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연의 비블리오필리]과학은 선에 봉사하는가 악에 봉사하는가…과학의 두 얼굴

    입력 : 2012.08.06 09: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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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승전국들은 패전국의 전범들을 재판했다. 그런데 전범재판에서 당연히 단죄됐어야 할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죄 값을 치르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전쟁 당시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다. 히로히토 이외에도 처벌을 받지 않은 전범들은 상당히 많다.

    그들 중에는 특히 과학자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우주비행 연구에 유대인을 실험도구로 이용한 독일의 스트럭홀트와 일본군 생체실험 부대인 731부대를 이끈 이시이 시로 박사도 처벌되지 않았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 승전국 미국의 지원으로 연구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과학적 재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기자인 어니스트 볼크먼은 자신의 책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에서 인류의 과학문명은 전쟁을 먹고 자랐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과학의 발달은 실제로 전쟁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조금 과격한 시각으로 보면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과학발전을 가속화시켰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원거리에 있는 적을 대량으로 살상하기 위한 로켓 기술이 우주시대를 열게 했고 배를 타고 있는 적을 물속에 수장시키기 위한 잠수함 기술이 해양과학의 토대가 됐다.

    군사무기로 개발된 다음 실생활에 활용되는 물건들이 부지기수다. 밤낚시를 할 때 찌를 잘 보이게 하는 케미컬 라이트, 스프레이식 살충제, 트랜지스터 라디오, 위성위치추적기(GPS) 등에서부터 볼펜, 통조림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사용으로 발명된 것들이다. 범위를 넓히면 모든 수학, 통신산업, 항해기술, 항공산업 등의 발전 이면에도 전쟁이 도사리고 있었다.

    암호문 해독을 위해 수학이 활용됐고 전쟁의 확실한 승리를 위해 통신과 항해, 항공산업이 빠른 속도로 진보한 게 사실이다. 학교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과학문명의 혜택이 과학자들의 고귀한 연구정신의 덕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과학문명은 권력과 과학이 결탁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것이 테크놀로지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선’에도 ‘악’에도 기여할 수 있는…. 그래서 과학은 더욱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 원자폭탄 개발 주역이었던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최초의 원폭 실험을 끝내고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나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죽음의 신이 되었다.”

    과학자인 그에게 결단의 순간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였던 1945년 5월 오펜하이머, 페르미, 로렌스, 콤프턴 등 네 과학자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 일본 인구밀집 지역에 대한 핵폭탄 투하 여부를 토론했다. 이날 오펜하이머는 이른바 ‘상보성 이론’을 내세워 핵 공격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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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폭탄은 대량살상 무기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고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그의 논리는 받아들여졌고 네 과학자는 핵폭탄 사용을 결정한다. 불과 37세 나이로 제2차 세계대전 무렵 미국 핵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가 된 오펜하이머는 이날 이후 파란 많은 삶을 살았다.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미국 물리학자 제레미 번스타인이 쓴 <베일 속의 사나이 오펜하이머>에는 갈등 속을 헤매야 했던 한 과학자 초상이 담겨 있다. 맨해튼 팀에서는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시도어 라비, 에드윈 맥밀런, 리처드 파인만, 노먼 램지 등이 맨해튼 계획 산실인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 출신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여기에 오펜하이머는 빠져 있다.

    오펜하이머가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수많은 추측이 있지만 그에게 씌워진 ‘대량 살상 주역’이라는 멍에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그를 필요로 했지만 막상 전쟁이 끝난 다음 그를 버린 것이다.

    불행은 계속됐다.

    오펜하이머는 1954년 미국 정부가 추진하던 수소폭탄 제조 계획에 반대한다. 다시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원자력 관련 기밀사항에 접근을 금지 당한다.

    미국 정보기관은 수소폭탄에 반대하는 그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누명까지 씌웠고 그의 이미지는 졸지에 변절자로 추락해 버린다.

    그는 역사의 주인공이자 피해자였다.

    1903년 스웨덴의 노벨위원회는 방사능 물질인 라듐을 발견한 대학원생 마리 퀴리와 그의 남편에게 노벨상을 수여한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사람들은 라듐이 뭔지 또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기에 한 과학자에게 두 번의 노벨상을 주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마리 퀴리는 인간에게 방사선 존재를 알려줬다.

    방사선은 쉽게 말해 물질을 투과할 수 있는 광선을 뜻한다.

    방사선은 그 위력 때문에 늘 오해의 한가운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방사선 기술의 놀라운 혜택 속에서 살고 있다. 미국 퍼시픽 노스웨스트 국립연구소의 핵에너지 부장인 앨런 E 웰터가 쓴 <마리 퀴리의 위대한 유산>은 퀴리의 업적이 어떻게 인류사를 바꿨는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방사선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오해를 풀어주는 책이다. 사람들은 방사선이라는 단어에서 히로시마를 뒤덮었던 거대한 버섯구름과 체르노빌 사고를 떠올린다. 햇볕에도 방사선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방사선은 결국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류에게는 축복일 수도 있고 재앙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화석연료 고갈이 눈앞으로 다가온 이상 방사선에 대한 이해는 절실하다. 저자는 “만약 핵분열이 전쟁을 위한 핵폭탄에 처음 활용되지 않고 교실 불을 켜는 데 사용됐더라면 오늘날 일반 대중의 원자력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평범한 직장인 K씨의 하루 일과를 보자. 세수를 하고 나서 바르는 화장품은 미생물을 제거하기 위해 방사선 살균처리를 거친 것이고 식탁 위 모든 그릇은 방사선 두께 측정기를 통해 균일하게 제작한 것이다.

    K씨를 직장까지 태워다 주는 자동차의 모든 금속물질은 제련과정에서 방사선 기술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사무실 바닥은 폴리프로필렌의 방사선 결합으로 만들어졌고 인터넷 뉴스에는 방사선을 활용한 DNA 대조법 덕분에 최근 발생한 살인사건 용의자를 잡았다는 기사가 올라온다. 오후에 건강검진을 위해 들른 병원에서는 방사선을 활용한 의료기기들이 K씨 건강상태를 체크해준다. 이제 인류는 방사선에 대해 보다 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생겼다.

    이탈리아는 체르노빌 사고 후 국내 원자력 발전을 금지했고 대부분 전기를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수입하고 있다. 프랑스는 전력의 80%를 원자력에서 얻고 스위스는 40%를 원자력에 의존한다. 이탈리아는 원자력이 없는 나라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안경 역시 방사선의 산물이다. 균일하고 깨끗한 안경알은 중성자 프로브를 사용한 것이고 예쁜 안경테 역시 방사선 밀도 측정기를 거쳐야 완성된다. 콘택트렌즈용 식염수는 미생물을 없애기 위한 방사선 소독을 거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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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과도하게 나쁜 쪽으로 활용하면 방사선은 인류에게 큰 해를 입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어떤 에너지나 물질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인체에 주는 방사선의 영향이 알려져 있지 않던 시절 아무런 보호 장구 없이 평생 많은 방사선에 노출됐던 마리 퀴리도 당시 평균 수명보다 훨씬 높은 64세까지 살았다는 사례를 들어 방사선에 대한 오해를 지적한다.

    방사선 존재를 발견한 퀴리는 “그 무엇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단지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릇된 역사와 오해를 넘어 방사선을 행복의 도구로 만드는 것은 이제 인류에게 남겨진 몫인 듯하다.

    [허연 매일경제 문화부 부장대우·시인·문학박사]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3호(2012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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