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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17) 유럽 제국주의와 아시아 식민지배 `인도차이나`로 보는 프랑스의 식민통치
입력 : 2021.04.29 16: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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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유럽 열강의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아시아에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침탈이 시작됐다. 영국은 프랑스 세력을 인도에서 물리친 뒤 1876년 인도제국을 수립하여 대영제국으로 편입시켰고 네팔과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다. 이어서 말레이 연방을 조직하여 인도양과 태평양 무역을 독점했다. 인도에서 밀려난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으로 세력을 확장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차지했다. 네덜란드 또한 자바와 보르네오 등을 차지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 회사를 만들었다. 진출시기가 늦은 독일도 뉴기니의 일부와 비스마르크제도, 마셜 제도 등 그 부근의 여러 섬들을 차지했다. 아시아와 태평양 여러 섬들이 유럽 제국주의에 의해 분할된 것이다.
영화 <인도차이나>(1992)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를 한창 지배하고 있던 1930년대에서 제네바 협정으로 손을 떼게 되는 1954년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무대인 ‘베트남’은 우리에게 1960~1970년대를 관통한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익숙하지만 이미 제국주의에 맞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둔 바 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제네바협정을 맺고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정부수립을 승인하면서 베트남에서 손을 떼게 된다. 영화는 베트남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고무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프랑스인 엘리안과 그녀의 양녀인 베트남 황녀 카미유의 불완전한 관계를 기본 축으로, 카미유가 집을 떠나 베트남 독립을 위한 투사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1992년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고, 1993년 프랑스 세자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 여우조연, 촬영, 음향, 미술 등 5개 부문을 석권했다.
줄거리를 간단히 보면,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한창인 1930년대 사이공에서 고무농장 주인인 엘리안은 노예를 동원해 고무나무액을 추출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주로 살면서 카미유를 양녀로 삼아 돌본다. 어느 날 엘리안은 그림 경매장과 카약경기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해군장교 장과 사랑하게 되지만 공교롭게도 카미유가 장에게 도움을 받고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다. 카미유는 황실에서 정해준 청년과 약혼식까지 올린 상태임에도 외딴 섬으로 좌천된 장을 찾아 떠나고 그 여정에서 자신이 몰랐던 민중들의 고된 삶을 체험하게 된다.
카미유는 결국 장을 찾아 해후하지만 그곳에서 프랑스 해군의 만행을 보고 군 간부를 총으로 쏘고 만다. 도망쳐 나온 카미유와 장은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은둔생활을 하면서 아들을 출산한다. 그러나 프랑스군에 발각되어 장은 결국 목숨을 잃고 아기는 엘리안이 키우게 된다. 카미유는 감옥에서 풀려나지만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봐준 양어머니 엘리안의 재산과 자식을 거부하고 공산주의자로서 험준한 독립투쟁의 길을 택한다. 20년이 지나 베트남 공산당의 요직에 오른 카미유는 북베트남 공산주의정권 수립을 승인하는 1954년 제네바 협정 대표단으로 참가한다. 이곳으로 엘리안과 카미유의 아들이 찾아오지만 모자상봉이라는 애절한 만남은 없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후 프랑스는 강력한 동화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 정책을 단행해간다. 1897년에 부임한 악명 높은 폴 두메르 총독은 각종 간접세를 신설했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에게 부여했다. 소금도 전매했으며, 아편마저 독점 판매하였다. 그중 가장 심각한 정책은 베트남의 토지를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베트남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빼앗은 것이다. 이 결과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엄청난 땅이 불하되었고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자연히 전체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층은 극빈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민지의 모습은 영화에도 잘 투영되어 있다, 엘리안과 그 주변의 프랑스인, 베트남 왕족 친구들은 많은 노예를 부리며 풍족한 생활을 누리지만, 농장에서 일하는 베트남인들은 자유가 없는 노예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카미유가 외딴 섬으로 가는 여정에서 본 민중들의 모습은 가난에 찌들고 자유를 잃어버린 비참한 삶을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왕족이었던 카미유의 약혼자가 프랑스에서 자유와 평등을 체험한 후 공산당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나 카미유가 민중의 비참한 삶을 직접 겪은 후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해 가는 내용은 이러한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통치는 2차 대전 전까지 계속된다. 2차 대전 중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항복하면서 동남아시아로 확장을 꾀한 일본에게 이 땅을 빼앗기게 된다. 이 기간에 베트남 주민들은 프랑스와 일본의 이중 수탈을 견뎌야 했으며 이는 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된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호찌민 지휘로 베트남독립동맹을 결성했고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운다.
하지만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뒤 베트남 북부에는 중국 국민당 군대가 진주하고 남부에는 영국군이 주둔한다. 또한 뒤이어 프랑스 군대가 다시 남부에 들어오고 각 지방의 행정기관을 점령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 8년에 걸친 지루한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도차이나 1차 전쟁이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베트남군에 크게 패하면서 프랑스는 1954년 제네바 협정을 통해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승인하고 인도차이나에서 손을 떼게 된다.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서 제네바 협정 사건을 다룸으로써 베트남의 통치부터 해방까지의 장대한 서사를 다룬다.
프랑스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 이후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북쪽의 공산당과 남쪽의 친미정권이 대치하면서 다시 전쟁의 역사에 휘말린다. 1960~1970년대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 전쟁이 우리도 참전했던 베트남 전쟁이다.
해방 이후 양국의 역사도 닮은꼴이다. 제국주의 프랑스와 일본의 희생물이 된 베트남과 우리나라는 동화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정책에 저항하면서 해방을 맞이하지만, 이내 외세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져 전쟁의 비극을 겪은 공통점이 있다.
▶‘마음의 빚’이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되길 역사적으로 동병상련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갈등을 겪을 이유가 없었던 양국은 총부리를 겨누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미국의 요청에 의해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경제부흥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베트남인들에게는 아픈 상처를 남겼다.
현재는 베트남의 경제 분야에서 누적된 외국인 직접투자금액이 한국이 가장 많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많은 베트남인들이 한국에 높은 호감을 갖고 있다. 베트남에 대한 과거 ‘마음의 빚’이 동반성장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앞으로도 계속 긍정적인 에너지를 키워나가기를 기대해본다.
[이미영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8호 (2021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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