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 들을 위한 노래

    입력 : 2013.06.07 14:3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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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으로 이뤄진 관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은 계약자를 우리는 관용적으로 ‘갑’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현대레알사전’에서는 이 ‘갑’을 어떻게 정의할까? 법과 규칙은 물론 성과와 흑자는 다 내 몫이고, 복종이나 봉사라든가 실패나 적자는 다 니들 몫이라 믿는 자들이 ‘진(짜)갑’이다. 재벌은 중소기업체장들에게 갑이고 중소기업체장은 영업소장들에게 갑이고 영업소장은 영업직원들에게 갑이다.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닥치고구직희망자들에게 갑이고, 고위권력자는 하위권력자와 업자들에게 갑이다. 이 먹이사슬의 최상층부에 위치한 자들을 일컬어 ‘슈퍼갑’이라 한다. 마음대로 채용하고 해고하고, 쌓이는 재고를 강제적으로 떠넘기고, 마음에 안 들면 폭언하고 폭행하고, 마음이 동하면 시도 때도 없이 허락도 없이 남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자들을 일컬어 ‘진(상)갑’, ‘막(돼먹은)갑’, ‘꼴갑’이라 하고 동명사 형태로는 ‘갑질’이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갑을관계로 표면화되면서 ‘을’의 권리보호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을들이 갑작스럽게 출현한 것은 아니다. 돈과 계약을 매개로 무한경쟁에 내몰린 신자유주의 사회의 일단면이 반영된 명칭의 변화일 뿐, 을로 지칭되는 사회적 다수는 대대로 민초(民草), 민중과 노동자, 대중과 다중 등으로 불려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김수영, <풀>)나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신경림, <파장(罷場)>)은 각각 50년대와 70년대를 대표하는 을들을 위한 노래였다. 정의로운 혹은 윤리적인 갑을관계의 재정립에 대한 요구의 일환으로,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슈퍼갑의 횡포와 그로 인한 피해 사례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현행 공정거래법에서도 부당하게 갑의 지위를 이용해 을을 구속하는 행위를 불공정거래행위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는 있다. 그러나 약자인 을이 자신들을 ‘구속하는 행위’를 고소고발하기란 자신의 목줄을 내걸어야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구속하는 행위’를 법적으로 증명하기도 쉽지 않다. 설령 고소고발을 통해 ‘구속하는 행위’를 증명한다 해도 그 처벌규정이란 것이 갑에게 과태료 몇 푼 부과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사실상 을들이 법적으로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이 같은 반성 속에서 정치권이 일명 ‘갑 횡포 방지법’ 입법 추진에 나섰다. 공정거래법 개정안 발의를 추진 중이거나 특별법 등 새 법률 제정 검토에 들어갔다.

    갑론을박(甲論乙駁)이라는 말이 있다. 어부 삼형제가 날아가는 새를 보고 맏형은 삶아 먹자, 둘째는 구워 먹자, 막내는 삶은 후에 구워먹자며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사이 새는 날아가 버렸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상대편의 말이나 글의 잘못된 부분을 헐뜯는, 서로간의 소모적인 논쟁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삼형제가 모두 새를 잡자는 것과 맛있게 먹자는 것에 동의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수평적인 관계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그 갑론을박을 통해 합당한 혹은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냈는가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어부 삼형제가 날아가는 새를 어떻게 잡고 또 어떻게 먹을 것인가 하는 합의를 찾아냈다면, 아니 자신의 주장이 무의미했음을 깨닫기만 했더라도, 그들의 갑론을박은 충분히 유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이자 방법이었음에 틀림없다. 새들은 늘 날아다니고, 날아간 새는 또 날아올 것이기에.

    그러므로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도 갑론하고 을박할 수 있어야 한다. 지배자 피지배자, 고용인과 피고용인, 상급자와 하급자, 권력자와 피권력자, 강자와 약자가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정당하고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갑론이 일방적인 겁박이 되지 않고 을박이 상명하복에 의한 피박이 되지 않으려면, 대다수 을들의 반박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을박이 ‘늘을’의 푸념이 되지 않고 ‘을 중의 을’의 울분이 되지 않으려면, 갑론을 향해 제대로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갑과 을의 관계는 일방적이고 위계적이고 고착화된 회로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쌍방적이고 입체적이고 유동적이어야 한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는 갑을만 있는 게 아니다. 병도 있고 정도 있다. 갑을에서 갑을병정으로 다양화될 때, 갑을병정이 조화롭게 소통할 때, 서로 다른 우리의 목소리들이 조화와 화음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추신수는 좌중간 적시타를 쳤다/ 이동국은 월드컵에서 첫 골을 넣지 못했다/ 갑과 을은 상황에 따라 위치가 변한다’-최승철, <갑을시티 2> 오늘의 갑이 어제의 갑이 아니었듯, 오늘의 을이 내일의 을인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소득이 낮은 근로자 B씨/ 은퇴한 사업가 C씨/ 사무직 근로자 D씨/ 편의점 알바생 A씨/ 이들은 모두 고시원에 산다/ 을은 소통한다 그러므로 망치는 무겁다’-최승철, <갑을시티 1> 우리 사회의 대다수는 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을들은 따닥따닥 이웃해 살고 있고 또 서로 소통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한 목소리를 낼 때 그들은 벽돌처럼 단단해지고 망치처럼 강해진다는 것이다. 을들의 분노, 을들의 반격, 을들의 반란, 을들의 회군, 을들의 혁명… 이름만 달랐을 뿐,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이미 검증된 익숙한 서사가 떠오르지 않는지.

    그러니 세상 모든 을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임을 을들 자신부터 잊지 말았으면 한다. 오늘의 을들이야말로 우리의 미래임을 우리 모두가 잊지 않았으면 한다. 세상 모든 을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고, 바람보다 빨리 눕고 그 어떤 바람에도 바람보다 빨리 일어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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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끝별 시인, 명지대 교수]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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