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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의 브라보 클래식]성직자가 된…바람둥이 음악가 리스트
입력 : 2013.06.07 14: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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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 작품을 연주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
600여곡에 달하는 리스트의 피아노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 곡은 그의 스승인 체르니에게 바쳐졌다. 1826년 처음 작곡돼 25년에 걸쳐 수정 보완됐으니 작곡가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이 곡은 ‘초절’이란 말 대신 ‘탁월’이란 단어가 적합할 정도로 빛나는 피아니시즘을 보여준다. 손가락을 끊임없이 혹사시키지만 열정과 자유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준다. 점차 가열되며 절정을 향해 치닿는 피아노 선율은 질풍노도의 인생을 그렸다. 때로는 거칠고 어느 대목에서는 아주 감미롭다.
현란한 피아노 기교 청중을 홀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작품 ‘라 캄파넬라’에 감동해 피아노곡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또 파격적 기교가 필요한 ‘파가니니 대 연습곡’과 ‘헝가리안 랩소디’ 등을 작곡했다. 리스트 자신이 한계가 없는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악마적이고 현란한 테크닉으로 청중을 홀렸다.
피아노곡 ‘시적이며 종교적인 선율 S.173’도 난곡이자 대곡이다. 피아니스트를 벼랑 끝으로 내몰 정도로 어려운 작품이다. 10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알폰소 드 라마르틴느의 시에서 얻은 영감으로 작곡됐으며, 죽음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담겨 있다. 1811년 헝가리 라이딩에서 태어난 그의 탁월한 연주 실력은 어렸을 때부터 유명했다. 10세에 공개 독주회를 열었을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 귀족이자 음악 애호가인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토지 관리인이었다. 이 후작이 바로 작곡가 하이든의 후원자이자 고용주다.
아버지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리스트는 빈에서 체르니와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웠다. 이때 베토벤도 만난다. 51세 베토벤은 10세 리스트에게 “대단히 재주 있는 아이다”고 칭찬하며 이마에 키스를 해줬다. 이 말을 가슴에 새긴 리스트는 훗날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 9곡을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했고 베토벤의 후계자를 자청했다.
리스트가 파리에 정착한 후에는 쇼팽과 파가니니, 슈만과 친분을 쌓았다. 쇼팽은 리스트의 소개로 운명의 여인 조르주 상드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쇼팽은 ‘에튀드 Op.10’을 작곡해 리스트에게 헌정했다. 쇼팽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전기를 쓴 최초의 작가가 바로 리스트였다.
슈만과도 깊은 음악 우정을 나눴다. 슈만이 리스트에게 ‘환상곡’을 헌정하자 그 답례로 ‘피아노 소나타 b단조’를 선물했다. 리스트의 유일한 피아노 소나타로 격정적이면서도 철학적이다. 서양 음악예술의 가장 승화된 모습을 이 곡에서 찾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피아노의 거장인 알프레트 브렌델은 저서 <피아노를 듣는 시간>을 통해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는 베토벤과 슈베르트 이후 소나타들이 이룩한 모든 독창성, 대담성, 완결성을 능가한다”고 극찬했다. 왕성한 창작열을 가진 리스트는 바흐의 음악도 피아노곡으로 편곡했다. 또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교향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교향시(Symphonic Poem)는 교향곡(Symphony)과 시(Poem)의 합성어. 시적이고 문학적인 이야기를 오케스트라로 표현하려 했다. 낭만주의 소설가들과 교류를 통해 키운 자신의 시적 감성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 해답이 바로 교향시였다. 복잡하고 다채로운 감정을 담았으며 세 번째 교향시 ‘전주곡’은 비장미가 넘치는 명곡이다.
시대를 앞서간 그는 음악적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규모가 큰 음악회 무대에만 서려고 했다. 자신의 연주를 듣는 태도가 좋지 않을 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 궁전에서 연주할 때였다. 연주 도중 니콜라우스 황제가 부관에게 작은 소리로 뭔가 지시하자 갑자기 피아노에서 손을 뗐다. 황제가 깜짝 놀라 “그대는 왜 연주를 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리스트는 “폐하께서 말씀하실 때 누구나 침묵을 지키는 법도를 알고 있다”고 답해 황제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음악에만 매진했을 뿐 부와 명성을 탐하지는 않았다. 미국 한 부호가 100만달러의 연주료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그는 “그 많은 돈을 제가 어디다 쓰겠습니까”라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40세가 됐을 때는 “더 이상 돈을 받고 피아노를 치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한다.
서정적이고 격정적인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의 선율을 토대로 안무한 발레 ‘마그리트와 아르망’
그는 여자를 멀리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온갖 스캔들을 뿌렸다. 22세에 파리 상류사회에 진입한 후 생크릭 백작의 딸 카롤린과 첫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백작은 가난한 음악가에게 딸을 내주지 않았다. 결국 연인과 헤어진 리스트는 한동안 허무주의에 빠졌다.
그 방황은 1834년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서 치유됐다. 그 여인이 바로 6세 연상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 20세에 샤를 다구 백작과 결혼해 자식까지 낳은 유부녀였다. 상류 사회에서 명망 높았던 백작 부인은 리스트를 만난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사회적 체면과 가족,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린 채 리스트에게만 ‘올인’했다. 걷잡을 수 없이 서로를 갈구하던 두 사람은 결국 사랑의 도피행을 감행한다. 파리를 벗어나 스위스를 거쳐 제네바로 향한다. 그 뜨거운 사랑의 결실이 바로 연작 피아노 작품 ‘순례의 해’다. 두 사람은 아이도 세 명이나 낳는다. 둘째 딸 코지마가 훗날 작곡가 바그너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그런데 셋째 아이 다니엘을 낳은 후에는 리스트와 마리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리스트는 도피 생활에 염증을 느꼈고 결국 동거 11년 만에 파국을 맞는다.
속세를 떠나 성직자로 여생 보내 마리와 헤어진 후 리스트는 1847년 러시아 키예프에서 온 카롤리네 폰 자인 비트겐슈타인 후작부인을 만난다. 두 사람은 바이마르에서 왕족처럼 지내며 불꽃같은 사랑을 나눈다. 결혼까지 하려 했지만 후작부인의 이혼이 허락되지 않아 실패했다.
모든 것에 절망하고 환멸을 느낀 리스트는 1863년 52세에 몬테카를로의 마돈나 델 로사리오 수도회로 들어가 버린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시다’ 등 수많은 종교 음악을 작곡했다. 가톨릭 성당이 주최하는 자선음악회에서도 자주 연주했다. 교황이 바티칸으로 불러들여 3개의 성직을 수여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871년에는 헝가리 왕실 고문으로 임명됐다.
파란만장한 연애와 음악을 즐겼던 리스트는 평생 1000곡 넘게 작곡했다. 출판되지 않은 곡도 많아 아직도 새로운 발견의 여지가 많다. 엄청난 카리스마와 정열로 지치지 않고 곡을 써내려간 그는 허탈하게도 감기에 무릎을 꿇었다. 1886년 여름 감기에 걸렸는데 폐렴으로 이어져 숨을 거뒀다. 하지만 그의 선율은 후배 작곡가들인 프랑크와 스크랴빈, 드뷔시, 라벨, 메시앙, 리게티 음악의 근원이 됐다.
[전지현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사진제공=떼아뜨로, 크레디아]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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