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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의 인문학 산책] 멋진 삶, 성실한 삶, 함께하는 삶
입력 : 2025.11.18 16: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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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시인은 아버지로부터 뼈아픈 충고를 들었다. “멋지게 사는 건 너무나 쉽다. 하지만 뭔가를 이루는 것, 그게 정말 어렵다. 아들아, 명심해라. 멋지게 살려 하지 말고, 무언가를 이루도록 해라.”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회한에 찬 목소리로 아들에게 작은 성취라도 이루는 삶을 호소한다. 심보선의 에세이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문학동네펴냄)에 나오는 이야기다.
‘멋진 삶’은 현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꿈꾸면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이러한 삶에 사는 이들은 인생을 예술 작품처럼 꾸미려고 한다. 완전히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삶을 욕망하고, 또 그렇게 살아 불후의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이들은 주어진 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실존을 조형한다.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꾸밈에만 집중하기에, 그의 삶은 대개 사회적 제약이나 구조적 한계와 충돌한다. 따라서 그의 삶은 멋져 보일수록 불우해진다. 시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호소한다. “많은 사람이 나를 멋진 사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말이다. 아들아, 나는 실패자다.” 살면서 실제로 이룬 게 드물(다 여기)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 멋쟁이들을 ‘자유의 스타일리스트’로 불렀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해 좋은 직장 다니기’ 같은 표준적 삶의 양식이나 ‘뼈 빠지게 일해 가족 책임지기’ 같은 정해진 도덕규범을 거절한다. 그 대신 그들은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서 자유롭게 자기 삶을 조형한다. 일찍이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말했듯, 그는 불후하려고 노력하기에 불우해진다. “노력하는 자, 그는 반드시 방황한다.”
파우스트는 자기 영혼까지 팔아서 몇 차례 삶을 거듭하면서 자기 삶을 누구나 경탄할 만한 작품으로 빚어낸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 시간이 멈춘 듯한 황홀경이 찾아들면서 삶이 다시 반복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흡족한 순간에 이르렀을 때가 되어야 그 삶은 완성된다. 그야말로 삶이 영원불멸의 예술품이 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실제론 이루지 못할 꿈이기에, 무수한 실패로 끝날 이 ‘멋진 삶’은 평범한 이들은 추구할 게 못 된다. 괴테처럼 비범한 인물이어야 감히 시도할 법하다.
‘성취하는 삶’은 큰 꿈과는 상관없다. 이 삶은 자기 직업, 즉 자기가 택한 분야에서 모든 성실을 다하는 삶이다. 이 삶의 방식을 정리해서 알려준 사람은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다. <직업으로서의 학문>(나남출판 펴냄)에서 베버는 말한다. “오늘날 진실로 결정적이며 가치 있는 업적은 항상 전문적인 업적입니다.”
이 책은 베버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엮은 책이다. 베버는 ‘위대한 학자, 개성 있는 학자’가 아니라 ‘헌신하는 학자, 전문적인 학자’가 되라고 권한다. 현대의 학자인 전문가는 종교적 계시나 영적 지혜를 구하지 않는다. 이성과 합리에 바탕을 두고 “사실관계의 인식에 이바지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행하는 직업”이 되었다.
전문가란 연구실 책상 앞에 궁둥이를 딱 붙이고 하루하루 정진하는 성실한 일꾼에 가깝다. 이 세계에선 마음 가는대로 날뛰는 돈키호테는 존립할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무언가를 이루는 사람은 자기 삶을 예술 작품처럼 꾸미려 해서는 안 된다. 전문가의 삶은 실낱 같은 가능성에 온 인생을 걸고 탕진하는 무모한 도박일 수 없다. “자신이 헌신해야 할 과업의 흥행주로 무대에 함께 나타나는 사람. 체험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사람. 어떻게 하면 내가 단순한 전문가와 다른 어떤 존재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는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누구도 말하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까, 하고 묻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개성’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탕을 노리고 영웅처럼 사는 이들은 절대 전문가의 성취를 얻을 수 없다.
인생은 예술 작품이 아니다. 큰 도전과 실패를 통해 불후를 증명하려 하는 삶의 초상은 이제 소설에서만 가능하다. 자기 삶에서 무언가를 이루려는 사람은 길가에 버려진 빵을 조각조각 뜯어 옮기는 일개미처럼 살아야 한다. 작은 성취를 습관적으로 쌓을 때, 그 끝에서 삶이 번창할 수 있다.
“성취란 헌신의 결과이지 개성의 증명이 아니다.” 가치는 결과물을 낳으려면 성실성을 지표 삼아 자잘한 일을 꾸준히 처리해서 그 결과를 자기 이름 앞에 모아야 한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에서 괴테가 보여주듯, 성취는 체념, 즉 궁극의 위대함을 포기하고 주어진 현실에 맞춰 열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의 몫이다. 성실히 노를 저어 물결을 뒤로 보내는 사람이 어느 순간 바다를 건너서 낯선 해변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삶은 지나치게 무미건조하다. 모험도, 흥분도, 기적도 없는 삶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나 비참하다.
시인은 ‘멋진 삶’과 ‘성실한 삶’ 말고 다른 인생길이 있다고 말한다. ‘멋진 삶’과 ‘성실한 삶’은 모두 인생을 세상의 파도 속을 헤엄치는 개인의 고독한 자맥질이라고 상상한다. 아무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순 없으므로, 언뜻 그렇게 보일 순 있다. 그러나 인생은 친구도, 동료도, 연인도 없이 쓸쓸히 보내는 게 아니다. “내가 선택하고 빠져드는 대상은 인간들의 탄식, 좌절, 환호, 기쁨, 경탄이 어려있는 세계”다. 나는 고독히 결단하고 홀로 분투하지 않고, ‘함께의 세계’에 뛰어들어 여러 사건에 참여하면서 사람들과 이런저런 방식으로 어우러진다.
시인은 말한다. “나의 몸과 영혼을 뜨겁게 하고, 내 가슴 속에서 말을 들끓게 하고, 나의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동시대인의 삶이고 그 삶에 섞여 드는 사물들의 동시대적 운동이다.” 내 꿈과 열정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다. 내 성실과 헌신도 모두 이 ‘함께하는 삶’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열정에 취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멋진 삶, 열정을 버리고 건조한 성취를 쌓아가는 성실한 삶, 열정을 품고 친구와 함께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삶. 자아 너머에서 친구가 있음을 발견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