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향기 뒤에 도사린 난징의 자존심

    입력 : 2014.04.08 17:18:20

  • 부자묘(夫子廟)  야경
    부자묘(夫子廟) 야경
    나는 중국의 도시 중에서도 난징(南京)을 특별히 좋아한다. 난징이 가지고 있는 아늑함을 좋아하고, 적당히 낡아 있는 역사적 흔적을 좋아하고, 도시와 사람들이 풍기는 인문적 분위기를 좋아하고, 산과 호수와 성벽이 이루는 풍경을 좋아하고, 수로를 따라 늘어선 꽃등불(花燈)과 고택(古宅)들이 연출하는 밤경치를 좋아한다. 그래서였겠지만 나는 중국의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난징에 자주 간 편이다. 어떤 때는 책을 사기 위해서, 어떤 때는 술이 마시고 싶어서, 어떤 때는 역사와 풍경에 이끌려서, 어떤 때는 사람이 보고 싶어서 남경에 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난징은 나를 다시 그곳으로 불러들이기에 충분한 인상과 매력을 선물하곤 했다.

    난징이 지닌 매력 중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구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 만들어내는 아늑함이다. 난징은 인구 700만 명이 넘는 대도시이지만 도시의 중심을 이루는 구 시가지가 주는 느낌은 중국의 다른 대도시처럼 번잡하지 않고 아늑하다. 그것은 내 생각으로는 구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 때문이다. 난징의 성벽은 높이가 13∼25m, 둘레가 34km로 도시를 둘러싼 성벽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지만 실제로 성벽 안의 거리를 걸어보면 크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난징의 성벽이 사람들이 보고 싶은 모든 것을 그 안에 품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고, 난징의 중심에서 외곽인 성벽까지 원주는 길어도 반지름은 짧은 것처럼 거리가 멀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부자묘(夫子廟)  야경
    부자묘(夫子廟) 야경
    명효릉(明孝陵)
    명효릉(明孝陵)
    내가 남경에 갈 때마다 머물렀던 숙소는 남경대학 구러우(鼓樓) 캠퍼스 근처의 호텔이거나 신졔커우(新街口) 전철역 근처의 호텔이었다. 구시가지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 호텔에서 출발하면 내가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모든 것들이 항상 반경 5Km 이내에 있었다. 명고궁(明故宮), 명효릉(明孝陵), 매화산(梅花山), 부자묘(夫子廟), 현무호(玄武湖), 중화문(中華門), 총통부(總統府), 서하사(棲霞寺) 등 난징에서 내가 자주 찾았던 풍경과 건축물과 유적들이 모두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 때문에 난징이 주는 느낌은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주는 느낌과는 달리 아늑했다. 그래서 난징에서는 머무르는 기간이 아무리 짧아도 서두르지 않고 보고 싶은 것을 한 두 가지쯤은 볼 수 있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에서와는 달리 목적지를 오가며 길거리에 낭비하는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현무호의 물안개를 감상하며 호수 속의 섬과 섬을 잇는 다리를 천천히 거닐어도 다음 약속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고, 성벽 위의 길을 따라 난징의 구 시가지를 감상하며 계명사(鷄鳴寺)를 거쳐 명효릉(明孝陵) 입구에 이르는 짧지 않은 길을 걸어도 열차나 비행기를 놓칠 염려가 없었다. 그럼에도 난징의 구시가지에는 갈 때마다 새롭게 찾아보아야 할 거리, 골목, 유적, 고택, 풍경, 서점, 음식점 등이 그지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난징은, 짧게 머무르면 짧게 머무르는 대로 길게 머무르면 길게 머무르는 대로, 항상 우리에게 머무는 기간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선물해주는 곳이다.

    난징이 지닌 두 번째 매력은 오랜 역사성으로부터 비롯하는 차분함이다. 난징은 2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 5대 고도(古都) 중의 하나로 꼽히는 곳답게 급속히 팽창한 현대 도시들이 보여주는 경박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우리가 난징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빠르게 번성하는 도시들의 시끄러운 난개발이 아니라 그러한 개발에서 한 발 물러나 고도의 풍모를 간직하며 차분하게 변모해 가는 모습이다.

    난징이라는 도시가 지닌 역사성과 그 역사성으로부터 오는 내면적 자부심과 외면적 차분함을 이해하자면 먼저 명고궁을 찾아 그 장대한 폐허의 쓸쓸함을 감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오로지 수많은 주춧돌로만 남아 그곳이 한 때 명제국의 심장부였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명고궁의 폐허에서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성벽과 호수와 운하와 거리와 집들을 만들어낸 핵심 에너지, 제국의 권력을 상상한다. 그 권력이 영락제(永樂帝)에 의해 베이징으로 옮겨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동쪽 성벽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종산풍경구(鐘山風景區)’에 들어서게 된다.

    ‘종산풍경구’에 들어서면 바로 마주치게 되는 것이 ‘매화산’이다. ‘매화산’을 3월 중순쯤 찾는 사람은 (나는 그런 행운을 두 번밖에 누리지 못했지만) 은은하게 온 산을 가득 메우며 도시로 번져가는 매화향기와, 매화나무 아래에서 이제 막 푸른색을 더하기 시작하는 우화차(雨花茶)와 마주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향기와 색깔에 취해 명고궁의 폐허에서 받은 충격을 역사적 시간 속으로 떠밀어 넣으며, 동오의 손권(孫權) 무덤과,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무덤과, 중화민국의 손문(孫文) 무덤을 향해 발길을 옮길 수 있다.

    매화산에 자리 잡은 손권의 무덤은 주원장의 무덤으로 가는 길에 스치듯 지나가야 한다. 아니 오랜 역사 속에 너무나 깊이 파묻혀 있어서 그렇게 지나칠 수밖에 없다.

    오로지 손권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을 통해서만 난징을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한 인물이 그곳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묘역과 조각과 건축과 능묘가 말해주는 절대권력의 크기에 경악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주원장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던 오함(吳晗)이 잔혹한 도살자로 규정한 인물의 장대한 무덤 앞에서, 그를 기리는 비석 앞에서 분노하고 절망했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치 황제의 무덤에 방불한 손문의 무덤 앞에서 다시 분노하고 절망했다. ‘역사란 과연 이런 것인가!’란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감정은 다시 난징 시내로 들어서면서 이 도시가 지닌 차분함 앞에서 가라앉고 있었다. 모든 것을 겪고 기억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차분해진 난징이란 도시 속에서 나의 흥분이 어색해졌기 때문이었다. 난징이란 도시 속에서 내가 갑자기 랭보의 ‘오, 세월이여. 뭇 성곽들이여.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란 시구를 떠올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난징이 가진 세 번째 매력은 난징 사람들이 지닌 품위와 자존심이다. 나는 얼마 전 남경대학이 셴린(仙林) 지역에 새로 조성한 캠퍼스를 방문했을 때 받았던 인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캠퍼스의 정문에서 학교의 중심에 자리 잡은 중앙도서관을 향해 뻗은 넓고 곧은 길을 따라 걸어가는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길게 누워있는 직사각형의 커다란 돌비석이었다. 그리고 그 비석에는 ‘국립중앙대학교(國立中央大學校)’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그 글씨는 장개석(蔣介石) 정권에서 국립서울대학의 역할을 한 남경대학이 지금도 여전히 중국 제일의 대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에게 그 비석은 마치 난징 사람들이 내면에 숨기고 있는, 제국의 수도에 사는 사람에 걸맞은 품위와 자존심의 상징처럼 보였다.

    난징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품위와 자존심은 다른 무엇보다 난징의 오래된 골목, 가난한 골목길을 거닐어 보면 잘 느낄 수 있다. 난징의 가난한 골목은 다른 도시의 가난한 골목처럼 시끄럽지 않다. 다투고 떠드는 소리가 거의 없는 대신 그 초라한 외모 속에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낡은 집들과 그 집처럼 낡아 있으면서도 품위 있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조용히 이 고장 특색의 음식을 만들어 파는 조그만 가게들이 숨어 있다. 나는 난징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인문적 분위기를 사랑하고 좋아한다. 또 나는 부자묘 일대의 거리가 지니고 있는, 품위 있게 퇴폐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아마도 부자묘 일대의 퇴폐적 분위기와 밤문화는 난징이 베이징과 함께 과거시험을 치는 장소로 정해지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과거시험을 치기 위해 부자묘 근처에 일종의 고시촌을 형성하면서 울분을 토하고 장기간의 시험준비에 지친 심신을 달래야 할 필요성 때문에 공자님을 모신 부자묘 근처에 유흥가가 만들어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다. 나는 난징이 가진 이러한 숨구멍의 인문적 의미를 좋아한다.

    중산릉(中山陵)
    중산릉(中山陵)
    그렇지만 난징이 가진 것 중에 내가 싫어하는 것도 있다. 난징의 여름 더위와 겨울 추위가 바로 그것이다. 난징의 여름 더위는 중국의 3대 화로 중 하나로 알려진 만큼 너무나 유명해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난징의 추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난징은 지리적으로 강남지방에 속하고 좀처럼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는 법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동북지방의 어떤 도시보다도 춥다. 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고향이 동북지방인 최 선생 부부는 남경에 살 때 겨울이 오면 만주 벌판 한가운데 있는 장춘으로 옮겨가곤 했었다. 중국의 난방정책 탓에 남경의 추위를 견디기 어려워서였다. 남경의 겨울은 난방을 못하게 하는 정책 때문에 실외보다도 실내가 훨씬 춥다. 낮이 되면 실외의 온도는 올라가지만 실내의 온도는 거의 올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섭씨 0도에서 5도 사이의 냉기가 방안을 냉장고의 냉장실처럼 만드는 것이 남경의 겨울이다. 그럼에도 나는 봄보다는 겨울에 남경을 찾아가곤 했다. 강남지방의 겨울 추위 때문에 광주에서는 몸살을 앓았고, 상해에서는 감기에 걸렸으며, 남경에서는 온몸이 난쟁이처럼 오그라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늘 강남지방을 겨울에 여행했다. 나는 한국사람이었고 겨울이 오면 강남으로 가는 제비처럼 무의식중에 강남지방은 따뜻하다고 생각하며 난징으로 길을 떠나곤 했다. 그리고는 시도 때도 없이 부슬부슬 내리는 난징의 찬비를 맞으며 봄을 절실하게 그리워하는 사람은 정작 북방사람이 아니라 남방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3호(2014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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