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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⑫ 김종학 PD, 고맙습니다
입력 : 2013.09.03 09: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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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전쟁터 피로 물든 들녘 낯선 땅에 쓰러진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희디흰 학이 되었으리라고… 그런 노랫말로 시작되는 이 러시아 노래가 그토록 우리 땅을 뒤엎었던 건 SBS 드라마 <모래시계> 때문이었다. 그때를 산 사람들은 잊지 않고 기억하리라. <모래시계> 방송시간을 기다리던 그 즐거움과 한 회가 끝날 때마다 이오시프 꼬브존의 장중한 목소리로 울리는 ‘백학’과 함께 떠오르던 김종학이라는 이름을. 김종학 PD.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아 그가 남긴 작품들을 생각하며 내가 새삼스레 떠올린 말은 ‘그가 우리에게 준 기쁨’이었다. 긴 장마 속의 끈적거리는 습기보다도 더 몸에 들어붙는 암울한 슬픔으로 다가섰던 김종학 PD의 죽음, 영광과 나락이 함께 하는 김종학 PD의 삶을 놓고 방송극 제작의 현실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의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왜 그가 우리에게 준 기쁨을 생각하지 않는 걸까. 어디에서도 ‘김 피디, 고마웠습니다’하는 감사의 말을 찾아볼 길이 없는 또 다른 방송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전히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있으리라. 권투선수 홍수환이다. 오래전 권투해설을 하는 그의 나이든 모습을 TV에서 보았다. 선수시절 홍수환의 그 싱싱함과 세련미를 잊지 못하는 나로서 중년남자의 시원스레(?) 벗겨진 머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경악 그 자체였다.
그것조차 요즈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싶었던 홍수환을 며칠 전 어느 안과병원 로비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벽에 붙어 있는 노안수술을 안내하는 광고성 기사였다. 아 그런가. 이런 것이 인생인가. 가슴 뭉클해하며, 확대까지 해서 병원 로비에 붙어 있는 그 기사를 바라보았었다. 탄식이 나올 정도로 잘 다듬어진 몸매와 수려한 얼굴로 링 위에 선 그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차라리 노안수술을 받아야 하는 나이에 이른 그의 인생 자체가 감동이었다.
홍수환의 선수시절은 오늘날의 TV 위성방송 시대가 아니었다. 축구에서 권투까지도 대부분의 스포츠 현장중계를 라디오 아나운서의 목소리로나 듣던 그 시절, 그때 홍수환은 누구였던가.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세계챔피언에 올랐을 때, 열악한 국제전화 사정으로 목소리가 썰물처럼 솨아솨아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들리는 전화 인터뷰에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말로 국민을 즐겁게 했던 이름, 챔피언 벨트를 잃은 후 절치부심 끝에 다시 맞은 챔피언 도전에서 네 번이나 다운 당하고 5번째 일어나 상대를 KO시키면서 국민 모두에게 통쾌한 기쁨을 전해준, 그 이름이 홍수환이었다. 그러나 그와 한 여가수와의 사랑이 알려지면서 우리의 모든 미디어는 광분하듯 홍수환을 매도해 나갔었다. 불륜은, 그들에게는 운명적인 만남이라 해도 대중의 스타가 가져야 할 몸가짐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나 적히던 ‘품행이 방정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으련만 스포츠 스타도 인간이 아닌가. 아내를 두고도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때 생각했었다. 왜 우리는 이럴 때 그가 우리에게 안겨준 지난날의 기쁨을 생각해서라도 그의 개인적인 어려움을, 불행한 사랑을, 정서적 고난을 안타까워해줄 수조차 없는 것인가.
그 후 홍수환이 은퇴를 앞둔 무렵, 또 다른 세계 챔피언 염동균 선수와의 대전을 나는 정동에 있던 문화체육관에서 보았다. 영원한 맞수 염동균을 맞아 링에 오른 그의 몸은 여전히… 얼마나 아름다웠었던가.(저는 동성애자가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1995년에 방송된 SBS 드라마. 50.8%를 기록했다는 평균 시청률,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묘사한 24부작으로 <모래시계>를 떠올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 드라마 때문에 모스크바 여행에서 러시아 노래를 사기 위해 하루 내내 CD점에서 보내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었다는 그것만으로도 나는 김종학이 고맙기 그지없다. 김종학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아 <모래시계>의 재방을 편성했다는 소식뿐 나는 그에 대한 어떤 추모방송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놀랄 정도로 우리 방송은 그의 ‘위대한 작품’에 침묵했고 ‘영광과 질곡’이 얼룩진 생애를 진지하게 돌아봄을 도외시했다. 나는 그와 단 한 번 짧은 만남을 가졌었다. 내 장편소설 <유민>의 드라마 저작권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시기가 의외였다. 월간지 <신동아>에 연재를 시작해서 첫 회가 나간 시점에 놀랍게도 PD가 드라마를 만들겠다면서 저작권을 선점하러 왔던 것이다. 완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그때 이야기 하시지요”하는 말이 오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의 꾹꾹 박아 넣는 듯 하던 느린 말투와 거기 묻어나던 열정만은 깊이 기억에 남았다.(작품 <유민>은 3년여의 연재 끝에 3부작으로 끝났지만, 드라마로 제작되기는커녕 그걸로 그냥 끝이었다. ‘아하, 그때 김종학 씨한테 후딱 팔아먹었어야 하는데!’ 후회해도 이미 물 건너 간 이야기다.) 강연이 있어 삼천포엘 갔다가 그곳 바닷가에 세워 놓은 ‘삼천포 아가씨 노래비’가 아닌 ‘삼천포 아가씨상’을 보며 즐거웠던 적이 있다. 아가씨상은 갯바위에 걸터앉은 여인상이었는데 사람이 다가가면 ‘비 내리는 삼천포에 부산 배는 떠나간다 / 어린 나를 울려놓고 떠나가는 내 님이여’하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망망한 바다를 내다보며 앉아 있는 여인상은 겨울이라 추울까봐 누군가가 둘러주고 간 목도리가 바닷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그것을 그리워하며 기리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닌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DJ 이종환도 마찬가지다. 그의 목소리를 향수(享受)했던 한 시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와 함께 불면의 밤을, 사랑에 눈뜨는 젊은 날의 한 시절을, 위안과 기쁨으로 설레며 보냈던가. 그런 그를 우리는 어떻게 보냈던가. 마지막 길을 떠나보내며 이 불세출의 DJ가 남긴 생전의 목소리를 어느 방송에서도 들을 길이 없었다. 그가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준 기쁨에 감사하고, 함께 나눈 사랑에 뜻 깊은 리본을 달아주며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추억이 없는 삶을 만들어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김종학, ‘아 그런가. 그런 것이었던가’하며 그가 남긴 빈 자리를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채우고 싶다. 그렇게, 희디흰 학이 되어 떠나가는 그의 앞에 꽃을 놓고 싶다. 긴 장마가 이어지는 2013년의 여름, 오늘 자작나무 밑에 우산을 받고 서서 비 내리는 남한강을 내다본다. 어느새 그들이 가는가. 나는 아직 여기 서 있는데… 함께 가지 않고, 먼저 그들이 가는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6호(2013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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