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 ⑪ 경전

    입력 : 2012.12.07 15:5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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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전(經典)은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와 각각 종교전통 안에서 기록된 인류의 지혜 총체이다. 고대 힌두교인들은 경전들을 말린 잎사귀에 쓰고 그것을 하나로 묶는 실은 ‘수트라(Sutra)’라고 했다. 이 세상의 모든 흩어진 생각을 하나로 묶어 보존한 것이다. 그래서 ‘수트라’라는 산스크리트어에는 ‘묶다’라는 의미를 지난 ‘seu’어근이 들어가 있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고대 중국인들은 ‘수트라’를 경전(經典)이라고 번역하였다. 경전(經典)이란 한자에서도 ‘실’을 의미하는 ‘糸가 들어가 있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중요하기 때문에 실로 꿰매 제사상에 올려놓을 만큼 소중한 책이라 하여 경전(經典)이라 불렀다. 이 전통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전은 ‘서로 엮어진’ 무한한 개체들로 이루어진 조직인 직물(Textus)이다. ‘문헌(Text)’이란 개념이 바로 이 ‘직물’에서 유래했다. 경전을 읽는 사람은 거대한 수수께끼 같은 조각들을 맞추듯이 모든 단서들을 서로 연결하여 그 심오한 의미를 파악하려 한다. 수많은 베스트 셀러들 중에 고전(古典)이라 불리는 책들은 극히 드물다. ‘고전’의 반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경전은 그 고전들 중에 고전으로 수많은 고전들 중 경전이라 불리는 책은 몇 권밖에 없다. 경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마술적인 힘이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숨겨진 의미가 새록새록 드러나기 때문이다. 경전은 그것을 아끼고 삶의 안내자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글자 뒤에 숨겨진 행간과 공간이 서서히 말을 걸기 시작한다.

    이 경전들 중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 성서(聖書)다. 유대인의 토라이자 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비결은 바로 이 경전이 가진 ‘창조적인 유연성’이다. 신과 창조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신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반응이 담겨있는 ‘성서’는 기원전 6세기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으로 포로생활을 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제들과 서기관들은 유배생활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聖殿)을 대치할 성전(聖典)을 모으기 시작하여 ‘경전’으로 삼았고 이 경전에 ‘울타리’를 쳐서 다른 책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책으로 여겼다. 토라 학자들은 성서내용을 숙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주석을 통해 토라의 의미를 밝히고 그들 자신들이 토라에 등장하는 예언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교인들이 토라를 이용하여 경전에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 할 때 유대인들의 주석전통을 이어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교 토라를 그리스도교 경험과 초기 신앙공동체 경험을 통해 새롭게 해석하였다. 두 번째로 예루살렘이 허물어진 기원후 70년 그리스도교인들을 자극하여 <신약성서>라는 새로운 책들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모든 구절들을 통해 예수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기원후 2세기부터 시작한 랍비 유대교는 미드라쉬라는 주석을 통해 토라를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다. 미드라쉬 해석의 원칙은 ‘자비의 행위’이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토라’는 글이 아니라 행동이며, 신앙생활을 통해 완성된다고 생각하였다. 경전은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열려진 책’이다. 랍비들은 신의 말씀은 무한하며 경전을 연구할 때 신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믿었다. 랍비들은 특히 토라의 모든 구절들이 신의 ‘자비’를 내포하고 있다고 여겼고, 심지어는 토라 원문의 내용을 수정하면서까지 이 ‘자비’를 드러내려 노력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서를 연구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이 성서 해석의 네 가지 원칙을 ‘콰드리가’라고 불렀다. 성서의 표면적인 ‘축자적인 의미’에 감추어진 비유적인, 도덕적인, 그리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축출하였다. 유대 랍비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주석가들에게 성서의 원래의 의미보다는 자신들이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해석한 창의적이며 신학적인 해석이 더 중요했다. 중세 유럽학자들은 성서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은 성서의 신화적이거나 전설적인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위한 상식적인 설명을 찾으려 했고, 이 과정을 통해 신비적인 요소를 제거하였다. 이 시도에 대한 반격으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서 신비주의가 강하게 부각되었다.

    르네상스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성서를 원전으로 읽으려고 시도하였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성서를 라틴어로 읽었지만, 유럽으로 유입된 그리스어로 기록된 성서를 읽으면서 중세 교리에서 벗어난 새로운 성서 해석의 지평을 열었다. 칼뱅이나 츠빙글리는 성서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신이 역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으며 성서는 그 증언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과학의 발견은 종교와 과학과의 관계와 성서를 읽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미국을 건립한 청교도들은 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이라는 민족주의적 해석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세기에 등장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고고학과 고전문헌학의 발달로 성서를 상식적으로 그리고 민주적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진화론과 성서 비평학의 발달로 기존 성서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했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성서에 대한 견해를 방어하기 시작하였고 자유주의 신앙인들과 무신론자들과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이 보수주의자들의 일부가 성서를 축자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축자영감설’만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근본주의자들이라 한다. 정치와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증거 문헌들을 인용하는 현대인들의 습관은 성서 해석 전통과 맞지 않는다. 성서는 교리와 신념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성서의 주된 기능은 아니었다. 성서의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는 근본주의자들의 해석은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지만 성서전통에서 벗어난 일이다. 성서 전통은 상징적이거나 혁신적인 해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서를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19세기 이후에 생겨난 현상이다. 특히 근본주의자들의 축자적인 해석은 유대-그리스도교의 창조적이며 자유로운 해석에 대한 모독이다. 성서는 문헌이 아니라 자비의 행동을 촉구하는 안내자이며 자비활동 그 자체이다.

    성서를 통해 우리가 오늘날 해야 할 자비의 행동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서를 잘못 읽은 것이다. 성서를 깊이 읽는 행위는 이기심이 판치는 세계에서 이타적이며 초월적 세계로 가기 위한 영적인 운동인 것이다.

    배철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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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오리엔트 언어들에 매료되어 하버드대 고대근동학과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언어문명 주임교수이다. 주요 관심사는 고대오리엔트 문명인 후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간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일이다. 주요 저서로는 <타르굼옹켈로스 창세기> <타르굼아람어문법> <창세기, 샤갈이 그림으로 그리다> 등이 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7호(2012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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