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연의 비블리오]필리늙음과 죽음은 과연 무엇인가

    입력 : 2013.04.08 14:58:03

  • (책)장 그르니에 지중해의 영감
    (책)장 그르니에 지중해의 영감
    “만일 인간이 어떤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그가 풍경보다 훨씬 더 멀리 있는 죽음을 늘 자신의 배경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를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존재하는 자신의 최후에 대한 첨예한 직감만이 오로지 욕망에 한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장 그르니에가 쓴 <지중해의 영감>(한길사 펴냄)은 삶과 죽음의 밀접한 관계를, 그 사이에 놓인 인간의 숙명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장 그르니에의 이 글을 필자는 나름대로 이렇게 판독하고 싶다. 사람들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한다. 두렵기 때문에 늘 멀게만 느낀다. 나의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보다도 더 멀리 말이다. 그러나 죽음은 풍경처럼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분명히 내 곁에 존재한다.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은 다시 우리를 살게 한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욕망의 한계를 알고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장 그르니에의 문장은 인간으로 하여금 철학을 하게 하는 그 어떤 힘, 즉 죽음에 대한 고찰이다. 장 그르니에는 <이방인>을 쓴 알베르 카뮈의 철학 선생님이었던 사람이다. 단순한 철학교수 정도가 아니라 카뮈의 정신세계를 만든 사람이다. 미셸 드 몽테뉴는 “죽는 것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은 사는 것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캐나다 출신 외과의사인 스펜서 내들러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외과의사인 그는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도 죽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에게 죽음은 삶 중 일부다.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고통과의 화해>라는 책을 통해 가장 가까이에서 본 죽음에 대해 얘기한다. 책에는 죽음을 앞둔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췌장암 말기인 일본계 미국인 교코는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쾌활하다. 집으로 찾아온 스펜서 내들러 박사에게 그녀는 웃으며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네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녀는 목사에게 자신의 장례식 설교 때 자신의 삶을 너무 미화하지 말아 줄 것을 부탁하고, 자신의 장례식에 찾아올 하객들에게 대접할 음식 문제도 고민한다. 화장이 끝난 후 가족이 타고 남은 자신의 뼈를 잘 수습할 수 있을지도 고민한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마지막까지 철저히 현재에 전념한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에서 소외되지 않는다. 그 죽음도 자기 것이기 때문에.

    스펜서 내들러는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가 죽음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한다. 죽음을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의사인 그의 기억 속에는 멋지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모습이 남아 있다.

    적혈구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혈액암에 걸린 8살짜리 코마일은 “병이 나으면 커서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소년이다. 내들러는 꼬마의 투병을 지켜보며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의사들은 날 살피려고 밤새 붙잡고 있었고 너무 어두워서 무서웠어요. 그래도 엄마를 위해서 강해졌어요. 근데 선생님, 아줌마랑 개들은 잘 있나요”라고 의젓하게 편지를 쓰는 코마일을 보면서 내들러는 숭고한 가치를 배운다.

    이 책은 삶과 죽음이 왜 분리될 수 없는 것인지, 우리가 왜 삶을 생각하는 만큼 죽음도 생각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연극에 출연하는 손주를 보기 위해 세 시간 동안 꼬박 앉아서 작가도, 내용도 모르는 그리스 희극을 끝까지 본다.”

    제목이 눈길을 끄는 책 <나이 들어가는 것의 아름다움>(잭 캔필드 외)이라는 책을 보다가 발견한 기막힌 구절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존재는 늘 그랬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손자들을 보기 위해 몇 시간 전부터 터미널에서 기다려주셨고, 늘 자기 앞에 있는 맛있는 음식을 손주 앞으로 밀어놓으면서도 졸업식 사진 찍을 때는 손주 창피해 할까봐 뒷전에 서성거리시던 분이 할머니 할아버지셨다.

    이 책에는 주옥같은 노년예찬들이 실려 있다. 그중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게 역시 할머니 할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묘사한 부분이다. 존재 자체가 소멸을 의미하는 것처럼 치부해버리는 노년에 그야말로 검증된 사랑이 숨어있는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생명’이라는 강물에 몸이 던져지고 싫든 좋든 그 강물을 따라 흘러가야 한다. 그 강물의 흐름에 몸을 오래 맡겨본 사람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다. 강물은 그들에게 인생의 가장 큰 가치는 추억과 사랑이라는 깨달음을 전해준다.

    다음 구절을 보자. “할머니 할아버지는 당신이 세례를 받거나 결혼을 할 때 당신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잡기 위해 세 시간이나 일찍 도착하는 사람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당신이 미술시간에 그린 유치한 그림을 액자에 넣어 거실에 걸어두는 존재들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밤늦은 시간까지 손주를 돌보면서 시간외 수당을 청구하지 않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어설픈 지식과 정보로 오만해져 있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는 경험으로 우리를 감싸준다. 나이가 드는 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지식과 정보를 뛰어넘는 경험의 미학 때문이다. 사랑하는 손주에게 보낸 어느 할아버지의 편지는 감동적이다.

    “나는 네가 산에 오르다 상처도 입어보고, 뜨거운 난로에 손도 데어보고, 꽁꽁 얼어붙은 철봉대에 손이 쩍쩍 달라붙는 경험도 해보기 바란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절망에도 빠져보고 힘겨운 일도 당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행복이 네 곁에 머무르기를….”

    한 인류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건 지구상에 인류라는 생명체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당신이라는 유전자를 포기하지 않는 무수한 조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상당히 큰 감동을 받았었다.

    누군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수백만 년 전부터 21세기까지 우리 조상들 중 나의 유전자를 포기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있게 한 조상들 중 내가 만나보고 만져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조상은 할아버지 할머니다. 나는 그들이 남긴 화석이자 내가 존속시킬 후손들의 조상이다.

    [허연 매일경제 문화부 부장대우·시인·문학박사]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1호(2013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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