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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향기 뒤에 도사린 난징의 자존심
입력 : 2014.04.08 17: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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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묘(夫子廟) 야경
난징이 지닌 매력 중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구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 만들어내는 아늑함이다. 난징은 인구 700만 명이 넘는 대도시이지만 도시의 중심을 이루는 구 시가지가 주는 느낌은 중국의 다른 대도시처럼 번잡하지 않고 아늑하다. 그것은 내 생각으로는 구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 때문이다. 난징의 성벽은 높이가 13∼25m, 둘레가 34km로 도시를 둘러싼 성벽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지만 실제로 성벽 안의 거리를 걸어보면 크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난징의 성벽이 사람들이 보고 싶은 모든 것을 그 안에 품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고, 난징의 중심에서 외곽인 성벽까지 원주는 길어도 반지름은 짧은 것처럼 거리가 멀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부자묘(夫子廟) 야경 명효릉(明孝陵)
난징이 지닌 두 번째 매력은 오랜 역사성으로부터 비롯하는 차분함이다. 난징은 2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 5대 고도(古都) 중의 하나로 꼽히는 곳답게 급속히 팽창한 현대 도시들이 보여주는 경박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우리가 난징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빠르게 번성하는 도시들의 시끄러운 난개발이 아니라 그러한 개발에서 한 발 물러나 고도의 풍모를 간직하며 차분하게 변모해 가는 모습이다.
난징이라는 도시가 지닌 역사성과 그 역사성으로부터 오는 내면적 자부심과 외면적 차분함을 이해하자면 먼저 명고궁을 찾아 그 장대한 폐허의 쓸쓸함을 감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오로지 수많은 주춧돌로만 남아 그곳이 한 때 명제국의 심장부였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명고궁의 폐허에서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성벽과 호수와 운하와 거리와 집들을 만들어낸 핵심 에너지, 제국의 권력을 상상한다. 그 권력이 영락제(永樂帝)에 의해 베이징으로 옮겨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동쪽 성벽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종산풍경구(鐘山風景區)’에 들어서게 된다.
‘종산풍경구’에 들어서면 바로 마주치게 되는 것이 ‘매화산’이다. ‘매화산’을 3월 중순쯤 찾는 사람은 (나는 그런 행운을 두 번밖에 누리지 못했지만) 은은하게 온 산을 가득 메우며 도시로 번져가는 매화향기와, 매화나무 아래에서 이제 막 푸른색을 더하기 시작하는 우화차(雨花茶)와 마주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향기와 색깔에 취해 명고궁의 폐허에서 받은 충격을 역사적 시간 속으로 떠밀어 넣으며, 동오의 손권(孫權) 무덤과,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무덤과, 중화민국의 손문(孫文) 무덤을 향해 발길을 옮길 수 있다.
매화산에 자리 잡은 손권의 무덤은 주원장의 무덤으로 가는 길에 스치듯 지나가야 한다. 아니 오랜 역사 속에 너무나 깊이 파묻혀 있어서 그렇게 지나칠 수밖에 없다.
오로지 손권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을 통해서만 난징을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한 인물이 그곳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묘역과 조각과 건축과 능묘가 말해주는 절대권력의 크기에 경악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주원장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던 오함(吳晗)이 잔혹한 도살자로 규정한 인물의 장대한 무덤 앞에서, 그를 기리는 비석 앞에서 분노하고 절망했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치 황제의 무덤에 방불한 손문의 무덤 앞에서 다시 분노하고 절망했다. ‘역사란 과연 이런 것인가!’란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감정은 다시 난징 시내로 들어서면서 이 도시가 지닌 차분함 앞에서 가라앉고 있었다. 모든 것을 겪고 기억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차분해진 난징이란 도시 속에서 나의 흥분이 어색해졌기 때문이었다. 난징이란 도시 속에서 내가 갑자기 랭보의 ‘오, 세월이여. 뭇 성곽들이여.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란 시구를 떠올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난징이 가진 세 번째 매력은 난징 사람들이 지닌 품위와 자존심이다. 나는 얼마 전 남경대학이 셴린(仙林) 지역에 새로 조성한 캠퍼스를 방문했을 때 받았던 인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캠퍼스의 정문에서 학교의 중심에 자리 잡은 중앙도서관을 향해 뻗은 넓고 곧은 길을 따라 걸어가는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길게 누워있는 직사각형의 커다란 돌비석이었다. 그리고 그 비석에는 ‘국립중앙대학교(國立中央大學校)’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그 글씨는 장개석(蔣介石) 정권에서 국립서울대학의 역할을 한 남경대학이 지금도 여전히 중국 제일의 대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에게 그 비석은 마치 난징 사람들이 내면에 숨기고 있는, 제국의 수도에 사는 사람에 걸맞은 품위와 자존심의 상징처럼 보였다.
난징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품위와 자존심은 다른 무엇보다 난징의 오래된 골목, 가난한 골목길을 거닐어 보면 잘 느낄 수 있다. 난징의 가난한 골목은 다른 도시의 가난한 골목처럼 시끄럽지 않다. 다투고 떠드는 소리가 거의 없는 대신 그 초라한 외모 속에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낡은 집들과 그 집처럼 낡아 있으면서도 품위 있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조용히 이 고장 특색의 음식을 만들어 파는 조그만 가게들이 숨어 있다. 나는 난징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인문적 분위기를 사랑하고 좋아한다. 또 나는 부자묘 일대의 거리가 지니고 있는, 품위 있게 퇴폐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아마도 부자묘 일대의 퇴폐적 분위기와 밤문화는 난징이 베이징과 함께 과거시험을 치는 장소로 정해지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과거시험을 치기 위해 부자묘 근처에 일종의 고시촌을 형성하면서 울분을 토하고 장기간의 시험준비에 지친 심신을 달래야 할 필요성 때문에 공자님을 모신 부자묘 근처에 유흥가가 만들어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다. 나는 난징이 가진 이러한 숨구멍의 인문적 의미를 좋아한다.
중산릉(中山陵)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3호(2014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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