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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다즐링 주식회사 | 다르질링티와 아삼티, 그리고 마살라차이
입력 : 2022.12.07 14: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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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한 오지에서 봉사하는 엄마를 찾아 ‘다르질링열차’를 탄 미국인 3형제 프랜시스(오웬 윌슨), 피터(애드리언 브로디), 잭(제이슨 슈왈츠먼). 아버지 장례식을 치른 후 1년 만에 만난 형제는 아버지 소식을 엄마에게 전하기 위해 인도에 왔다. 열차 속에서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난다. 중간중간 열차가 멈추거나 자꾸 사고를 일으켜 열차에서 쫓겨나 인도 곳곳을 돌아보기도 한다. ‘다르질링열차’ 자체도 선로가 있음에도 탈선해 길을 잃어버리는 대책 없는 기차다. 영화 <다즐링 주식회사>는 그 다르질링열차를 타고 연락도 잘 안 되는 엄마를 찾아 떠난 삼형제의 사고만발 인도 여행기를 그렸다.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을 통해 ‘색감 천재’ ‘할리우드 최고 비주얼리스트’ ‘미장센의 대가’ 명성을 얻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이다. 삼형제는 모두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에도 출연한, 소위 앤더슨 사단 배우다.
원제 <다즐링 limited>는 인도철도청이 운영하는 열차 이름이다. 인도철도청은 마하 파리니르반 성지 열차를 시작으로 다르질링과 시킴 등지를 도는 고산열차 외에도 사막투어, 궁전여행, 힌두성지, 남인도 여행 등 70여 개에 달하는 열차 여행 프로그램을 자랑한다나. 삼형제가 탄 열차는 그중 어떤 열차였을까? 영화 속에서는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다. 그저 다르질링이라는 이름에 기대 다르질링과 시킴을 찾아가는 고산열차가 아닐까 혼자 생각해볼 뿐.
버킷리스트에 ‘시베리아횡단열차 타고 시베리아 횡단하기’를 올려놓으신 분도 꽤 많을 터. 이 영화를 보고 ‘시베리아횡단열차 타기’를 과감히 버리고 대신 ‘다르질링열차 타고 다르질링에 올라가 ‘다르질링 퍼스트 플러시’ 한 잔 마시고 오기’로 바꿨다. 사실 영화에 차 얘기는 1도 나오지 않는다. 열차 손님에게 주는 음료는 차가 아니라 ‘스위트 라임’ 한 잔이다. 그럼에도 ‘다르질링’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인도의 대표적인 차 생산지 다르질링을 떠올리고, 다르질링에서 만들어내는 다르질링 홍차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연상이다.
다르질링은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바로 위에 ‘시킴’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시킴은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 네팔, 동쪽 부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시킴 아래 다르질링은 북쪽만 시킴일 뿐, 서쪽 네팔, 동쪽 부탄과 국경선을 맞댄 것은 시킴과 마찬가지다. 네팔, 부탄 하면 떠오르는 지형? 히말라야 산맥이다. 히말라야 산맥에 속하는 다르질링 역시 해발고도 2000m 이상 되는 고산 지대다.
원래 인도에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없었다. ‘차’라는 게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인도인이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부터다. 영국의 차 소비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엄청난 적자를 기록한다. 영국도 중국에 물건을 팔고 싶었지만 중국은 당시 ‘오랑캐 중 하나쯤으로 간주한’ 영국의 물건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꼬박꼬박 은을 받고 차를 팔았다.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우려한 영국은 중국인에게 아편을 팔고 은을 받기 시작한다. 그렇게 영국은 무역의 추를 자신들에게 되돌리는 데 성공하지만, 이에 격분한 중국 정부와 충돌이 일어났고 이는 ‘아편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아편전쟁은 철저하게 중국의 패배로 끝이 났고, 이후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 차 독점수입권을 갖게 되면서 영국은 차 문화의 중심 국가로 떠오른다.
다르질링티는 중국에서 가져온 차나무에서 시작
아삼티는 인도 현지 자생 차나무… 중국 종과 달라모든 것은 화무십일홍. 세계열강의 치열한 경쟁 상황에서 영국 동인도회사가 언젠가는 중국 차 독점수입권을 뺏길 수 있다는 예상에 영국인들은 중국 대신 차나무를 심어 차를 생산할 수 있는 대체지를 오랫동안 찾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국 황제는 칙령을 내려 차 생산 방법을 국가 기밀로 다루게 했다. 이를 누설하는 자는 사형으로 다스렸다. 차나무나 차 씨앗 반출도 불법이었다.
이때 나타난 한 사나이가 있었으니, 스코틀랜드인 로버트 포천이다. 사람 사귀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포천은 변발을 하고 중국 옷을 입고 중국 전역을 돌며 다양한 중국 친구를 사귀었다. 그렇게 차 씨앗과 차 재배 전문가들을 대거 확보해 당시 영국령이던 인도에 갈 채비를 마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중국 정부는 포천에게 현상금까지 내걸며 뒤쫓았다. 포천은 아슬아슬하게 중국 정부를 따돌리고 인도행 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인도에 도착한 포천은 차 씨앗을 인도 곳곳에 심었다. 그중 유일하게 차나무가 살아남은 곳이 바로 인도 북동쪽 국경 고원 지대 ‘다르질링’이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다르질링은 지역이 넓지 않다. 다르질링 전체를 다해봐야 차 생산량이 1만t에도 미치지 못한다. 영국이 원하는 생산량에 턱없이 모자라는 양이었다. 그때 ‘환상의 소식’이 들려온다. 인도 북동부 아삼 지역에서 홍차 생산에 성공했다는 소식이다. 사실 포천이 다르질링에 차나무를 심기 전인 1823년, 로버트 부르스라는 사람이 인도 북동쪽 끝 ‘아삼’ 지역에서 인도 자생 차나무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 차나무는 중국종과 달랐기에 이 나무가 차나무냐 아니냐의 논란이 많았다. 중국 차나무를 가져와 심어야 제대로 된 차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렇게 몇 십 년 동안 혼란과 논란의 시기를 보낸 후 거의 1860년 가까이 되어서야 아삼에서 제대로 된 홍차가 나오기 시작했다.
영국인은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강하고 떫은맛의 홍차, 영국인은 어차피 차에 설탕과 우유를 넣어 마셨기 때문에 다소 강하고 떫은맛의 차를 선호했다) 아삼 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아삼은 지역도 넓다. 아삼에서 차 재배가 일상화된 이후 아삼에서만 무려 60만t가량의 차를 거둘 수 있게 됐다. 물량이 많은 아삼차 덕분에 홍차 가격이 확 떨어졌고, 그렇게 홍차는 귀족뿐 아니라 서민도 즐길 수 있는 차가 됐다.
싱가포르 홍차 브랜드 카페 TWG에서 다르질링 홍차를 맛볼 수 있다. 여기서 퀴즈. 인도 홍차를 대표하는 다르질링티와 아삼 티 중 비싼 차는? 당연히 물량이 적은 다르질링차다. 물량이 딱 정해져 있는 브루고뉴 와인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게다가 다르질링은 고도가 높다. 고지대에서 자란 찻잎으로 만들어진 차는 저지대 찻잎으로 만든 차보다 가격이 비싸다. 기후 등 환경의 차이로(테루아) 고지대 차가 훨씬 품질이 좋다는 게 정설이다.(대만차도 높은 고도에서 재배한 고산차가 일반 차보다 훨씬 비싸다.)
다시 퀴즈. 차 가격을 결정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우선 물량. 두 번째 고도. 그럼 세 번째는? 찻잎을 따는 시기다. 녹차에서도 우전이 세작보다 비싸듯(청명과 곡우 사이에 잎을 따 만든 녹차를 ‘곡우 전’이라는 의미로 ‘우전’이라 부른다. 그해 처음으로 잎을 따서 만든 차라는 의미로 ‘첫물차’라고도 한다. 곡우와 입하 사이에 따는 두물차가 ‘세작’이다.) 다르질링차도 첫물차가 두물차보다 훨씬 비싸다. 다르질링 첫물차를 다르질링 우전이라 부르냐고? 설마 그럴 리가~ 다르질링 첫물차는 ‘다르질링 퍼스트 플러시(first flush)’라 불린다. 두물차는 ‘다르질링 세컨드 플러시(second flush)’다. 다르질링은 가을차도 나온다. 가을차는 오텀널(autumnal)이라 부른다.
다르질링 퍼스트 플러시는 2월 말에서 3월 초 고개를 내미는 부드러운 싹으로 만든다. 이후 4월 중순부터 나오는 잎으로 만든 게 세컨드 플러시, 오텀널은 10~11월에 생산한다. 겨울 동안 겨울잠을 자는 차나무는 겨울을 나기 위해 뿌리에 저장해뒀던 많은 영양분을 봄이 되면 새잎이 나는 데 도움이 되라며 새싹으로 잔뜩 내보낸다. 또 아직 추운 초봄 날씨는 찻잎을 느리게 자라게 하는데, 느리게 자라는 만큼 찻잎에 맛있는 성분이 진하게 농축된다. 영양분도 많고 맛있는 성분도 진하게 농축된 싹으로 만들었으니 ‘퍼스트 플러시’가 귀할밖에. 점점 더 고급차를 찾던 사람들 눈에 ‘다르질링 퍼스트 플러시’가 들어왔고, 머스캣 향이 특징적인 ‘다르질링 퍼스트 플러시’는 ‘홍차의 샴페인’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고급차의 대명사가 됐다.
차 가격 결정 기준은 생산량,재배 고도, 찻잎 따는 시기
다르질링 홍차 중 최고는 ‘다르질링 퍼스트 플러시’진짜 샴페인처럼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머스캣 향과 맛이 나는지는 묻지 마시길. ‘다르질링 퍼스트 플러시’는 홍차 제다법으로 만들긴 했지만 100% 산화시키는 일반 홍차보다 훨씬 산화를 덜 시켜 홍차 ‘삘’이 한참 덜 난다. 다만 뭔가 ‘프레시’하면서 정체성이 ‘아리까리’한 느낌이 상당히 매력적인 것만은 확실하다. ‘비싸고 귀한 차’라고 머리에 각인되어 나오는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세상만사가 뭐 다 그런 것이니.
영국의 대표적인 홍차 브랜드 ‘포트넘&메이슨’에서는 매년 다르질링 지역 다양한 다원의 ‘다르질링 퍼스트 플러시’ 차를 선보인다. 다르질링이 그렇게 고급차의 길을 가는 와중에 아삼티는 대중 차로 자리매김했다. 아삼차가 나온 이후 서민도 차를 즐길 수 있게 됐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럽에서나 가능한 스토리였다. 인도인에겐 언감생심. 그래도 차를 마시고 싶었던 인도인이 찾아낸 것이 ‘마살라차이’다.
고급 홍차는 다 영국에 보내고 인도인이 마실 수 있는 홍차는 질이 떨어지는 하급 홍차였다. 품질이 떨어지는 하급 홍차를 어떻게 맛있게 마실 수 있을까 고민하다 고안해낸 방법이 마살라차이다. 사실 인도 차 하면 아삼티나 다르질링티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마살라차이’다. 인도 특급호텔서부터 노점상까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바로 그 차다. 마살라차이는 ‘밀크티에 향신료를 더한 차’ 정도로 보면 된다. 만드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 시나몬 1개, 정향 1개, 카다멈 2개, 팔각 반 개에 계피와 흑후추를 넣고 잘게 부순다.
(향신료는 사실 정답이 없다. 취향에 맞춰 넣을 건 넣고 뺄 건 빼고 더 넣고 싶은 건 더 넣으면 된다. 예를 들어 펜넬은 호불호가 강하니 조금씩 넣어보면서 양을 결정하고, 후추는 흑후추나 백후추 무얼 사용해도 상관없는 식이다.)
· 향신료와 찻잎을 넣고 물을 약간 부어 약불에서 3~4분가량 끓이면서 진하게 우려낸다.
· 우유를 붓고 2~3분가량 더 끓인다.
마살라차이를 만들 때 이렇게 다양한 향신료를 으깨어 넣는다. 향신료가 들어가는 만큼 이국적인 향내가 풀풀 나고 맛도 좀 낯설 것 같지만 의외로 부드럽고 맛있다. 그저 살짝 독특한 밀크티라고나 할까. 마살라차이가 유행하면서 인도에서는 어디서나 ‘차이왈라(chai-wallah)’를 볼 수 있게 됐다. 마살라차이를 파는 노점상이다.
여기서 잠깐. ‘마살라’는 무슨 뜻일까. 마살라는 각종 향신료를 넣고 빻은 분말을 의미한다. 요리에 감칠맛을 더하는 인도식 조미료. 튀김에 찍어먹고 콜라에 뿌려먹기도 한다나.
다시 영화 이야기로. 인도를 떠나기로 하면서 둘째 피터 역의 에드리언 브로디는 이렇게 말한다. (<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 역으로 나왔던,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살바도르 달리와 100% 싱크로율을 자랑했던,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에서 주인공 드미트리 역할을 맡았던 바로 그 배우다.)
“난 이 곳의 냄새가 좋아. 못 잊을 것 같아. 아주 독특해.”
우리는 냄새로 공간과 느낌을 기억한다. 차에 푹 빠지고 차를 계속 마시게 되는 것도 어쩌면 차향에 빠져서일지도. 차 통을 열면 훅~ 풍기는 그 건차 향의 황홀함, 차에 뜨거운 물을 붓고 우려낸 다음 맡아지는 나물 삼은 듯하면서도 비릿하지 않고 화려한 그 향의 나른함, 그리고 우려낸 차를 맛보기 전에 김을 손바닥으로 살살 끌어당길 때 느껴지는 그 화사함이라니. 그래서 오늘도 또 차 한잔을 마시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편집장]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7호 (2022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