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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⑩ 술은 있으나 술잔이 없다
입력 : 2013.07.15 0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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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경기도 이천 쪽의 산자락 밑에 가마를 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봄날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둘러 내려오라는 느닷없는 전화였다. 내려오라는 뜻이 황홀했다. 뒤뜰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복사꽃이 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그 나무 밑에 술상을 마련했으니 어서 내려와 한잔하자는 것이었다.
친구의 도예공방 뒤뜰에 차려진 복사나무 밑에서 술잔을 들며 그렇게 그해 봄은 무르익었었다. 언제 어디서 만나도 날줄과 씨줄로 결이 맞는 좋은 친구가 있고 떨어져 내리는 꽃잎이 있고 거기 술과 이야기가 어울려 질펀했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바람이 불어오면 지는 복사꽃잎이 술잔 위에도 내려앉았다.
늘 느끼는 것이었지만, 이 친구의 집에 가면 다른 곳에서 느끼지 못하는 즐거움이 또 하나 있었다. 그가 쓰는 그릇들이다. 밥그릇, 국그릇에서부터 초고추장 종지까지 상 위에 오르는 모든 그릇이 자신이 구운 그릇들이다. 젊은 도예가로 각광을 받으며 이름을 세운 후 분청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 그 하나하나의 그릇들이 범상치가 않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그릇들, 쪼르르 그놈이 그놈인 그릇도 아닌데다가 나름대로의 쓰임새에 따라 크기와 깊이가 다르게 자신이 빚은 그릇들이니, 음식을 먹는 즐거움만큼이나 그 그릇들을 보는 맛 또한 즐거움의 하나가 되어 일렁거렸다.
어찌 그 그릇들이 탐나지 않으랴. 한번은 막걸리를 담아 술상에 내놓았던 호리병을 ‘이건 내가 가져가야겠다’고 우겨서 떼를 쓰듯 들고 온 적도 있다. “얼마를 낼까요”하고 물었더니 그 아내가 하던 말이 또 그 호리병만큼이나 격이 있었다. “흙 값만 내세요.”
이 친구가 어쩌다가 아주 어쩌다가 자신이 쓰기 위해 구워낸 그릇을 두세 점 보내올 때가 있다. 몇 해 전에도 그랬다. 부쳐온 박스를 풀어보니 옹기 빛깔이 나는 동그란 잔이 딱 두 개였다. 손바닥 안에 폭 안기는 크기였다. 그런데 첫 느낌이 통통하다고나 해야 할 그 잔의 모양이나 크기가 무엇에 쓰자는 잔인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술잔이라고 하기에도, 찻잔이라고 하기에도.
그가 껄껄거리며 들려준 사연, 잔을 만들게 된 사연에는 그 잔의 크기만큼이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쓸쓸함이 있었다. 평생 녹차를 마셔온 친구였다. 차를 따를 때 결코 주둥이에 붙어서 물이 질질 흐르지 않는 절묘한 다완을 만들어내던 그였다. 나도 그가 만든 차 도구들을 그래서 아끼며 써 왔는데, 그런 그가 이제는 차 마시는 그릇은 안 만들기로 했다면서 풀어놓은 이야기에는 직업병이라고나 말해야 할 슬픔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평생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다리에 불편함이 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식당에서 의자에 오래 앉아 있자면 다리가 저린다면서 옆 자리의 의자를 당겨 발을 올려놓던 그가 생각났다. 그저 그러려니 했었는데 본인이 느끼기에는 좀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의사로부터 녹차의 어떤 성분이 다리를 저리게 하는데 영향을 주고 있으니 녹차를 끊으라는 처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실 수 없게 된 녹차 대신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그래서 자신이 만든 에스프레소 잔을 몇 점 보냈다는 것이었다.
무슨 놈의 에스프레소 잔이 이 모양이람. 잔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친구가 자기 손아귀에 포근하게 잡히도록, 자기 입술에 따스하게 와 닿도록 만든 그 손잡이도 없는 에스프레소 잔을 나는 그 후로 정종 마실 때나 쓰고 있다.
그랬던 그가 좀 더 시간이 지나서 보내온 물건 가운데 커피 잔이 있었다. 절묘했다. 둥근 전(윗 테두리)에 몸통에는 각을 준 특이한 모습이었는데, 그 얇은 전이 입술에 닿는 맛이 ‘어라 뭐 이런 게 다 있어’ 싶게 감미로울 정도였다. 찻잔이 입술에 닿는 느낌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역시, 대가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왜 우리나라에는 술잔이 없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듯 물은 적이 있었다. 도대체가 식당에서 내놓는 그 유리 소주잔이 나는 싫다. 설거지를 제대로 안 해서 고춧가루가 묻어 있거나 벌레라도 빠져죽어 있는 것만큼이나 끔찍하게 싫다. 회사 상표나 그 못난 글씨체의 소주 로고가 비쭉 얼굴을 내밀고 있는 소주잔을 보고 있자면 안 할 말로 술맛이 싹 달아난다. 이런 잔에 입술을 대며 그 좋은 술을, ‘술은 신의 눈물이다’라고까지 한때 정의했던 그 귀한 술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 술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느껴진다.
왜 우리는 음식과 그릇의 조화에 이처럼 무딘 것일까. 입구에서부터 좌르르 여종업원이 도열하는 일식집에 저녁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내 돈 내고 이런 집에서 술을 마실 리가 결코 없는 그 일식집에서는 음식이 나올 때마다 “이건 오늘 아침 일본에서 공수해 온 무엇 무엇입니다”라면서 생선 이름을 읊어댔다. 그날의 일이었다. 생선에 맞게 일본 술을 시켰는데 앞에 놓이는 술잔이, 이것을 어쩔 것인가. 한국 무슨 술회사와 양주 이름이 적인 판촉물 술잔, 그것도 양주잔이 아닌가.
고등학교 시절 소설로 알게 된 술의 하나가 프랑스의 압생트였다. 전쟁이 휩쓸고 있는 유럽의 암울함 속에서 파리로 망명한 사람들이 음울하게 오가는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는 참으로 많이 ‘그들은 압생트를 마셨다’라는 표현이 나왔다. 이 슬픈 주인공이 마시는 압생트는 도대체 어떤 술일까.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3층 도서관에서 소설을 읽으며 만난 여인,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 나오는 여인 ‘알리사’처럼 나는 압생트라는 술과 남몰래 짝사랑을 품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넘게 흐른 후 내 생애 처음 파리에 갔을 때, 숙소에 여장을 풀고 그날 처음 마셔본 술이, 무색의 술에 물을 부으면 푸르게 색깔이 변하던 그 압생트라는 술의 환상이었다. 술이란 그런 것이고, 그렇게 자리매김해야 할 가치와 환희가 있는 음식이다. 이다지도 술을 좋아하고 이다지도 술을 많이 마시고, 양주 수입을 이토록 많이 한다는 나라에서 왜 우리의 술잔을 안 만들고, 우리의 술잔이 없는 것일까.
포도주에는 포도주 잔이 있다. 위스키에는 위스키 잔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막걸리에는 막걸리잔이 없다. 소주에도 소주잔이 없다. 술 회사 ‘판촉물 잔’이 있을 뿐이다. 그것마저도 회사 로고가 덜 씻은 그릇의 고춧가루처럼 붙어 있을 뿐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4호(2013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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