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경엽 칼럼] 데자뷰 2013

    입력 : 2013.02.04 13:43:43

  • 서울 동북쪽 홍릉 소재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울창한 숲 속 널찍한 대지 위에 나지막한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KDI가 이곳에 터를 잡은 데는 이유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던 1960년대에 해외 고급두뇌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조건이 필요했다. 귀국한 박사들은 반포아파트를 사택으로, 의정부 로얄골프장(현 레이크우드CC) 회원권을 받았다. KDI옆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이공계 두뇌유치를 위해 비슷한 시기에 출범했다.

    박 전 대통령은 초대형 국책사업과 산업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때마다 야당은 물론 전문가들의 강한 반대에 직면했다. 경부고속도로 사업은 시기상조론에 부딪혔다. 섬유 봉제와 같은 저임금 가공 수출 산업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철강, 전자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화는 무모한 시도였다. 일본 등 선진국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구미전자공단과 구로공단은 오늘날 IT산업의 기틀이 됐다. 울산과 여천(여수에 통합), 영남과 호남에 하나씩 석유화학단지가 들어섰다. 당시 들어선 산업 입지는 서해안 일부를 제외하고는 큰 틀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운하 공약을 내세웠다가 4대강 사업으로 선회했다. 4대강은 청계천 사업의 ‘확대복사판’이다. 이 대통령은 청계천 복원 때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돌파한 덕에 대통령감이라는 이미지를 쌓았다. 임기를 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22조원을 들인 이 초대형 프로젝트에 대해 감사원은 ‘총체적 부실’이라고 발표했다. 그런가 하면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충청권에 수도 이전을 하겠다고 약속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위헌 결정이 나자 세종시로 돌려서 성사시켰다.

    4대강과 세종시 프로젝트에 드라이브를 걸었던 두 대통령의 국정 스타일은 언뜻 보면 개발연대 박 전 대통령과 비슷하다. 벌써 30~40년 전 까마득히 먼 옛날인데도 그렇다. 박정희 이후 이 대통령까지 박근혜 당선인의 전임자들은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박정희 콤플렉스’를 겪었다. ‘박정희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아니면 벗어나려고 했거나 마찬가지다.

    박근혜 당선인은 첫 여성 대통령이자 첫 정치인 2세 대통령이다. 부친의 통치 경험을 지켜봤고, 퍼스트레이디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아버지와 딸로서 ‘박정희 2.0’ 시대를 열어가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박근혜 시대는 해방 이후 이어져 온, 제왕적 대통령이 통치하는 권위주의 정치에 종지부를 찍었으면 한다. 멀게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현재까지 한국 정치가 겪어온 불합리와 불협화음, 무모한 대결구도를 모조리 불사 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MIT 대런 애쓰모글루 교수와 하버드대 제임스 로빈슨 교수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남한과 북한의 현재 모습을 나눈 결정적 계기는 “경제적 인센티브를 창출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정치권력을 분산시켜 주는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가 자리 잡은 덕분”이라고 말한다. 두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권력을 자신과 군부에 몰아주는 착취적 성향의 정치제도를 도입했지만, 이런 정치체제 속에서도 경제제도는 꽤 포용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더 이상 경제성장이 지속될 수 없는 상황에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포용적 정치제도를 이행했기에 한국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냈다고 진단한다. 주류 사회학자나 경제학자들의 믿음과 동떨어졌음에도, 한국의 성공 사례를 통해 새로운 이론을 만드는 영감을 얻었다고 쓰고 있다. 식민지 경험을 했지만 아직 구시대적, 착취적 제도 속에 갇혀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이 한국을 부러워한다.

    박 당선인은 개도국의 리더로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가교 역할에서 한국 경제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으면 한다. 마치 박 전 대통령이 KDI KIST를 만들어 인재를 등용해 장기계획을 세우고, 실천했던 것처럼, 한국은 개도국에 경제개발과 산업화의 소프트웨어와 노하우를 공유해야 한다. 여기에 한국의 중견기업과 중소기업들이 진출할 통로가 열린다.

    선진국들은 여전히 방식을 바꿔 과거 식민지 국가들에 ‘착취적 제도’를 작동시키고 있다. 한국의 소중한 경험을 살려 그들이 경쟁 우위를 설 수 있는 산업을 키워낸다면 오랜 친구가 될 수 있다. ‘리셋 코리아’의 길은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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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엽 LUXMEN 편집장]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9호(2013년 0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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