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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⑨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입력 : 2013.06.07 14: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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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언젠가 저렇게 아름다운 서재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러면서도 아무래도 난 이런 서재를 갖지는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처음으로 했었다.
삶이 쌓이고 손때가 묻고 물건이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 앉으면 되는 것, 그렇게 찾아올 아름다움이 내가 가지게 될 서재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는 것. 그저 그런 정도의 생각을 했으리라.
내가 글을 쓰는 장소인데 이것만은 제대로 투자를 해야겠다 생각해서, 라는 단서를 달면서 한 후배 소설가는 개인택시 한 대 값의 책상을 마련했다고 했다. 개인택시 한 대가 얼마나 하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일단 거액인 거 같기에 “잘했다”는 말로 격려를 하긴 했지만, 후배는 그 책상이 참 사랑스럽고도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오래전 내가 장편소설 <부초>를 쓰던 시절 나는 책상이 없었다. 교실에나 놓여 있을 법한 조그마한 책상이 하나 있었던 것 같지만 거기에는 책을 치쌓아놓고 있었기에 ‘이렇다 할’ 책상이 없었다. 작가로 데뷔한 지 3년째 되던 해라, 이미 써놓은 소설들이 상당했기 때문에 어디서 원고청탁이 안 오나 두리번거릴 때지, 밀려올 원고청탁을 기다릴 때도 아니었다. 여차하면 배를 깔고 방바닥에 엎드려서라도 밤을 새워 원고를 써댈 패기가 울퉁불퉁 이두박근처럼 터져 나올 판인데, 책상이 없다는 것 따위는 눈에 띄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훗날 <부초>라는 이름으로 책을 내게 되는 그 작품의 3년여에 걸친 취재를 끝내고, 다가와 있는 여름 6월, 7월, 8월에 소설 초고를 끝내기로 계획을 세웠을 때였다. 집필용 책상을 하나 사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물건 하나가 내 눈길을 끌어당겼다. 그야말로 ‘꽂혔다’고나 할까. 그 무렵 아내는 명동성당으로 오르는 언덕길에서 작은 가게를 하나 하고 있었다. 돈 못 버는 작가 지망생을 위해 조강(糟糠)을 씹던 시절이었다. 양품점이라고 하기에도 양재점이라고 하기에도… 딱히 들어맞는 이름이 없는, 젊은 남녀에게 캐주얼한 옷을 맞춰도 주고 만들어놓은 물건을 팔기고 하는 그런 가게였다.
이 가게의 내부 수리를 하면서 쓸모없어진 철제 틀의 유리진열장 하나가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집 현관으로 들어온 게 그 무렵이었다. 작품에 들어가면서 책상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뒤척이던 어느 날, 이 진열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 넓이는 책상으로 적당하고 윗면과 앞면의 유리를 제거하면 뒤편으로는 책을 조르르 꽂을 수도 있고 옆면의 유리가 주변을 차단해주니, 그렇게 만들자고 해도 쉽지 않은 특이한 디자인의 앉은뱅이책상이 되지 않는가. 한나절의 주물럭거림과 똑딱거림이 끝나자 푸른 비로드가 깔린 단아한 좌식책상의 탄생이었다.
내일부터 작품쓰기에 들어가기로 하면서 20여권의 대학노트를 준비하고 24자루의 연필을 정성들여 깎아놓았다. 때는 막 6월이 시작되고 있었다. 저녁 무렵, 기찻길 같다던 교수님의 마당과 다를 바 없이 기찻길처럼 좁고 긴 골목길을 내다보면서 <부초> 집필 전용 앉은뱅이책상을 가만히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있었다. 휘슬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그라운드의 운동선수들처럼 중얼거렸었다. ‘같이 잘 해보자. 해내는 거다.’ 여름을 뚫고 나가는 글쓰기가 이어졌다. 대학노트에 오른쪽 면에만 연필로 글을 쓰고 왼쪽 면은 고칠 때 옮겨 쓰기 위해서 남겨두는 식이었다. 한여름이라 팔에서 땀이 흘렀기 때문에 노트 아래 부분으로 내려가면 팔을 타고 흐른 땀이 종이를 눅눅하게 적셔놓고 있어서 연필심이 잘 먹히지 않았다.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의 글쓰기를 이어가다 보니, 가장 힘든 것이 더위였다. 때는 7월이고 8월이었다. 그때 글쓰기에 가장 편안한 옷이 잠옷이었다. 찾아오는 이도 없이 틀어박혀서 지내는 하루하루에 잠옷 이상이 없었다. 한낮이 되면 땀이 흘러 잠옷 종아리 부분이 축축하게 젖으며 감겨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가위를 찾아들고 잠옷 아랫부분을 덜렁 잘라버렸다. 그렇게 잘라낸 반바지, 말 그대로 반잠옷을 입고 났을 때 대학노트에 적어나가고 있던 소설이 10권을 넘기고 있었다.
연필로 대학노트에 쓴 16권의 초고가 끝났을 때는 가을이 오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었다. 아이들이 먹는 기다란 비닐 얼음과자 하나를 사 물고 강 건너 잠실 쪽을 바라보며 한강 풀밭을 거닐었다. 내 몸에는 뼈와 가죽만 남은 것 같았고, 비 온 후의 어느 봄날 아침처럼 내 키가 움쏙 자란 것 같았다. 영혼의 키가.
평생 글을 쓰며 살아왔다. 그게 밭이었고 논이었다. 그랬으면서도 이상스럽게도 글을 쓰는 책상에는 크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살아왔다. 서재라고 하는 방, 그 집과 그 환경에는 많이 구애되면서 살았으면서도 방안의 책꽂이나 책상은 내 나름의 편리함 이외에는 장식을 멀리하며 살았다. 어쩌면 그때 그 가르침 때문은 아니었을까. 습작소설을 들고 황순원 선생님을 찾아갈 때면 선생님은 앉은뱅이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노트를 펼쳐놓고 소설을 쓰고 계셨다. 어디 그럴 듯한 책상과 고색창연한 책들이 고요하게 숨 쉬는 서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런 선생님의 서재를 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댁에서도.
검정 밥상. 그 앞의 글씨를 못 알아보게 지우고 고친 대학노트. 거기에는 선생님의 소설이 뜨겁게, 글자 하나하나가 뜨겁게 쇳물처럼 몸을 달구고 있었다. 형식이 내용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건 진리인지도 모른다. 좋은 책상 위에서 더 좋은 글이 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서는 좋은 책상 위에서 얼마나 많은 나쁜 문서가 만들어졌겠는가. 책상을 놓고 이런 일반론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문득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속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그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안다’던 그 말. 내가 사랑하는 책상이면, 내가 사랑하는 서재면 그것으로 다 이룩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벌판도 다르지 않으리라. 남이 말하는 평가나 가치 그 남의 눈이 아니다. 내가 다 바쳐 사랑했을 때 모든 것은 거기서 이룩되고 찬란한 것이 아닐까. 상대적 평가로 지나치게 그 원칙이나 가치나 저울질 되는 세상에서 고개를 돌리며 떠오르는 생각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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