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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캐즘 터널 끝 보이나 수주 취소 후폭풍 딛고 ESS 신시장 개척
입력 : 2026.06.23 10: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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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을 지나 일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삼성SDI가 메르세데스-벤츠와 최대 10조 원 규모의 초대형 계약을 성사시키며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SK온은 일본 도쿄에 지사를 설립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섰다. 지난해 말 불거진 LG에너지솔루션의 연쇄 수주 취소 사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업계 전반에 반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셈이다.
삼성SDI는 지난 4월 서울 강남구 안다즈 호텔에서 최주선 삼성SDI 사장과 올라 칼레니우스 메르세데스-벤츠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만나 차세대 전기차용 하이니켈 NCM 각형 배터리 다년 공급 계약에 서명했다. 계약 세부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배터리 업계에서는 이번 거래 규모를 최대 10조 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번 계약은 삼성SDI가 벤츠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첫 사례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삼성SDI는 이번 수주로 BMW, 아우디(폭스바겐 그룹)에 이어 벤츠까지 독일 프리미엄 완성차 3사를 모두 고객사로 확보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칼레니우스 회장과 회동을 가진 지 5개월 만에 거둔 결실이다.
벤츠로서도 이번 계약은 절박한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벤츠의 2025 회계연도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57%나 증발했고, 핵심 시장인 중국에서 판매량이 21% 급감하는 등 위기 우려가 커졌다. 여기에 무역 갈등으로 인한 12억 달러 규모의 관세 폭탄까지 얻어맞으면서 긴장감이 높아진 바 있다. 특히 그간 필요한 배터리의 약 70%를 중국산에 의존해 온 벤츠가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K-배터리와의 협력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K-배터리 3사, 잇단 수주로 반격 개시이날 벤츠는 LG에너지솔루션과의 전략적 파트너십도 재확인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2024년 10월 50.5GWh 계약을 시작으로, 2025년 9월 총 107GWh 공급 계약, 같은 해 12월 2조600억원 규모 LFP 공급 계약 등 총 4건의 계약을 벤츠와 체결한 바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가 벤츠로부터 확보한 누적 수주 합산규모는 30조원을 크게 웃돌게 됐다. 두 회사는 중저가 세그먼트의 LFP 배터리와 46시리즈 원통형 배터리, 그리고 2028년형 이후 신모델을 겨냥한 고효율 각형 배터리를 각각 분담하는 구조를 형성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이번 계약을 계기로 삼성SDI가 유럽 시장에서 중국 업체에 빼앗겼던 가동률을 회복하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SK온은 시장 다변화를 통해 생존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SK온은 4월 말 일본 도쿄에 지사를 설립하고 닛산 등 현지 완성차 업체와의 협력 강화 및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 기회 발굴에 나선다. 서울, 미국, 독일, 중국에 이어 일본까지 주요 완성차 시장을 연결하는 글로벌 영업망이 사실상 완성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미국 조지아주에 위치한 SK온 배터리 공장. SK온이 일본 시장을 공략하는 배경에는 닛산과의 기존 계약이 있다. SK온은 지난해 3월 닛산과 약 15조원 규모의 대형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일본 완성차 시장에 처음으로 진입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 자동차 업계의 품질 기준을 통과했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크다. 그러나 닛산이 미국 행정부의 정책 변화와 수요 감소를 이유로 SK온 배터리가 탑재될 북미 전기차 생산 시점을 2028년 말 이후로 연기하면서 납품 일정 조정이 불가피해진 상황이다. 도쿄 지사 설립은 이런 상황에서 현지 고객사에 더욱 밀착 대응하고, 후속 수주로 연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삼성SDI, 벤츠 10조 빅딜
LG엔솔, 벤츠 25조 파트너십 재확인일본 전기차 시장의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올해 1분기 일본 승용 전기차 판매량은 2만6959대로 전년 동기 대비 80% 증가해 분기 기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하이브리드 위주였던 일본 시장에서 전기차 전환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신호다. SK온은 현재 복수의 일본 기업과 전기차 배터리 및 ESS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SK온 관계자는 “일본 지사를 거점으로 고객사 요구에 보다 신속하게 대응하고 신규 수주를 확보해 나갈 것”이라며 “올해는 북미를 중심으로 20GWh의 ESS 글로벌 수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여전히 시장 상황이 녹록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12월 총 13조5000억원에 달하는 계약이 연달아 취소되는 충격을 경험했다. 12월 17일 미국 완성차 업체 포드와의 계약 해지로 2027년부터 2032년까지 75GWh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셀·모듈을 폴란드 브로츠와프 공장에서 공급하기로 했던 계약이 파기됐다. 해지 금액은 9조6030억원으로, LG에너지솔루션 연간 매출의 약 28.5%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포드가 전기 픽업트럭 ‘F-150 라이트닝’ 생산을 중단하고 하이브리드·내연기관차 위주로 전략을 전환한 영향이었다. 이어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12월 26일 독일 프로이덴베르크 그룹 계열의 미국 배터리팩 제조사 FBPS(Freudenberg Battery Power System)가 배터리 사업 철수를 결정하면서 LG에너지솔루션과의 3조9000억원 규모 공급 계약이 해지됐다. 해당 계약은 대형 전기버스와 전기트럭 등 북미 상용차 시장에 공급하기 위해 2024년 4월 체결됐던 것으로, FBPS가 사업 전반에서 발을 빼기로 하면서 함께 무산됐다.
LG에너지솔루션 캐나다 넥스트스타 에너지_ 공장에서 ESS 제품이 출하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측은 “전용 설비 투자나 맞춤형 연구개발비용이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 해지에 따른 투자 손실이나 추가 비용 발생은 없다”며 “불확실한 고객사를 정리하고 더 탄탄한 수요처를 발굴할 기회로 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수주 잔고의 감소가 실제 재무 충격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설명이지만, 시장의 충격은 적지 않았다.
배터리 3사가 공통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는 곳은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이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급증과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전력망 안정화 수요가 폭발하면서 ESS 시장이 K-배터리의 필수 매출처로 자리 잡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7월 미국 기업과 약 5조9000억원에 달하는 ESS용 LFP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업계에서는 해당 기업을 테슬라로 추정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단일 계약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회사는 미시간 홀랜드 공장을 LFP 전용 생산 기지로 전환하고, 올해 ESS 배터리 생산능력을 30GWh에서 내년에는 50GWh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LG에너지솔루션 측은 “현지에서 LFP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비중국 기업으로서 수주 모멘텀을 극대화하겠다”고 밝혔다.
삼성SDI가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에 처음으로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한다. 삼성SDI는 미주법인을 통해 2조원을 웃도는 ESS용 LFP배터리 수주를 확보하며 미국 ESS 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 인디애나 공장의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라인 일부를 ESS용으로 전환하고, 올해 ESS 매출을 전년 대비 약 50% 성장시킨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SK온 역시 미국 재생에너지 기업 플랫아이언 에너지 개발과 1GWh 규모 ESS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국내에서는 올해 2월 제2차 ESS 중앙계약시장 입찰에서 절반 이상의 물량을 확보했다. 충남 서산 공장을 LFP 배터리 생산라인으로 전환해 총 3GWh 규모의 생산 능력을 확보한 상태다.
미국이 에너지 안보를 명분으로 중국산 ESS 배터리에 대한 관세를 강화하면서 국내 배터리 3사에게는 추가적인 기회가 열리고 있다. 중국이 글로벌 ESS 시장의 64%를 장악한 가운데, K-배터리 3사가 미국 내 현지 생산을 통해 빈자리를 노리는 전략이다.
최근 잇달은 수주 소식으로 국내 배터리 3사의 재무구조개선 여부도 관전 포인트다. 국내 배터리 3사가 올해 1분기 나란히 적자를 기록했다. 1분기 기준 세 회사가 동시에 영업손실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이 길어지는 가운데 미국 전기차 보조금 폐지까지 겹치며 북미 수요가 급격히 위축된 탓이다. 업계는 상반기를 실적 저점으로 보면서도, 하반기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 반등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배터리 업계 맏형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1분기 매출 6조5550억원, 영업손실 2078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2.5% 줄었고, 영업이익은 155.5% 감소하며 적자로 돌아섰다. 2022년 1월 LG화학에서 분사한 이후 1분기에 적자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른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1898억원을 제외하면 실질 영업손실은 3975억원 수준까지 불어난다. 정부 보조금이 없었다면 손실 규모가 두 배에 달했다는 뜻이다.
SK온, 일본 지사 설립GM과의 합작 공장 가동이 일시 중단된 데다, 북미 전기차 배터리 생산라인을 대거 ESS용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초기 비용이 실적을 끌어내렸다. 공장 가동률도 지난해 말 기준 47.6%로, 전년의 57.8%에서 10%포인트 이상 급락했다.
삼성SDI는 3사 중 상대적으로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분기 매출 3조5764억원, 영업손실 1556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2.6% 늘었고, 영업손실은 64.2%나 줄었다. 당기순이익은 561억원으로 흑자를 냈다.
제품 포트폴리오가 상대적으로 다양한 점이 방어막이 됐다. 전력용 ESS 외에 무정전전원장치(UPS), 배터리백업유닛(BBU), 전동공구용 원통형 배터리 판매를 늘리며 손실 폭을 분기마다 줄여가는 추세다.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소재 판매 반등으로 전자재료 부문 실적도 개선됐다.
SK온은 3사 중 손실 폭이 가장 컸다. 1분기 매출 1조7912억원, 영업손실 3492억원을 기록했다. 미국 전기차 보조금 폐지 이후 북미 수요 급감 여파가 가장 크게 반영된 결과다. 공장 가동률도 48.7%로 절반에 못 미친다. 그나마 방향은 달라지고 있다. 북미 판매량이 소폭 증가하고 유럽·아시아 지역 판매도 회복되면서 전분기 대비 적자폭을 916억원 줄이는 데 성공했다. 6분기째 적자이지만, 손실 규모는 분기마다 줄어드는 흐름이다.
국내 배터리 3사 모두 올해 상반기를 실적 저점으로 보고있다. 3사는 공통적으로 투자 속도를 조절하며 내실 다지기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설비투자를 2025년 대비 40% 이상 줄이겠다고 밝혔고, 삼성SDI는 수익성 중심의 선별적 수주 원칙을 재확인했다. SK온은 포드 합작법인 블루오벌SK의 자산 정리를 통해 부채비율 개선에 나서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ESS 시장이 단기 수주 경쟁을 넘어 장기 공급망 주도권 확보 싸움으로 흐르고 있다”며 “국내 배터리 3사가 현지 생산을 얼마나 늘리고 기술력을 끌어올리느냐에 따라 시장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추동훈 기자]