을 지원한다. 서모(23) 씨는 학교에서 연계한 한 자산운용사에서 인턴활동을 했다. 그는 “내가 간 곳은 해당과목 지도교수가 사외이사로 있는 기업”이라며 “다른 수강생들도 교수들과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증권사 리서치센터, 채권평가사 등에 파견됐다”고 말했다.
인기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금융권 인턴십 프로그램. 기업과 구직자 모두 윈윈하기 위해선 제도의 취지를 살려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KB국민은행은 인턴을 선발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에 대한 정확한 조건제시’와 ‘구체적인 실무평가’로 정규직 전환의 문을 넓혔다. 글로벌 은행으로 도약한다는 기업 목표에 부합하는 해외 유학생과 국내 외국인 유학생을 각각 50명씩 채용한다. 은행 관계자는 “글로벌 은행으로 도약하기 위해 해외 인력을 확보하자는 취지”라며 “이미 진출했거나 혹은 진출 예정인 국가 출신 학생을 많이 뽑는 편”이라고 말했다.
또한 8주간의 인턴활동 중 업무능력을 상세항목으로 나눠 평가한다. 까다롭게 평가된 우수인턴들은 공채 시 타은행과 달리 서류는 물론 필기전형까지 면제받는다. 정식채용에 한 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한편 신한은행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인턴사원을 모집하지 않는다. 인턴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일자리 창출’이라는 목적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은행관계자는 “신한은 2009년부터 정규직 사원을 많이 뽑는 것으로 실질적인 일자리 창출을 이뤄왔다”며 “이미 올해 상반기 300명의 신입행원을 뽑았고 그 밖에도 채용박람회, 잡셰어링 등의 방식으로 청년실업 해소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승진 /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sjchoi@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1호(2011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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