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경엽 칼럼]EPB vs 모피아

    입력 : 2013.03.07 15:10:27

  • 한 고급 시니어타운에는 3가지 불문율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돈 자랑을 하지 말라, 둘째는 자식 자랑을 하지 말라는 거다. 이 두 가지를 안 지키면 창피를 보거나 낭패를 당하게 된다. 언뜻 봐서는 수백억 원 자산가인지, 수천억 거부인지 알기 힘들어서다. 세 번째는 왕년을 찾지 말라는 거다. 과거에 장 차관을 했든지 대그룹 CEO를 했든지 현직을 떠난 지 오래됐다면 다 같은 노년의 인생일 뿐이라는 거다. 세가지 중에서 가장 안 지켜지는 게 뭘까? 바로 ‘왕년’이 문제다. 이런저런 모임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어느새 ‘옛날 좋았던 시절’이 튀어나오고 만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왕년은 정말 화려하고 파워가 있었고, 그런 나날들이었다. 인생 역정에서 마음 깊숙이 새겨지는 탓에 그 좋은 시절, 왕년은 마치 두더지 게임처럼 튀어나오곤 한다.

    왕년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바로 박근혜 정부의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 인선을 보고서다. 정부 경제팀을 이끌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현오석 한국개발연구원장이 내정됐고, 조원동 조세연구원장이 청와대 경제수석에 낙점됐다. 모두 옛 경제기획원(EPB) 출신이다. 박근혜 정부 첫 시작은 EPB 쪽이 키를 잡게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개발연대를 이끌 당시 경제부처는 경제기획원-재무부-상공부의 3각 체제였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5개년 경제계획을 짜고, 예산을 배정하고, 경제팀을 이끌었다. 재무부는 금융부문을, 상공부는 실물부문을 장악했다. 3각 체제가 깨진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초기에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합쳐져 재정경제원이 출범하고, 상공부는 동력자원부와 합쳐져 나중에 통상산업부로 통합되면서다. ‘거대공룡’ 재경원은 예산과 조세 정책, 금융을 쥐고 흔들면서 나머지 경제부처를 모두 합쳐도 근처에도 못갈 정도로 힘자랑을 했다. 당시 다른 부처 관료들은 재경원과 ‘기타 부처’로 불렀다.

    EPB와 재무부 출신은 공직의 출발은 같을지 모르지만, 조직에 몸담으면서 완전히 딴 길로 갔다. 안팎에서 평가하기를, EPB 출신 관료들은 이상주의자들이고 창의적, 미래지향적인 편이다. 종합적인 판단력에 강하지만 사변적이고, 실행력은 약하다는 평을 듣는다. 상하관계가 수평적이어서 격렬한 토론에 익숙하다.

    재무부 출신 관료들은 현실주의자들이고 논리적이며 디테일에 강하다. 실무능력에 강점이 있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시각은 약한 편이다. 상하관계가 엄격하고, 보안을 중시하며 말을 아낀다. 그래서 모피아라는 별칭이 붙었다. 1990년대 이후 두 조직이 섞이고, 나뉘고 했지만 양쪽 출신 관료들의 스타일과 경향성은 여전히 뚜렷하다.

    뒤로 거슬러 올라가면, 공교롭게도 역대 정권에서 EPB와 재무부 출신들이 교대해가며 경제 정책을 주물렀다. 이명박 대통령 시대는 거의 모피아 전성기였다. 강만수 KDB 회장을 비롯해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 김석동 금융위원장,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윤진식 전 국회의원 등이 모두 옛 재무부 라인이다.

    참여정부 때에는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비롯해 한덕수·권오규 부총리 등 EPB 출신들이 파워를 행사했다. 이전 김대중 정부 때는 외환위기 탓에 이헌재 전 부총리 등이 주도했다.

    ‘EPB-모피아 교대 현상’은 그 당시 대통령을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가 영향을 주었다. 인적 네트워크의 꼭짓점에 있었던 핵심 인물이 누구냐에 따라 큰 흐름이 달라졌다. 핵심 실세가 실국장과 과장 때 함께 일했던 부하들을 발탁하기 마련이다.

    인재를 선택하는 대통령의 성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변수는 집권 초기 경제 여건이다. 새 정부에서 첫 경제팀 구성은 ‘새판짜기’를 시도하려는 대통령의 뜻이 읽혀진다.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라는 국정 비전 아래 ‘고용률 70%, 중산층 70% 달성’ 등 5대 국정 목표와 140개 국정 과제를 이행하려면 ‘5개년 경제계획’ 못지않은 그랜드디자인이 절실하다.

    새 경제팀이 향수에 젖어 왕년의 박정희 시대를 업그레이드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국민들의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박근혜 경제체제’라는 말이 오래 좋은 의미로 입에 오르내릴 수 있으려면, 현실감과 실행력, 리더십으로 정책 수요자들인 국민들의 믿음을 얻어야 한다.

    이제는 한국이 벤치마킹할 나라는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한국형 경제 모델’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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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엽 LUXMEN 편집장]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0호(2013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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