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pinion] 내일의 희망, 매일의 희망

    입력 : 2011.12.29 15: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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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신년 해맞이를 간 적이 있다. 이따금 텔레비전을 통해 새해 첫날 아침 높은 산꼭대기에서 방송용 헬기를 향해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기는 했지만 직접 나선 건 처음이었다. 전날 보신각의 타종 소리를 듣고 밤늦게 잠든지라 꼭두새벽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고, 한겨울의 고추바람 속에 집을 나서려니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디서 얻어듣고 왔는지 해맞이 타령에 들뜬 아이와의 약속은 지켜야 하겠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내복에 양말 두 켤레를 덧신고 모자와 목도리와 장갑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고향집에서 멀지 않은 바다로 향했다. 그런데 경험이 없었기에 예상치 못했던 일이지만 바닷가로 가는 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설마 이 사람들이 다 해맞이를 하러 가는 건 아니겠지?”

    해안으로 향하는 좁은 국도가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그 모두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해돋이를 보기 위해 새벽잠을 설치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놀라움 반 기막힘 반으로 꼬리를 문 차량의 행렬을 따라 겨우겨우 바닷가에 다다랐을 때, 어느덧 동쪽 하늘이 불그레하게 물들더니 갑자기 붉은 해가 수평선 위로 불쑥 떠올랐다.

    “와아! 해다! 올해의 첫 번째 해다!”

    내가 낳았지만 다행히 엄마를 닮지 않아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아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시퍼렇게 언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 섰던 사람들도 일제히 탄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다. 이렇게 모두가 감격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도무지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가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어 홀로 멀뚱멀뚱했다.

    새해 첫날 뜨는 해라고 하여 세모꼴이나 네모꼴일 리 없다. 기실 시간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일종의 ‘개념’일 뿐 물처럼 흐르거나 바람처럼 지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달력이 바뀌어 년도가 달라졌다는 것이 요란스레 흥분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시퉁한 무감각 속에서도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사람들이 붙여준 ‘첫 번째’라는 꼬리표를 단 아침 해라기보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해돋이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지구에서 1억4960만km 떨어진 태양계의 중심 항성을 향해 사람들은 곱게 손을 모았다. 초고온·초기압 기체로 이루어진 밝고 뜨거운 생명의 에너지원을 향해 사람들은 다소곳이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들은 고사리손을, 노인들은 거북의 등딱지처럼 거친 손을 모았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정성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일 때, 태양은 다만 항성이나 에너지원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빛나는 희망과 소원, 그 자체였다.

    새해 첫날 아침 해를 향해 사람들이 바치는 소망은 제각기 다를 터였다. 누군가는 건강을, 누군가는 재물을, 누군가는 변치 않는 사랑을, 누군가는 승진이나 진학이나 취업을 빌 것이다. 하지만 희망과 소원은 각각 다를지라도 두 눈동자에 붉은 해를 담은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순진하고 평화로웠다. 해묵은 고통과 상념은 어제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영영 다시 떠오르지 않기를.새해 역시 금세 고단함과 분주함에 익숙해질지라도 이 순간만은 희망의 영원 속에 멈춰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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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결심을 한다.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을 굳게 먹으며 하는 결심이지만 기실 별반 새로울 것은 없다. 금주, 금연, 다이어트, 정기적으로 운동하기 등 건강을 위한 계획이 가장 많고, 자기계발과 향상을 위해 책을 읽고 외국어 공부를 하겠노라는 결심도 빠짐없이 뒤따른다. 알뜰한 소비 생활로 마이너스 통장을 메우고, 여행이나 봉사 활동 등 미뤄두었던 일들도 올해는 꼭 하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다이어리 맨 첫 장에 그 결심과 계획의 목록을 반듯반듯한 글씨로 적어 넣노라면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에 힘입어 금방이라도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만 같다. 하지만 ‘시작이 반’에 반드시 뒤따르는 반갑지 않은 말이 ‘작심삼일’일지니, 전자가 시작에 대한 응원이라면 후자는 포기에 대한 핑계거리가 된다. 단단히 먹은 마음이라도 삼일을 가기가 어렵다는 말뜻은 결심이 굳지 못함을 꾸짖지만, 사실 다만 사흘이라도 한 가지 마음에 집중하며 자신을 다스리려 애썼다는 게 어딘가. 소수의 ‘독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본래부터 사람의 마음은 대체로 여리고 무르고 나약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살이는 고민과 갈등과 시새움과 후회 속에 각양각색의 빛깔로 피어나고, 그러한 희로애락이 없는 삶이란 무미건조한 기계적 생활에 다름 아니다.

    약한 것은 결함이 아니다. 어리석은 것은 죄가 아니다. 인간은 약하고 어리석었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서로 얼키설키 뒤섞여 살아왔다. 다만 약하고 어리석음을 죄와 결함으로 인식하면서 자포자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번쯤 다시 생각해봄직하다. 언젠가 ‘작심삼일’에 대해 성토하며 자기비판을 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그렇다면 사흘에 한 번씩 결심을 하면 어떻겠는가?”는 말을 우스갯소리처럼 내놓은 적이 있다. 모두들 그것은 ‘꼼수’가 아닌가 하며 그 말을 꺼낸 사람을 지청구했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삶의 연속성과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는 통찰이 아닌가 생각했다.

    단 한 번의 결심으로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삶은 무수한 시행착오와 실수와 실패 속에 ‘온몸으로 온몸을 밀어’ 나아가는 것이다.

    고작 사흘이 지났을 뿐이다. 살아있는 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킬 시간은 충분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는, 스스로 정한 계획이 고작 사흘 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면 그것은 애초에 생각했던 것만큼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전히 긴요하고 소중한 일이라면 사흘 후 다시 새로운 결심을 세워 다지면 충분하다. 하지만 내면의 강력한 동기가 없는 허울만의 목표나 결심은 처음 다이어리에 적어 넣을 때부터 실패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그 모든 계획을 나 자신을 위해 세웠는가. 나의 몸을 사랑하기에 건강하게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시선과 잔소리 때문에 술 담배를 끊고 살을 빼려는 것은 아닌가. 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시당하고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조바심 때문에 독서와 공부를 하려는 것은 아닌가. 정말 내게 중요한 일이었다면 왜 며칠 지나지도 않은 작년에는 하지 못했던 것인가. 이 대목에서 간디 선생의 한마디가 귓가에 쟁쟁하다.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벵골어는 ‘미래’와 ‘과거’라는 뜻을 하나의 단어로 쓴다고 한다.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은 다른 시간일 뿐이다. 그러니 내일의 희망을 따로 꿈꿀 것 없다. 오늘의 희망, 그리고 매일의 희망으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야 한다.

    [김별아 소설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6호(2012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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