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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 교수의 중국문명 기행]① 황하의 현재와 문명의 미래
입력 : 2013.12.20 11: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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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큼 동북아시아 문명권의 사람들은 황하에 대한 일종의 외경심과 원초적인 그리움을 가지고 있으며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나에게 황하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을 직접적으로 심어준 것은 할아버지지만 자란 후 틈날 때마다 황하를 찾게 만든 것은 황하가 동북아시아 문명의 모태라는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내 나이가 5-6살이었던 시절 할아버지는 천자문을 가르치는 틈틈이 ‘요순(堯舜)시대’가 얼마나 이상적인 태평성대였는지를 자주 이야기했다. 당시 나는 아무런 지식도 없이 할아버지의 말씀을 그저 옛날이야기의 하나쯤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동북아시아의 유토피아를 건설한 것으로 기억되는, 이 전설적인 ‘요순’이란 두 성군이 황하의 홍수문제와 씨름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20살 이후 중국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였다.
20세기 중반 중국이 근대적인 토목기술에 힘입어 황하의 수량을 통제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들이 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바로 황하의 홍수문제였다. 과거 수천 년 동안 문명의 중심지였던 중원지방,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던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난폭한 황하의 홍수에 대해 얼마나 큰 두려움을 가졌을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황하를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도 이런 점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요순(堯舜)시대’라는 전설적인 파라다이스는 사실의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중원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이 가졌던, 이상세계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옳다. 황토입자로 뻑뻑해진 황하가 범람하는 공포와 홍수 없는 시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만들어낸 일종의 희망이다.
황하 호구폭포 (위)중국 용 사진 난징에서 서해 상징인 용 모양 등을 설치하는 모습, (아래)삼문협
1945년부터 1947년에 걸쳐 쟝졔스가 폭파한 황하의 제방을 튼튼하게 수리하여 황하가 북쪽의 옛 물길로 다시 흐르게 만든 것은 미국 출신의 토목기술자 O. J. 토드(Todd)였다. 1919년에 중국에 온 O. J. 토드는 자기 직업에 대해 신비적 신념을 가진 엔지니어였다. 그는 중국 인민들에게 수천 년 동안 경외의 대상이었던 난폭한 황하를 자신이 가진 합리적 과학기술로 순치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며, 그 신념을 혼신의 힘을 다해 실천해 나간 사람이었다. O. J. 토드는 황하를 인간이 자비를 구걸해야할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교육하고 길들일 수 있는 사람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그는 이 신념을 다음처럼 표현했다. “나는 엔지니어로서 모든 비의 신이 왕좌에서 추방되어 잊혀지고, 청동암소가 제방에서 철거되고, 용신을 달래는 제사가 준공식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며, 그 대신 하천수력학이라는 과학에 대한 숭배가 성행하기를 원한다”라고.
이러한 믿음과 의지로 O. J. 토드는 일본과의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도 황하가 “인간의 의지에 따르도록, 인간이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게 일정한 수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토목사업에 매진했다. 그는 장개석과 모택동이 중국의 헤게모니를 놓고 치열하게 싸울 때도 군사·정치적인 문제로부터는 완벽한 중립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을 번영시키고 가난에 신음하는 인민들을 구제할 수 있는 길은 수리관개 시설을 잘 갖추고 오지에 도로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이후 O. J. 토드가 가졌던, 과학적 지식과 기술에 대한 믿음을 잘 학습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엔지니어들에 의해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오로지 하느님이 보우하사만을 빌던 시대는 끝났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엔지니어들은 란저우(蘭州) 근처에 유가협(劉家峽) 댐을 건설하고, 뤄양 근처에 삼문협(三門峽) 댐을 지음으로써 요임금이나 순임금처럼 황하의 물을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관리하던 시대는 전설 속의 일로 만들었다.
이 같은 생각에 잠겨 한 시간 가까이 강가를 산책하는 내 앞에 아침 6시의 황하는 드넓은 강폭을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구에 가까운 지난에서 바라본 황하는 6000킬로미터를 달려온 강답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폭이 넓었으며, 백년하청(百年河淸)이란 말과 “물이 열 말이면 진흙이 여섯 말”이란 말을 만들어 낸 것처럼 혼탁했다. 그렇지만 강물은 드넓은 강폭의 중심에서만 참으로 초라하게 흐르고 있었다. 상류에서 농업용수로 많은 물을 소비하고 두 개의 거대한 댐이 만들어진 탓이었다. 그 결과 옛날부터 맑은 우물로 유명했던 지난 일대는 황하의 수위가 낮아짐으로써 우물이 고갈되고 땅이 건조해지는 현상이 가속화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내가 상류인 청해성에서 보았던 푸른 황하는 자연의 강이었지만 하류인 지난, 캐펑, 정저우에서 본 황하는 자연의 강이 아니었다. 중원지방의 황하는 인간에 의해 끔찍할 정도로 훼손돼 야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맥없이 흐르고 있었다. 황하연변의 사람들이 새로운 근대적 기술로 황하를 길들여서 강의 몸통에서 한 방울이라도 더 많은 피를 빼내기 위해 각축을 벌였기 때문이다. 황하의 물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기에 각 성(省)별로 사용량을 일정하게 할당하는 협정까지 맺었겠는가!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순치된 황하, 자연의 야성을 상실한 황하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우리 인간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재앙을 낳고 있다. 일찍이 찬란한 동북아시아 문명의 발원지이자 중심지였던 중원지방이 날로 사막화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위험성이 없어진 황하가 새로운 문제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황하와 마주칠 때마다 인간의 문명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낼 뿐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나의 발길은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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