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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억의 골프 소묘시초(素描詩抄)] 골프장의 소요학파
입력 : 2026.06.17 10:4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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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골프를 함께 치면 오랜 지기처럼 가까워질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골프라는 운동은 참으로 독특하다. 같은 티잉 그라운드에서 출발해 같은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실수를 웃음으로 넘기며, 라운드가 끝나면 함께 목욕까지 한다. 한나절을 함께 보내는 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는 자연스레 허물어진다. 그래서 몇 번만 함께 라운드를 해도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는지도 모른다.
골프의 매력은 단순히 공을 치는 데만 있지 않다. 동반자와 함께 걷고, 대화를 나누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 속에서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특히 탁 트인 대자연 속에서 마음을 열고 나누는 대화만큼 값진 것은 없다. 친구 사이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선후배 간에도 평소에는 쉽게 꺼내지 못하던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도시의 실내에서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보다 훨씬 더 진솔한 이야기가 오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오래전 철학자들의 삶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치기 위해 마케도니아에 머물다 아테네로 돌아온 뒤, 자신이 세운 학원 리케이온에서 제자들과 함께 산책로를 걸으며 토론을 이어갔다. 그 산책로를 ‘페리파토스(peripatos)’라 불렀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걷고 사유하는 학문적 태도로 인해 ‘소요학파(逍遙學派)’라 불리게 되었다.
앉아서 하는 대화보다 걸으며 나누는 대화가 더 창의적인 생각을 이끌어낸다는 말도 있다. 아마도 걷는 동안 발의 움직임이 온몸의 감각을 깨워 오감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루소는 “내 몸이 움직이고 있어야 그 속에 내 정신이 깃든다”고 했고, 니체는 “나는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발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키르케고르는 “나는 걸으면서 가장 풍요로운 생각을 얻었다”고 했다. 모두 걷는 행위 속에서 사유가 살아난다는 뜻일 것이다.
나 역시 생각할 일이 있을 때면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 거실을 서성이는 습관이 있다. 그러면 생각이 한결 정리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아내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지럽다며 제발 좀 앉아 있으라고 타박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아들도 그 습관을 닮았다는 점이다. 아마 생각이라는 것은 몸의 움직임과 함께 살아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골프는 그런 의미에서 ‘걸으며 사유하는 스포츠’라 할 수 있다. 넓은 코스를 걸으며 공을 찾고, 다음 샷을 준비하고, 그 사이에 동반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마음의 문이 열린다. 스코어카드에는 숫자만 남지만, 그날의 대화와 웃음, 그리고 자연의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는다.
2006년 11월 7일, 제법 찬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평소 가까이 지내던 박재규 경남대 총장 부부와 우리 부부는 가평 베네스트CC에서 라운드를 함께했다. 박 총장은 볼링, 수상스키, 스키 등 여러 종목에 능한 만능 스포츠맨이다. 특히 합기도 공인 3단의 실력을 지니고 있어, 호리호리한 체구와는 달리 집중할 때의 눈빛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그는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주말마다 퍼블릭 코스를 찾아 홀로 골프를 익혔다고 한다. 코치 없이 스스로 체득한 덕분인지 그의 스윙은 전형적인 교과서와는 조금 다른, 이른바 ‘자기류(自己流)’에 가깝다. 퍼팅 역시 폼이 독특한데, 흥미로운 점은 부인 김선향 여사 또한 거의 같은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 그 퍼팅 자세를 보고 농담처럼 물었다.“폼이 조금 특이하신데요.” 그러자 박 총장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퍼팅은 폼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실제로 그는 2004년 제주 라운드CC에서 타이거 우즈와 함께 라운드를 한 적이 있다. 그날 독특한 퍼팅 폼으로 이글 퍼팅을 성공시키자, 우즈가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역시 퍼팅은 폼이 중요한 게 아니군요. ”이후 동료들은 그의 핸디캡을 낮추라고 권하며 농담을 건네곤 했다.
박 총장이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주요 연설문을 작성한 이는 다름 아닌 부인 김선향 여사였다. 김 여사는 경남대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 연구로 널리 알려진 학자다. 학문적 깊이와 따뜻한 품성을 함께 지닌 분이다.
그날 가평 베네스트CC에서 두 부부가 함께 라운드를 하며 나는 문득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다.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는 얼굴이 닮는다고 하는데, 골프 스윙마저 서로를 닮아가고 있었다. 리듬이 맞고 호흡이 닮으면서 자연스럽게 비슷한 동작이 만들어지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작은 소묘 한 편을 남겼다.
素描詩抄
가평 베네스트CC
닮은꼴 부부
부부는 오래 살면 얼굴도 닮는다는데
다정한 세월이 쌓이면 아니랄까 보아
골프 치는 모습도 서로 닮아가네
너네 부부 스윙은 오버 스윙이라 하고
쟤네 부부 스윙은 하프 스윙이라 해도
퍼팅 모양까지 닮으니 한솥밥 동지로는
역시 일심동체 부부뿐이로세.
2006.11.27
심방에서 우람(友談) 라종억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통일문화연구원을 설립하고 문화 진작을 통한 국격 향상과 통일 기반 조성을 실천해왔다. 핸디(O)의 골프 실력자다. 아시아 100대코스 선정위원장과 대한프로골프협회(KPGA)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대한민국 골프문화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