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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비블리오필리] 걷기의 부활
입력 : 2011.05.13 11:2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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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생물학자이자 마라토너인 베른트 하인리히 미국 버몬트대학 교수는 '우리는 왜 달리는가'라는 책에서 이 같은 전율을 느끼는 원인에 대해 “달리기는 전혀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강렬한 열정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400만 년 전 숲에서 사바나로 이동한 원시인류가 달리기를 시작한 이래 달리기는 인간의 가장 일차적인 생존 방식이자 운동방식이었다. 원시시대 동굴벽화 대부분은 창을 들고 동물을 따라 뛰어가는 사람들을 묘사한 것들이다. 생물학자인 하인리히는 인간의 달리기뿐 아니라 다양한 동물의 이동방식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을 시도한다. 도요새의 장거리 이주, 사슴의 멋진 달리기 솜씨, 낙타의 지구력, 뒤영벌의 체온조절, 개구리의 폭발적인 도약, 바퀴벌레의 완벽한 보행을 통해 달리기의 비밀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는 또 발견한다. 오로지 속도와 지구력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일어나는 잡것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달리기가 가장 원초적인 생명활동임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기술이나 신념, 허위를 완전히 제거하고 나면 오직 본질만이 남는다.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이 달리기다.”
달리기는 우리 인생을 닮았다. 늘 도달해야 할 곳은 존재했고 그곳에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때로는 외로웠으며, 때로는 숨이 턱에 차도록 힘들었고, 때로는 스스로 실망하며 중간에 포기하기도 했다. 그래도 언제나 도달해야 할 곳은 존재했고, 그것은 삶이 가진 숙명이자 희망이기도 했다. 그렇다. 하인리히 말처럼 “달리기는 인생의 기막힌 은유”다.
중력과 싸우면서 살아온 인간에게 가장 숭고한 행위는 걷는 것이다. 약 600만 년 전 최초로 두 발로 일어선 인류는 유일하게 직립 보행을 하는 동물로 지구에 군림해왔다. 인류 역사는 사실 곧 걷기 역사다. 걷는다는 건 세상과 소통하는 일이었으며 때로는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인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미네소타 주립대 교수인 역사학자 조지프 아마토는 “걷는 건 곧 말하기”라고 밝힌다. 걷는 행위 자체가 소통이라는 의미다. 그의 걷기 예찬을 담은 책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에 나왔다. 직립보행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게 했다. 직립보행을 하면 손의 관절을 이용해 걸을 때보다 35% 정도의 칼로리가 절약된다. 인간은 이 남아도는 칼로리를 뇌에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많은 물건을 운반할 수 있었고 손을 훌륭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손이 발처럼 걷는 것에 주로 활용됐다면 인간의 문명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고대 로마문명은 걷기가 만들어낸 문명이었다. 소나 말, 수레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지휘관이 아닌 모든 로마 병사는 걸어서 대륙을 지배했다. 로마 군대의 행군 속도와 행군 거리는 장거리 육상 여행의 상한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례가 됐다. 로마 병사가 다져 놓은 길을 따라 지식과 기술이 전파됐고, 이 길은 흙길에서 자갈길로, 다시 아스팔트로 바뀌면서 유럽문명의 핏줄 노릇을 했다.
중세에 들어서도 인간에게 걷기는 삶의 가장 중요한 일부였다. 이때 걷기는 곧 계급을 의미하기도 했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다니는 귀족이나 기사와 일반인들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됐다. 이때부터 ‘걸을 수밖에 없는 사람’과 ‘걷고 싶을 때만 걷는 사람’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걸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농민이나 하인, 영세상인, 가난한 순례자들이었다. 상대적으로 높은 계급이었던 ‘걷고 싶을 때만 걷는 사람’은 18세기에 이르러 산책 문화를 탄생시켰다. 생존과 상관없는 유희로서 걷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산책은 낭만주의를 발전시킨 하나의 동인이 됐다. 사상가와 문인은 걷기를 통해 세상과 자연과 교감을 시도했다.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잉글랜드와 유럽을 도보 여행하면서 낭만주의 시를 썼다. 그의 시 세계는 미국의 휘트먼과 소로, 일본 시인 바쇼에까지 이어져 시적 도보주의(Pedestrianism)의 기점이 됐다. 시인 괴테, 철학자 루소, 과학자 훔볼트 등도 걷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지평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산책은 시간이 흘러 등산과 탐험으로 연결됐다.
인간의 걷는 행위는 미지의 땅으로 퍼져나갔다. 북아메리카 이주민은 곳곳으로 퍼져나가 오늘의 미국을 탄생시켰고, 탐험가들은 극점과 높은 산맥을 인간의 발아래 굴복시켰다.
걷기는 혁명과 전쟁이라는 묵직한 역사에도 기여했다.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봉기한 민중은 행진을 통해 세상을 바꿨고 히틀러와 무솔리니 지시에 따라 행군을 시작한 군대는 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했다. 근대 이후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걷기는 인간의 필수행위로서 위치를 상실했다. 주범은 자동차였다. 자동차가 주는 효율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걷는 것을 잊게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걷기는 부활하고 있다. 중력과 싸우는 행위인 걷기의 가치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걷기로 진화해 온 몸의 건강, 자연과 접촉, 사색을 위해 현대인이 다시 걷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허연 매일경제 문화부 차장·시인·문학박사 praha@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호(2011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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