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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평론가 윤덕노의 음食經제]뿌리는 생선 액젓, 어원은 중국말 사투리…케첩에 담긴 동서양 향신료 무역 역사
입력 : 2015.05.29 17: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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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는 아시아의 생선 액젓 베트남의 생선 간장인 넉맘, 태국의 생선 젓갈 남쁠라, 필리핀의 생선 액젓인 파티스 같은 음식이 케첩의 기원이다. 동남아 생선 소스가 낯설어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생선 액젓을 떠올리면 된다. 즉, 까나리 액젓이나 멸치 액젓이 서양으로 건너가 토마토케첩이 됐다는 이야기다.
토마토케첩은 주재료인 토마토를 설탕, 소금, 식초를 비롯한 갖가지 양념에 버무려 만든다. 케첩을 만드는 여러 재료 중에 생선 액젓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토마토케첩의 뿌리가 아시아의 생선 액젓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직접적인 흔적은 토마토케첩이라는 이름에 남아 있다. 토마토(Tomato)라는 영어 이름이 남미 원주민인 인디오 언어에서 비롯된 것처럼 케첩(Ketchup)이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 역시 중국 남부와 동남아 일대에서 쓰는 언어인 민남어(閩南語)가 뿌리다. 민남어는 지금의 중국 남부 복건성과 광동성, 그리고 타이완에서 쓰는 중국어 사투리와 동남아 말레이 계통 언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17세기 무렵의 동남아와 중국 남부에서는 생선 소스를 케첩이라고 불렀다. 물론 지역에 따라 케첩, 쿠에찹, 코에챱 등으로 발음이 조금씩은 달랐지만 모두 생선 액젓을 나타내는 말로 한자로는 규즙(鮭汁)이라고 적었다. 1873년에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가 발행한 민남어-영어 사전에서는 우리말로 ‘규즙’이라고 발음하는 생선 소스를 ‘쾨챱(Koe-Chiap)’이라고 부른다고 표기했다. 규(鮭)는 구체적인 생선으로는 복어나 연어를 나타내는 한자지만 일반적으로는 생선요리를 가리킬 때 물고기 어(魚)자 대신 쓰는 한자다. 즙(汁)은 국물이라는 뜻이니 쾨챱, 즉 규즙은 문자 그대로 생선으로 만든 즙, 생선 액젓이라는 의미다. 어원학적으로 토마토케첩의 뿌리가 동남아시아와 중국 남부지방에서 쾨챱이라고 부르는 생선 액젓에서 비롯됐다는 흔적이다.
물론 쾨챱과 케첩이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토마토케첩의 뿌리가 동남아의 생선 액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원뿐만 아니라 각종 문헌에서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1711년, 찰스 록키어라는 영국인이 쓴 <인도에서의 무역장부(An Account of The Trade in India)>라는 책에는 “가장 좋은 케첩은 통킹에서 온 것”이라며 “케첩은 중국에서 만드는데 값이 매우 싸다”고 적었다. 베트남 통킹만에서 만드는 생선 젓갈이 가장 맛있다는 소리고 아시아 현지에서는 값이 그다지 비싸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도 ‘케첩’의 어원을 ‘생선이나 조개를 절인 젓갈에서 비롯된 단어’라고 밝히면서 1699년에 발행된 문헌에서는 동인도에서 온 소스라고 언급되어 있다고 소개했다. 여러 문헌에 나오는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케첩은 17세기,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의 선원들이 유럽에 가져간 생선 액젓에서 발달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설이다. 케첩의 뿌리가 아시아의 생선 젓갈이고 케첩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중국어 사투리 내지는 동남아 언어에서 비롯됐다는 사실까지는 단순한 흥밋거리에 불과한 에피소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배경을 보면 뜻밖의 경제사를 발견할 수 있다.
생선 액젓이 토마토케첩으로 변신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토마토에 독성이 있다고 생각해 먹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케첩에 토마토를 넣은 까닭은 독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케첩의 제조원가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아시아에서 직수입한 고가의 생선 액젓 케첩이 세월과 함께 유럽에서 미국으로 전해지면서 서민들도 먹을 수 있는 저렴한 소스로 대중화된 것이다. 미국에서 토마토케첩이 널리 퍼진 것은 남북전쟁이 끝난 후인 19세기 후반으로 100개가 넘는 군소 토마토케첩 생산업체가 난립했고 그 과정에서 불량 토마토케첩이 쏟아져 나왔다. 참고로 토마토케첩은 보통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 용기에 담겨 있다. 이유는 안에 담긴 토마토케첩에 나쁜 첨가물을 넣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882년 투명한 용기의 케첩 병이 특허를 받으면서 군소 업체들이 정리됐는데, 처음 투명용기를 만든 주인공은 헨리 하인츠(Heinz)라는 사람이다.
케첩의 뿌리가 생선 액젓이라는 사실, 어원이 중국어 사투리라는 것도 흥미롭지만 케첩의 발달과정에는 세상을 바꾼 조미료 후추처럼 동서양 향신료 무역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사실도 새롭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6호(2015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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